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준 칼럼] 교수의 역량이 대학의 경쟁력 ··· 국가임용교수제 어떤가

2022-05-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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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대학 – 새 정부의 교육개혁은 이렇게" (3)

[안상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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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 47위' 한국 대학의 자화상> 최근 일간지에 실린 칼럼의 제목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지난해 한국의 국가 경쟁력은 64개국 중 23위, 대학 교육 경쟁력은 47위에 머물렀다. 얼마 전 영국의 글로벌 대학 평가기관인 QS가 발표한 ‘전공별 세계 대학 순위’에서도 ‘톱10’에 든 국내 대학 학과는 한 개도 없었다.” 한국 대학의 경쟁력에 대한 우려와 질타는 언론의 단골 메뉴다. 대개 세계 대학평가에서 상위권에 드는 대학이 적고, 갈수록 평가 결과가 좋지 않다는 요지를 담고 있다.

경쟁력 하락의 핵심 원인은 재정 지원의 부족이다. 대학이 명실상부한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고, 그 결과물로 탁월한 연구 성과와 우수한 핵심 인재를 배출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안정적인 재정 지원이다. 교육 및 연구 환경의 개선, 교수 1인당 학생 수의 합리적 조정, 우수 교원의 유치 등 교육의 양적·질적 향상을 위한 알파와 오메가는 곧 재정이다. 그런데 지난 10년 이상 우리의 교육 당국은 대학 재정 지원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국가의 재정 지원은 최소주의에 머물렀고, 대학의 등록금 수입은 동결되었다. 최근 본격적인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대학 정원 미달 사태는 대학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그러자 대선 국면에서 총장들은 대학에 대한 공적 투자를 안정적으로 확대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국립대도 예외는 아니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간다. 2021년 기준 우리나라 대학생 한 명에게 투여되는 공교육비(1만1290파운드)는 OECD 회원국 평균치(1만7065파운드)의 60%를 조금 상회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대학생 1인당 공교육비가 초·중등 학생의 1인당 공교육비(초등 1만2535파운드, 중등 1만4978파운드)보다 낮다. 초·중등 학생의 공교육비가 OECD 회원국 평균치를 상회하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무교육에는 선진국 못지않은 재원을 투자하지만 고등교육 투자에는 매우 인색한 우리 사회의 왜곡된 합의가 확인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해답을 찾으려면 고등교육의 공공성이 매우 낮은 특수한 대한민국 대학 체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대학생의 85%가 사립대학에 다니고, 그 수는 전체 대학생 수의 78%를 차지(?)한다. 사립대학의 교육비는 거의 전적으로 등록금에 의존한다. 유수한 미국 사립대학처럼 연간 수만 달러에 이르지는 않지만 소득과 물가를 반영하면 사립대학 등록금은 우리 국민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이미 오래전에 공공의 적이 되었다.

단순히 액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 국민에게 사립대학은 ‘비리’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포털사이트에서 사학을 치면 제일 먼저 연관 검색어로 뜨는 게 사학 비리입니다. 사학 비리는 확실하게 끄집어내서 수술하고, 처벌할 건 처벌해야 하지만···.” 최근 김도연 울산대학교 이사장의 뼈아픈 지적이다. 우리는 비싼 등록금을 내고 사립대학에 자녀를 보내곤 있지만, 한편으론 대학 교육에 대한 불신이 여전하다. 사립대학에 대한 공적 재원의 투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강한 저항에 부딪힌다. 사립대학의 비중과 사립대학의 비리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한국 대학의 발전은 요원하다.

현행 법상 국가가 사립대학에 공적 재원을 투자할 명분은 없다. 국가의 직접적인 투자는 국공립대학의 설립과 운영에 한정된다. 그런데 국공립대학의 절대 다수가 지방에 위치하고 현실적으로 대학 서열이 낮아서 국공립대학에 대한 투자 확대가 전체 대학과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우리의 고등교육을 위한 공적 재원 투자 비율은 낮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재정 지원 사업이었다. 국공립대와 사립대, 수도권과 지방을 모두 섞어 획일적인 잣대로 줄을 세우고 재정을 나누어주는 방식이다. 일견 합리적인 정책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대학을 망쳐 놓았다. 처음부터 수도권과 지방 간 기울어진 지형에서 경쟁을 시키면 지방 대학이 고사한다는 지적과 경고가 있었다. 실제로 지난 10여 년 동안 정부는 평가 결과에 따라 정원을 감축하였는데, 십중팔구는 지방 대학이 직격탄을 맞았다.

또한 비중 면에서나 지리적인 면에서 취약한 국립대학이 대학평가의 유탄을 맞아 휘청거리게 되었다. 국립대학에 투여되는 재정 비중은 과거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결국 대학평가는 국립대학의 설립 목적과 특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병을 고치려다가 되레 몸을 망쳐 놓은 형국으로, 지방 사립대와 국립대가 모두 골병이 드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면 재정 지원만 해결되면 대학의 경쟁력은 향상되는가? 아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선결 과제는 연구와 교육 여건의 향상이며, 이는 재정 지원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그 첫 번째 과제로 교수 1인당 학생 수를 적정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현재 '대학설립·운영규정'은 계열별 교수 1인당 학생 수를 인문·사회 25명, 자연과학·공학·예체능 20명, 의학 8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 '교육기본통계'(2022년 1월 발표)에 따르면 2021년 우리나라 일반 대학의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21.3명이다. 다른 교육부 통계는 2020년 교수 1인당 학생 수를 국공립대학 평균 25.6명, 사립대 평균 27.5명으로 제시한다. 미국 대학은 이 수치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4년제 일반 대학 평균치는 14명, 사립대학 평균치는 12명이다. 이 수치를 내리지 않고 대학 경쟁력을 거론하는 것은 백년하청과 다름없다. 이와 관련하여 2016년 국립대교수연합회가 주도한 '국립대학법안'이 국립대 교원 확보 기준을 인문·사회 20명, 자연과학·공학·예술 15명, 의학 5명으로 조정하자는 제안은 매우 획기적이었다.

이런 여건이 갖추어질 때 각 전공 분야에서 경쟁력 있는 학생을 키우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진다. 예전에 필자의 '역사학개론' 수업을 들은 한 학생이 떠올랐다. 내성적인 성향인 그 학생은 수업시간에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보였다. 서술형으로 답안을 작성해야 하는 기말고사에서 그 학생은 문장이 아닌 8컷 만화로 답안을 제출했다. 개인적으로 학생의 답답하고 애처로운 심정을 헤아리는 한편 그에게 글쓰기를 지도할 수 없었던 환경을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학생의 실력을 탓하기 전에 학생들의 글쓰기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교육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문학 교수로서 글쓰기 능력은 대학생이 졸업 전에 갖추어야 하는 기본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여러 대학에서 글쓰기 능력 향상을 위한 기구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한때 ‘글쓰기 클리닉’ 운영을 주도했지만 아직 보편적인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객원교수로 컬럼비아대학에 체류할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대학의 기관은 철학과 건물 1층에 있던 ‘글쓰기 센터(Writing Centre)’였다. 철학과가 독자적으로 건물 하나를 모두 사용하는 것도 놀라웠고 그 입구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출입객을 마중하는 모습도 이채로웠지만,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이 센터를 이용하여 자신의 글을 다듬는 과정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컬럼비아대학의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6명이다.

“그래서 대학이 먼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가 깜짝 놀랄 일을 대학이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교수 정년 보장을 폐지하는 겁니다.” 김도연 이사장의 제안이다. 오랜 교직 경력과 교육부 장관 역임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그의 제안은 자못 파격적이다. 정말 교수의 정년 보장이 없어지면 대학의 경쟁력이 좋아질까? 사립대 이사장의 입장일 뿐일까? 사실 착잡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대학이 재정 지원과 여건만 탓하지 말고 과감하게 혁신에 나서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라는 경험칙이다. 대학이 먼저 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교수가 있기에 교수에게 파격적인 변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학교수의 여건이 예전보다 팍팍해진 것도 분명하다. 그래도 여전히 외부의 시선은 매우 냉정하고 심지어 적대적이다. 이는 인사청문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교수의 심각한 도덕적 타락에 기인하기도 한다. “오로지 더 높은 학벌과 특권을 누릴 목적으로 공부하고 전문성을 기르는 이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이 거기에 있다. 공공선, 도덕, 신뢰를 고민하는 지식인과 전문가는 ‘멸종위기종’이 되어버렸다. 사회적 책임을 내던지고 가장 먼저 배를 탈출할 티켓으로 전문가의 권위와 특권이 사용된다면, 그건 사회의 총체적 실패다.” 청년연구자 최성용의 지적은 참으로 신랄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수는 젊을 때는 연구해서 가르치고, 50대에는 아는 만큼 가르치고, 60대에는 생각나는 대로 가르친다.” 강의에 관한 대학가의 오래된 농담은 나의 현실을 돌아보는 거울이 되었고,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내게 가르침의 정도를 보여준 독일 교수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강생 누구나 이해할 때까지 성실하게 반복하여 설명하고, 언제든 자기 의견을 기탄없이 얘기하도록 분위기를 끌어가는 노력에 매우 감동하며 수업을 들었던 경험이 있다.

대학은 사회 진화의 거울이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인재를 배출하는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늘 답해야 한다. 대학은 산업구조의 변동과 사회 발전을 주도하는 고급 인력 양성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가? 인문학자로서 교수는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 산업화·민주화·정보화를 넘어 사회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 새로움의 실체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그 사회 속에서 인문학 교수로서 또는 생명과학 교수로서 자기 역할을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인이 얼마 전 내게 전한 사연이다. “서울대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10년 넘게 어느 사립대 교양학부에서 연봉 3500만원을 받고 근무하는 분을 만났어요.” 우리의 고등교육 인력시장의 심각한 왜곡 현상, 비정규직 교수의 열악한 사정은 우리 미래를 우울하게 한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지금은 세대교체의 적기다. 1980년대 졸업정원제 도입으로 엄청나게 늘어난 교원들이 퇴장하는 마지막 시기다. 장강의 뒷물을 막을 수 없듯이,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갈 참신한 인재가 필요하다. 국가는 40년 전에 대학 교육의 보편화(대중화)를 위하여 과감한 정책을 펼쳤듯이,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아 새로운 의제를 제시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할 인재를 대학에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은 도태된다. 지금 대한민국 대학이 바로 그런 운명을 맞고 있다.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지 않으면 대학의 미래는 없다.

학과 구조로 짜인 대학의 특성상 새로운 전공이 생겨나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또한 필요하지만 희귀한 분야의 연구자 양성은 더욱 어렵다. 대학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어려운 분야에서 국가의 개입으로 대학의 변모를 강제할 필요가 있다. 차제에 ‘국가임용교수제’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대학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쟁력 제고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판단한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 학위 취득 △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 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해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2022) 공저 △교수신문 논설위원,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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