[특파원스페셜] 장쩌민 사망···팝송·오페라 즐겨 부르던 낭만주의자

2022-11-30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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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 '개혁개방' 추종···외자 유치로 경제성장

방한한 中 첫 지도자···미·중 관계도 '해빙'

'상하이방' 수장···은퇴 후 '원로정치'

장쩌민 전 국가주석 별세. [사진=연합뉴스]

30일 96세를 일기로 별세한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은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에 이어 중국을 이끈 3세대 지도자다.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재임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이끌었다.

블룸버그는 이날 장 전 주석의 별세 소식을 전하며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시위 후 중국의 극적 경제성장을 이끈 중국 지도자"라고 표현했다. 
 
鄧 '개혁개방' 추종···외자 유치로 경제성장 구현
그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신을 이어받아 당시 보수파 반대를 무릅쓰고 대외개방과 시장경제를 밀어붙이며 중국을 세계 경제대국 반열에 올린 지도자라는 게 세간의 평가다. 
경제 전문가 주룽지(朱鎔基) 총리를 발탁한 그는 국유기업 개혁부터 환율 규제 완화, 부동산 시장 자유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중국 경제 각 방면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고속 경제 성장을 위해 제너럴모터스, 월마트 등과 같은 외국기업 투자 유치에도 적극적이었다. 장쩌민의 총서기 재임 기간인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중국 경제 규모는 3배 이상 성장했다. 

장쩌민이 제창한 '삼개대표론(三個代表論)'이 그가 추종한 시장경제 사상을 잘 대변한다. 공산당이 노동자·농민(인민)뿐 아니라 지식인과 자본가의 이익까지 대표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론으로,  당시 기업인을 당으로 포용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이는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과 함께 중국 공산당 지도 이념으로 당장에 삽입됐다.

그는 중국 경제 고속성장의 기틀을 닦았지만, 성장과 개발에 초점을 둔 그의 시장경제 노선은 빈부격차 도농격차라는 극심한 양극화를 초래했다. 장쩌민의 뒤를 이은 후진타오 4세대 지도부가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다. 

장쩌민은 경제적으로는 개혁개방을 추종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보수색채가 강했다. 블룸버그는 “그는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전했다. 재임기간 중국 전통 정신 수련법인 파룬궁(法輪功)과 티베트 독립운동을 탄압해 서방세계로부터 인권을 유린했다는 비판에도 맞닥뜨렸다.
 
한국 방문한 中 첫 지도자···미·중 관계도 '해빙기'
장쩌민이 총서기로 등극한 1989년 6월 발발한 톈안먼 유혈 사태로 중국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장쩌민은 톈안먼 사태로 중국이 미국 등 서방국들의 제재를 받아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태에 놓였을 때 외교적 난관을 무난히 극복하고 중국 외교를 반석 위에 올렸다.

특히 상당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장쩌민은 미국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7년 10월 장쩌민 전 주석의 미국 방문으로 양국 관계는 다시 해빙기를 맞았다. 

1992년 한·중 수교 중심에도 그가 자리 잡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인 1995년 11월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방한 당시 한국 경제 발전에 탄복한 그는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과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을 방문하는 등 한·중 경제 협력에 관심이 많았다. 2003년 3월 국가주석 자리에서 내려올 때까지 한국 대통령과 총 10차례에 걸친 회담을 통해 한·중 간 경제 협력의 기틀을 마련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러브미텐더' 맞춰 춤추는 낭만주의자
장쩌민은 역대 중국 지도자로서 가장 개성 있는 인물로 꼽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진핑과 비교해 장쩌민은 다채롭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스타일의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낭만주의자였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01년 베이징을 찾은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중난하이(中南海)로 초청해 즉석 듀엣곡 '오 솔레미오'를 부르고, 2002년 미국에서의 국빈만찬에서는 로라 부시 영부인과 '문 리버' 등 미국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1996년 필리핀 국빈방문 때도 피델 라모스 당시 필리핀 대통령 요트에서 함께 팝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함께 부르며 춤을 췄다고 전해진다. 

톈안먼 광장에 세운 국가대극원 설계를 프랑스 건축가에게 맡기고, 미국 영화 '타이타닉'에 깊은 인상을 받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들에게 관람을 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청리 브루킹스연구소 차이나센터 소장은 블룸버그에 "문화 다원주의와 초국적주의를 향한 장쩌민의 지지로 1990년대 중반 이후 상하이에서 글로벌 문화 행사가 활발하게 이뤄졌다”고 전했다. 

중국엔 ‘하쓰(蛤絲·두꺼비 클럽)’로 불리는 장쩌민 전 주석의 팬클럽도 있었다.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 커다란 입, 허리춤까지 치켜 올린 바지까지, 그의 독특한 외모를 빗대 두꺼비란 별명을 지은 것이다. 장쩌민의 말투와 사진을 합성해 코믹한 드립으로 활용한 ‘모하(膜蛤)’ 문화도 2000년대 유행했다. 

중국 전문가인 데이비드 샴보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지난해 저서 ‘중국의 지도자들: 마오쩌둥부터 오늘날까지’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관대했던 장쩌민의 통치가 그립다"고 적었다.
 
'상하이방' 수장···은퇴 후 '원로정치'
장쑤성 양저우(揚州) 출생으로 중국 명문 상하이교통대학 전기학과를 졸업한 그는 러시아 유학파다.

1955년 구 소련 수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 1년 동안 자동차학을 공부했다. 자동차 공장 엔지니어에 이어 공장장, 연구소 부소장을 거치며 기술 전문 경제관료로 성장했다. 영국 BBC는 "중국 권력의 정점에 오른 '홍색 엔지니어'"라고 표현했다.

그가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한 것은 1985년 상하이시 시장으로 선출되면서다. 기술 관료의 실리를 살려 상하이시를 중국 최고의 경제·금융 중심지로 키우고 상하이 당서기 자리에 오른다.  

특히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그는 시위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상하이 현지 학생들과 유혈 충돌 없이 소요 사태를 잘 진정시켜 중앙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의 지지 아래 그는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의 뒤를 이어 당총서기에 올랐다. 이후 당중앙, 국가군사위원회 주석, 국가주석까지 맡으며 당(黨)·정(政)·군(軍) 등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2002년 11월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당 총서기 자리를 물려준 것을 시작으로 2003년 국가주석, 2004년 당중앙군사위 주석, 2005년 국가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순차적으로 물려줘 평화적 지도부 교체도 이뤄냈다. 

은퇴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 정치적 영향력을 축적하여 막후에서 큰 발언권을 행사했다. 특히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상하이시 출신 간부들로 구성된 ’상하이방(上海幇)’을 적극적으로 챙긴 것으로 유명하다. 상하이방은 태자당(중국 고위관료 자제),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출신)과 함께 중국 공산당 3대 계파를 이뤘으나, 시진핑 5세대 지도부 들어 '반부패 운동'을 벌이며 상하이방 세력이 숙청되며 사실상 와해됐다.
 

[자료=아주경제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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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빨갱이들로 고통 받은 사람이 얼마 던가? 우리가 공산당원의 죽음을 애도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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