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힌 순환출자 고리, 이번에는 끊는다?
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정의선 회장이 보유한 현대차그룹 상장 계열사 지분 평가액은 3조6000억원대로 추산된다. 이는 현대차그룹이 2018년 3월 지배구조 개편을 공식 언급한 때와 비교했을 때 1조1000억원가량이 증대된 결과다. 올 초 IPO를 철회해 내년을 기약한 현대엔지니어링의 보유 주식까지 합산하면 정 회장의 지분 평가액은 4조원대를 훌쩍 넘기고 있다.
만약 정 회장이 보유 지분을 모두 팔아 지배구조 최상단의 현대모비스 지분을 사들인다면 단숨에 현대모비스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더욱이 현대모비스 시가총액은 이달 기준 약 21조2300억원대를 형성하고 있다. 4년 전과 비교해 4조원대나 낮아져 매입에 유리한 조건이다.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 고리는 △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 △기아차→현대제철→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 △현대차→현대글로비스→현대모비스→현대차 △현대차→현대제철→현대모비스→현대차 등으로 이뤄졌다. 4개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려면 정 회장의 핵심계열사 지분율이 높아져야 하며, 이는 정 회장의 자금력 확보로 귀결된다.
현대차그룹은 2018년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놓았지만 시장 반발에 부딪쳐 계획을 철회했다. 이후 별다른 후속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올 초 현대글로비스 지분 10%를 사모투자펀드(PEF) 칼라일그룹에 매각해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현대차그룹은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 기준(총수 일가 지분율 30% 이상 상장사에서 20%로 변경)이 바뀌면서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만 시장에서는 칼리일그룹에 현대글로비스 지분을 잠깐 맡겨둔 ‘파킹 딜(동반 매도)’ 거래에 주목, 현대엔지니어링의 IPO와 맞물려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이라는 해석이 분분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현대엔지니어링의 IPO가 철회되면서 큰 변화는 없었다. IPO 철회는 수요가 예상보다 저조하다는 이유였다. 정 회장 자금 증대를 위한 최적의 시기가 아니라는 판단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에 비춰봤을 때 내년 현대엔지니어링과 보스턴다이내믹스의 IPO가 지배구조 개편의 분수령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정 회장은 지난해 보스턴다이내믹스 인수 당시 지분 20%를 2840억원에 사들였다. 시장에서는 보스턴다이내믹스가 IPO에 성공하면 기업 가치가 10조원에 다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정 회장의 지분 가치가 2조원대로 상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해 4월 현대오토에버, 현대엠엔소프트, 현대오트론의 3사 통합 효과가 나오고 있는 점도 주목할 요인이다. 내년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이 탄력을 받는다면 현대오토에버가 자금줄 역할에 일조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지난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가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 해소를 느긋하게 바라보는 우호적 환경도 조성됐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세제개편안 발표를 통해 일감 몰아주기 과세를 기업 단위가 아닌 사업부문별로 가능하도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재계의 경영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부분을 지속적으로 완화하고 있다.
정 회장은 올해 4월 미국 뉴욕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배구조 개편은 정답이나 모범답안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새로운 신사업이 들어가고 또 줄어드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걸 보면서 진행하는 것이 내부적으로 좋다는 판단”이라고 언급했다. 지배구조 개편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최적의 시기를 놓고 저울질하는 중이라 해석할 수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제반 사정이 정 회장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내년이 지배구조 개편을 밀어붙일 최적의 시기”라며 “우호적 환경을 놓치게 된다면 천문학적 상속세 납부와 그룹 지배력 약화라는 근본적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 회장이 현대모비스 주식을 사들이는 정공법이 가장 깔끔한 지배구조 개편안”이라며 “다만 소액주주들의 반발과 시장 환경이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우회적 방법을 택할 가능성도 높아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