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자유' 위해 싸웠던 3선 박실 전 의원 별세

2022-10-2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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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해직기자' 출신…1차 정치 활동 규제자 대상

신민당 돌풍 이끈 뒤 '외교통'으로 활약

박실 전 의원 [사진=연합뉴스]




언론 자유를 위해 신군부와 싸우다 강제해직당한 3선 국회의원 출신 박실 전 의원이 29일 오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1939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고인은 전주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다녔다. 대학생 시절 4·19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63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정치부 차장을 역임하던 1977년 16대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맡았다. 

고인은 언론인을 대표해 신군부와 맞서 싸웠다. 1980년 1월 8일에 열린 신민당 제2차 헌법개정 공청회에 '한국기자협회 고문' 자격으로 참여해 '직선제 개헌'과 함께 "헌법 전문에 언론 자유를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해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당했다. 같은 해 11월 1차 정치 활동 규제자 811명에 포함됐다. 당시 기자 출신으로 고인처럼 정치활동 규제자에 포함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1984년 정치활동 규제 2차 해금 대상에 포함된 고인은 정치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해 김대중(DJ)·김영삼(YS) 등 민추협 세력과 구 신민당 계열이 총집결한 신한민주당 창당에 관여했다. 고인은 창당선언문 작성에 참여하며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85년 12대 총선에 서울 동작구 선거구에 출마한 고인은 야당인 신민당의 돌풍을 이끌었다. 정치 해금 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신민당은 12대 총선서 29.4% 득표율로 67석을 차지했다. 고인 또한 국회의원에 당선돼 여의도에 입성했다. 고인이 속해 있던 신민당은 1987년 통일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는데 이후 DJ와 YS의 대선 출마를 두고 갈라진다. 고인은 DJ의 동교동계와 함께 탈당해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했다. 이를 계기로 DJ계로 불렸다. 

1988년 평민당 원내수석부총무로 임명된 고인은 같은 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이후 14대 총선까지 당선되며 서울 동작구에서 연이어 3선에 성공했다. 그 뒤 1955년 15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국회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정계 은퇴 이후에는 헌정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서울언론인클럽과 대한언론인회 이사를 맡는 원로언론인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국회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한 경험과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살려 저술 활동에도 집중했다. △'벼랑 끝 외교의 승리 : 이승만 외교의 힘' △중공군의 한국전쟁' △'6ㆍ25전쟁과 중공군' 등을 쓰고 △'백악관을 향한 리건(레이건)' △비록 : 전화 속의 대사관' △'이승만과 미국대사관' 등을 번역했다. 

유족은 부인 전은희씨와 2남(박정원단국대 법대 교수·박석원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며느리 전아정·오진숙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30일부터는 13호실), 발인 11월1일 오전 9시, 장지 국립4·19민주묘지. ☎ 02-2258-5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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