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신화통신은 장쩌민 전 주석이 30일 낮 12시 13분(현지시간) 백혈병, 다발성 장기부전 등으로 상하이에서 치료받다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전했다. 이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국무원,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장쩌민 전 주석 부고를 발표했다.
이날 CNN은 장쩌민 전 주석이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서방으로부터 외면받던 중국을 다시 국제 사회로 편입시켰다는 공을 인정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홍콩 주권 재확보와 함께 2001년 WTO 가입,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 등을 통해 중국이 국제 사회에 통합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2005년 장쩌민의 전기 ‘중국을 바꾼 남자: 장쩌민의 인생과 유산’을 쓴 작가 로버트 로렌스 쿤은 중국의 국제 사회 내 편입을 가리켜 “아마도 그것은 10년 혹은 그 이상 기간 동안 두자릿 수 성장이라는 엄청난 성장의 주요 촉매제였을 것이다”며 “그 통합 때문이었다”고 평했다. 이어 "(중국 내) 확립된 경제적 궤도의 측면에서 보자면 절대적으로 분명한 것은 그것은 그 시기에 확립됐다는 것”이라며 “그러한 추세는 그의 임기 말년 즈음에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됐다”고 언급했다.
미국의 중국 관련 저명 학자인 오빌 셸은 “나는 그가 그의 생전에 저평가 받았다고 생각한다”며 “후(진타오)와 시(진핑)에 비교할 때 그는 매우 입담 좋고 개방적이이며 친근했다”고 언급했다. 이어 “그는 공산주의 독재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세계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 소수 중국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고 평가했다.
다만 명이 있다면 암도 있는 법. 그가 중국에 현재까지 만연한 부패의 씨앗을 뿌렸다는 의견도 많다. 그는 경제적 자유와 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 정책을 추구했지만 이는 동시에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공산당의 철권 통치를 강화하는 계기도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고향인 상하이 출신 인물들로 구성된 상하이방의 중심 인물로서 상하이방의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뿐만 아니라 파룬궁 탄압 등도 그의 행적에 어두운 그림자이다.
뉴욕 소재 중국 정치 관련 유력 출판업체 미러미디어그룹의 설립자 겸 최고경영자(CEO) 핀호는 “장(쩌민)은 모순적이고 돌발적인 지도자였다”며 “그는 서구 문화를 존중하고 존경했지만, 그는 중국 정치 시스템 내에서 살아야만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생각있고 비전있는 지도자가 될 준비가 안됐다”며 “그는 단지 등(소평)의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등(소평)의 통치를 연장했을 뿐이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