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장동 특혜·로비 의혹 재판에서 ‘정영학 녹음파일’이 재생됐지만 그 음질은 매우 좋지 않았다. 공판을 방청하는 사람들은 녹음파일 내용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악한 음질을 조정 없이 원본대로 틀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있다. 녹음파일 증거능력 훼손 우려 때문이다. 다만 재판부 결정으로 검찰이 음질 개선을 요청할 수 있다는 대안은 남아 있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이준철 부장판사)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배임) 등 혐의를 받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성남도개공) 본부장, 화천대유자산관리(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남욱 변호사, 정민용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 공판기일을 열고 정 회계사 녹음파일 증거조사를 진행했다. 지난달 29일에는 정 회계사에 대한 증인신문이 이뤄졌고 이달 2일부터는 녹음파일 법정 재생이 시작됐다.
녹취록 증거조사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는 녹취록에 담긴 유 전 본부장, 김씨, 남 변호사, 정 회계사 등의 대장동 사업 관련 전방위 로비 정황이었다. 그만큼 김씨가 열거하는 인사들의 목록은 이날 녹음파일 법정 재생에서 중요한 대목이었다.
그러나 음질 상태가 좋지 않아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명단에 누가 속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실제 이 과정에서 한 법조인이 김씨가 호명한 인사에 속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 사건과 무관한 사람이 자칫 이에 연루된 것으로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사건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단, 피고인 등은 정 회계사 녹취록을 문서로 푼 녹취서를 출력물이나 노트북 화면에 띄운 파일을 보며 녹음파일 내용과 대조하는 식으로 정 회계사 녹취록 증거조사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녹취서 없이 공판을 보는 언론과 방청객 등은 녹취록이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고서라도 저음질 녹음파일을 원본 재생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있다. 녹음파일 증거 자격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통상 녹음파일 증거조사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쟁점은 △녹음파일이 원본 그대로인지 여부 △녹음파일 불법 조작 가능성 여부 등을 가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장검사 출신 윤재필 법무법인 제이앤피 대표변호사는 “법정에서 녹음파일 증거조사를 진행하는 경우 녹음파일을 원본 그대로 재생하는 게 원칙”이라며 “녹음파일 조작 여부 등 불법 요소가 개입돼 있는지 확인하는 게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절차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재생되는 녹음파일 음질 개선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다. 녹음파일과 녹취서 간 ‘동일성’이 인정되는지 명확히 확인할 수 없으면 재판장 결정에 따라 검사는 대검찰청에 음질 개선 작업을 요청할 수 있다.
이에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단과 피고인 등만 녹취록 내용을 파악할 게 아니라 공개재판을 기본원칙으로 하는 공판중심주의 강화 차원에서 녹취록 음질 개선에 신경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월부터 시행된 ‘검찰 피신조서 증거능력 제한’으로 언론과 방청객 등 재판 간접 참여자들의 검증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부장판사를 지낸 여상원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는 “법정에서 재생되는 녹음파일 음질이 좋지 않아도 해당 녹음파일의 증거 자격이 충분히 증명됐다면 증거로서 사용할 수 있다”면서도 “공개재판 원칙과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시 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