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30주년 스페셜 칼럼] '북방외교의 꽃' 한중 수교 …아버지 노태우의 역사적 사명이었다

2022-08-22 06:00
  • 글자크기 설정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이사장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꿈은 ‘북방외교’를 통해 민족 자존을 바탕으로 세계 모든 국가와 정상 관계를 유지하며 남북이 화합하여 통일의 길로 가는 것이었다. 우리 국민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 틀 안에서 자랑스러운 세계 시민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대한민국이 한반도를 넘어 교류 범위를 확장하고 남북한이 통합되어 강한 국가가 되는 것을 꿈꾸셨다.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성격인 아버지는 그런 목표를 세우고 ‘남북 교류’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하려 하셨다. 30여 년 전 냉전체제에서 반공이념을 유지하던 국가가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할 수 있고, 그것이 국가 경제의 꾸준한 성장을 도우며 한반도 통일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라고 그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는 그 당시 아버지와 같이 일하셨던 분들의 열린 사고, 그들의 지혜와 노력으로 만들어낸 한국의 대전환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경제·문화에 기초한 행복한 사회'를 강조하면서도, 강한 국가와 남북 통일에 대한 생각은 결국 북방외교를 통해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와 수교하고 남북 교류에 물꼬를 트는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졌다. 내가 어려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분이 잠을 잊고 일하는 모습은 나에게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무거움과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북방외교와 북방외교의 꽃인 ‘한·중 수교’는 국가뿐만 아니라 나 개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본이 교화 노씨인 우리 집안의 내력도 중국과 연관이 있고, 동양문화와 역사에 기반하여 세계 정세를 읽은 아버지에게 한·중 수교는 꼭 성공시켜야 할 역사적 사명이었다. 나에게 중국의 역사와 문화 및 한민족의 기상과 그 경제·문화 영토였던 연해주와 만주에 대해 말씀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나도 중국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아시아적 가치관도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 공통성을 얘기해주시면서 한국 북방영토에 대해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교육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 생각한다.
대구 외딴 자락에서 자라 전쟁을 겪으며 살아오신 아버지가 동양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잘 이해하고 계신 것은 당시 시대 상황으로는 대단한 혜안이라 생각한다. ‘북방외교’뿐만 아니라 공공외교와 국제경제정책을 위한 KF(국제교류재단), KIEP(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힘을 보태고, 문화의 힘에 관심을 두고 문화부를 만들어 초대 장관으로 이어령 교수를 임명한 것도 파격이 아니었나 한다.

역사적 결과를 보고 나서 혜안이 있었다고 평가하기는 쉽지만, 혜안을 갖고 미래를 설계하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북방외교와 그 꽃인 한·중 수교가 한국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제대로 평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1980년대 국내 많은 상황이 국제화와 세계화라는 이슈로 경제와 국력이라는 문제를 두고 국내 경제성장 정체를 고민할 때 과감하게 우리의 경제와 외교적 영토를 넓힌 북방외교는 우리 외교사에 오래 남을 역사적 대변화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기업이나 사람들이 그 동토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교류하며 경제적 이익을 넓히고 우리 외교력과 문화적 영향력을 높여왔는지 생각하면, 이것은 대한민국이 바뀌는 과정에서 국력이 다시 업그레이드된 역사적 쾌거라고 본다.

한·중 수교를 준비하는 동안 아버지는 김복동, 박철언, 김종휘, 장치혁, 김한규 같은 분들과 자주 접하셨다. 그리고 외교부에 있는 한국 최고 엘리트들이 모두 이 북방외교의 ‘정점’을 위해 뛰었다. 관련자를 모두 거론하기 어렵지만 당시 미지의 꿈과 희망의 국가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그 수교에 반대하는 북한을 어떻게 따돌리고, 오랜 기간 국교를 유지하던 대만(당시 중화민국)과 관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등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북한과 전통적으로 우호적인 국가들과 연이어 수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것은 대한민국의 외교와 경제 영향력을 높인 북방외교의 큰 성과라고 본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금은 도전적 요인으로 등장했지만, 중국 제조와 그 시장을 통해 국제화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는지는 더욱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특히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 전통과 우리 전통적 인문 관계도 복원·확대하며 젊은이들에게 더 넓은 문화영토를 제공했다는 것은 한·중 수교로 얻은 이익일 것이다. 단지 중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체제 그리고 동북아 국제관계의 역학 구도에서 양자 관계의 반목과 질시 그리고 경쟁과 견제가 일어나는 것은 과일에 들어 있는 벌레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일이 달기 때문에 벌레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좋은 과실을 얻기 위한 양국 관계 관리와 개선 방법은 꾸준하게 노력하여 발전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북방외교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방식으로 남북한 문제 개선과 한국의 외교력 신장을 위한 전략으로 시작되어 동유럽 중에서 제일 먼저 헝가리와 수교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동토는 바로 서울과 가까이 있는 북녘 땅이다. 이들과 화합하고 교류하고 통합하는 것이 북방외교의 대단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북방외교는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북방외교에 동력을 더해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로 한국의 북방외교는 구소련과 수교에서 중국과 수교로 더욱 가까이 달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北京)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북한이라는 큰 장벽도 있고, 중국 국내 정치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을 보면 아버지는 ‘기다림의 동력’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계속 문을 두드리며 그들이 움직이기를 바았는데, 여기에 ‘베이징아시안게임’도 큰 기회가 되었다. 양국 간 교류가 실제적 필요에 따른 협력으로 큰 동력이 된 것이다. 여기에 정부와 기업의 과감한 지원은 한·중 수교에 큰 힘이 되었고, 기업들의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수교 조건에서 한·중 간 가장 큰 갈등은 중국이 원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One China Policy)’이었다. 이 문제를 넘어야 수교가 보였다고 한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밀사단은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마지막 담판을 해야 했다. 이때 이들을 가깝게 만들어 놓은 것이 인문적 접근이었다. 한·중 간 많은 문제가 아직도 이러한 인문적 접근 때문에 해결되기도 하고 오해를 사기도 한다는 것을 보면 동양문화에서 한국과 중국은 역사·문화적 끈이 양국 교류에 중요한 동력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명주인 ‘마오타이주(茅臺酒)’로 함께한 술자리에서 서로 흉금을 드러내며 서로의 입장을 조율하게 된 것이다. ‘취중진담’으로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최종 결론을 내게 되면서 이 소식은 청와대로 전해졌다. 한국의 역사를 바꾸는 시대의 기적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창고를 정리하면서 아버지가 고이 보관해 두신 종이 표지가 거의 바랜 ‘마오타이주’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중 수교를 자신의 큰 기쁨으로 생각하시기에 그 ‘수교주(修交酒)’라는 것을 아끼고 보관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퇴임 후 방문하신 후 나에게 가보라고 한 도시가 쓰촨성 청두(成都)다. 그곳의 유명한 이야기 삼국지는 동북아 3국이 같이 가야 할 과정과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북방외교’를 위해 노력하시던 아버지는 이제 근무하시던 파주 9사단 부근 통일동산에 영면하시어 오늘도 북녘을 바라보고 계신다.

나는 내 아버지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버지가 얼마나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한·중 수교에 관심을 가지셨는지는 병상에 누워 눈을 감고 지내시다가 수교 초기 한국에 파견 나왔다가 지금은 주한 중국대사로 있는 싱하이밍(邢海明)의 방문에 잠시 눈을 뜨셨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한·중 수교는 한국 국민의 몫이자 중국의 몫이기도 하다. 양국의 노력이 정말로 ‘민심상통(民心相通)’으로 이어지게 지도자들이 ‘음수사원(飮水思源:길을 가다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우물을 판 사람에게 고마워함)’의 마음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와 같이 일하시던 분들을 보면 더욱 아버지가 그리워지고, 중국 땅을 밟으면 한·중 수교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중 수교 30주년 수교일(8월 24일)이 다가오니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진다.
 

 





필자 주요 이력  
▷경복고. 서울대 경영학과 ▷미국 스탠퍼드대 정치학 박사 ▷조지타운대 법학박사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