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감독의 눈으로 본 박해일의 모습은 조금 특별했다. "아주 지질한 캐릭터부터 변태 성욕자, 순수한 낭만을 가진 캐릭터까지" 다양한 인물을 연기한 배우 박해일과 실제 자신이 느낀 "맑은 영혼의 소유자" 박해일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박해일이 가진 매력을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개고 캐릭터 곳곳에 녹여냈다. 그 결과 '해준'은 "상의 12개, 바지는 6개의 주머니를 가졌으며 그 안에는 티슈, 핸드크림, 립밤을 소지하고 다니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청결한 남자"로 태어났다. 고전적이고 중후한 멋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엉뚱하고 천진한 소년 같은 구석이 있는 캐릭터다.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셨기 때문에 '해준' 역시 제가 가진 기질이 반영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저 역시도 '해준'의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고요."
"감독님께서 제가 느끼는 감정, 저 다운 감정을 일부라도 활용하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참 고마웠어요. 쉽지 않은 작업일 거라 짐작했는데 응원과 지지를 받는 것 같아서 힘이 나더라고요. '내가 하는 게 맞나?' 싶다가도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힘이 생겨요. 결과물을 봤을 때 관객들은 모를 수도 있지만 저는 저다운, 미묘한 제 냄새가 느껴져서 흥미롭더라고요."
박찬욱 감독과 박해일이 처음 만난 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뒤풀이 자리였다. 그 무렵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등 굵직한 작품들이 연달아 개봉하며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기를 맞이하던 때였다. 송강호를 주축으로 만나게 된 이들은 영화 시사회 혹은 뒤풀이 등을 통해 사적으로 만나 왔고 영화계 선후배 사이로 발전하게 됐다.
"거의 20년 만에 연출가, 배우로 만나게 되었네요. 제가 출연했던 '소년, 천국에 가다'의 각본을 맡으셔서 당시에도 함께 작업하긴 했었지만, 감독과 배우로 만난 건 아니었으니까요. 오랜 시간 만나왔고 그동안 누적된 조각들을 가지고 '해준'을 만드시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박해일은 "시나리오의 첫인상과 영화의 결과물 역시 일치한다"고 말했다. 상상한 그대로였다고. 박찬욱 감독과 처음 호흡을 맞추는 만큼 과정을 예상하지 못했을 뿐, 시나리오에서 그려진 디테일들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고 설명했다.
"워낙 탄탄하게 짜여있어서 시나리오와 결과물이 크게 차이가 있지는 않았어요. 다만 공간이나 미술적인 요소는 시나리오만으로 알 수 없어서 결과물을 보고 더욱 감동받았던 때는 있죠. 감독님이 만든 공간에 캐릭터들이 존재하고 음악과 카메라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오는 감동이요. 감독님의 스타일이 명확하게 느껴지곤 했어요."
'해준'은 항상 본분에 충실하며 자긍심을 가진 형사다. 시경 사상 최연소로 경감의 직위에 오를 정도로 유능하다. 늘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청결에 신경 쓰며, 예의 바르고 친절한 성격이지만 무엇보다 범인을 잡는 것에 진심인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서래'를 만나 붕괴한다는 게 참 재밌는 지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살고 성과도 내고 예의 바르며 품위 있게 사는 사람인데 '서래'를 만나며 집중력을 잃고 무너지고 있잖아요?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말이에요. 모든 게 흔들리며 파국을 맞은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앞서 언급한 대로 '해준'은 청결하고 정갈한 차림새의 형사다. 미장센 하나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 박찬욱 감독답게 각 인물의 외형이며 미술적 요소들 역시 특별하게 쓰인다. 박 감독이 '해준'의 의상이며 디테일을 꼼꼼하게 챙긴 덕에 박해일은 '해준'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의상 피팅할 때 '형사 신분이지만 항상 정장 차림을 고수한다'는 게 콘셉트였어요.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상의 12개, 하의 6개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는 티슈며 립밤 등을 소지한다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기존 형사 캐릭터와 차별화를 주는 지점 같아서 흥미로웠어요. 의상을 처음 입어 보고 '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캐릭터겠구나' 생각했죠. 제가 형사 역할은 처음인데요. '해준을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렸구나' 싶더라고요."
'해준'은 태연하게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망자의 아내 '서래'를 만나고 그를 지켜보며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박해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대 배우 탕웨이에게 강한 호기심을 느꼈고 그의 연기에 매료되었다.
"극 중 밀폐된 공간에서 '서래'를 심문하는 장면이 있어요. 제가 참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일대일 인터뷰를 하듯이 대화하는데 탕웨이 씨의 호흡이나 눈빛 그리고 리액션이 굉장히 흥미롭더라고요. 연극을 전공했던 분이라 그런지 리액션에 굉장히 능했어요. 배우로서 긴장했던 장면이었는데 호흡을 맞추면서 어떤 짜릿함도 느꼈죠. 장면도 결과적으로 잘 나왔고요."
그는 배우 탕웨이에 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고전적인 매력과 현대적 매력이 공존하는 배우"라고 칭하며 "한국 팬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헤어질 결심'은 감정의 폭이 극단적이기 때문에 참 어려웠을 거예요. 게다가 박찬욱 감독이라는 존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연기하다니. 정말 대단한 배우죠. 동료로서도 참 멋지고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박해일은 탕웨이 외에도 동료 배우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해준'의 아내로 등장한 이정현 씨도 대단했죠? 저는 처음 '꽃잎'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저 나이에 저런 기운을 가진 배우라니!' 깜짝 놀랐죠. 정현 씨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났는데 (이정현이) 이미 박찬욱 감독님과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어서 여유롭게 저를 맞아주었어요. 부부 연기를 함께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죠."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개그우먼 김신영이 출연한다는 사실도 화제가 되었다. 김신영은 이미 영화 속 인물에 녹아들어 여느 배우보다 제 몫을 톡톡히 해주었다. 박해일은 후배 형사로 출연한 김신영에 대해 "신의 한 수"라고 말했다.
"박찬욱 감독님이 김신영 씨에 관해 툭 이야기했을 때 '정말 좋다!'고 했어요. 제가 처음 형사 역할을 맡았는데 후배로 고경표, 김신영 씨가 함께해준다면 정말 든든할 것 같았거든요. 그분들이 워낙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계시니까요. 형사는 듀오로 움직이는데 후배 형사 역할을 맡으신 분들이 잘해주신다면 저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도 그렇고요. 현장에서 만난 신영 씨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분이셨어요. 저도 내성적인 편이라 (팬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는 못했거든요. 그런데 (김신영이) 카메라가 돌면 눈빛부터 확 바뀌는 걸 보고 '역시, 대단한 배우구나' 싶었어요. 박찬욱 감독님의 신의 한 수구나."
'헤어질 결심'으로 짙은 멜로 감정을 보여준 박해일은 오는 7월 이순신 감독의 한산 해전을 다룬 영화 '한산: 용의 출현'으로 다시 관객들과 만난다.
"코로나19로 인해 제 의지와는 달리 영화들이 연달아 개봉하게 되었어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어려운 점들도 있네요. 하지만 이 또한 즐겁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두 작품 모두 여름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니 관객분들도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각각 매력이 다른 작품인데 식당에서 다른 메뉴를 맛보듯, 다양한 맛을 즐겨보시면 좋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