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여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붉은색 꽃 한 송이를 들고 서 있었다. 그는 당시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 이론물리학자였고, 대학에서 가까운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그는 흰색 꽃을 들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붉은색을 선택했다. 기차에는 그가 무슨 색 꽃을 들고 있나 해서 갈증이 난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독일 베를린대학의 두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와 발터 네른스트다.
막스 플랑크는 베를린대학 물리학과를 이끌던 독일 물리학계 리더였다. 그는 나중에 양자역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며, 오늘날 독일 최고의 연구기관들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막스플랑크연구소가 그것이다. 플랑크가 베를린에서 취리히로 기차를 타고 갔을 때 동행한 발터 네른스트 역시 저명한 과학자로 1930년 노벨화학상을 받는다.
베를린은 신흥 제국의 수도였고, 인재 영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막스 플랑크가 베를린에서 남행 열차를 타고 취리히까지 간 건 독일어권 물리학계의 새로운 별 아인슈타인을 스카우트하기 위해서다. 막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을 영입하기 위해 선물 보따리를 준비했다. 독일제국 과학계 중심인 프로이센 아카데미 최연소 회원 선임과 베를린대학 교수 자리가 패키지에 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막스플랑크연구소 전신) 산하에 만들어질 이론물리학 연구소 소장직까지 준비했다. 거액 연봉은 물론이었다. 한 마디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베를린에 도착한 건 다음해인 1914년 4월 초다. 이때만 해도 그는 물리학자 커뮤니티에서만 유명했다. 막스 플랑크는 독일 교육부에 보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이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고 말했지만 일반인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진 건 1919년이고, 그를 그 자리로 끌어올린 건 독일이 아니라 영국이었다. 영국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1882~1944)의 기여가 컸다. 아서 에딩턴은 20세기 초 천문학 분야에서 별이었다. 영국 천문학회 회장으로 일했다. 에딩턴은 과학사에서 세 가지 대목에서 눈에 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 그 어려운 걸 이해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는 전설이다. 비범한 머리와 오만함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둘째는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1910~1995, 198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라는 인도 천체물리학자와 관련된 일화다. 식민지 국가 인도에서 영국으로 온 뛰어난 젊은 과학자를 독설로 망신 줬다는 ‘비호감’ 얼굴로 에딩턴은 기억된다. 셋째는 태양과 같은 별의 내부 구조를 알아낸, 천체물리학에 기여한 부분이다. 태양의 물리학을 태양에 가보지도 않고 땅에 앉아서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에딩턴은 지구에 앉아서 태양에 가보지도 않고 그걸 알아냈다.
여기에서는 에딩턴의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과 관련된 대목만을 살펴본다. 에딩턴은 아인슈타인을 국제적인 물리 아이돌로 만든 주인공이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세계 물리학계에 천지개벽처럼 꽝 하고 등장했으나 그가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런던타임스 1면에 등장한 건 1919년이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한 건 1915년 11월 25일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을 내놓을 때는 스위스 취리히의 특허청 공무원이었으나 10년이 지난 시점에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을 당시는 베를린대학 물리학과 교수였다. 특수상대성이론을 짧은 기간에 번개와 같은 영감을 갖고 만든 것과는 달리 일반상대성이론은 10년에 걸쳐 대단히 힘들게 구축했다. “한 영웅의 기나긴 여정이며 참된 과학적 서사시의 실례”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반상대성이론이 나온 1915년이 어떤 해였는지를 보자. 한 해 전인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아인슈타인이 베를린의 가장 넓은 길인 운터 덴 린덴에 자리 잡은 프러시아 아카데미에서 거의 매주 일반상대성이론 완성을 향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을 때는 독일과 영국·프랑스·벨기에 간에 치열한 이프르 전투가 서부전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프르 2차 전투에서 독일은 독가스를 살포했다.
뉴턴의 나라이자 에딩턴의 나라인 영국은 독일과 전쟁 중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 과학자들도 평소의 국제주의자와 같은 면모를 뒤로하고 대부분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각국은 적국 과학자를 구금하거나 행동의 자유를 구속했고, 자국 발행 과학학술지가 적국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논문이 실린 독일 물리학 학술지 ‘물리 연보(아날렌 데어 피지크 Annalen der Physik)'도 적국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에딩턴에게 이때 일반상대성이론 논문을 전해준 건 네덜란드 물리학자 빌렘 드 지터(레이덴대학 천문대 대장. 드 지터는 오늘날 끈이론 연구자들이 양자중력 연구 때 사용하는 블랙홀 모델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다. 빌렘 드 지터는 아인슈타인 논문을 직접 건네지는 않고, 자신이 직접 요약한 내용을 편지와 함께 보냈다. 편지를 열어본 건 영국 왕립천문학회 간사였던 아서 에딩턴이었다.
빌렘 드 지터는 대륙에서 탄생한 상대성이론을 바다 건너 영국에 알리고자 했고, 빌렘 드 지터는 그걸 받아볼 사람으로 에딩턴을 잘 고른 것이었다. “전쟁 중인 시점에는 영국 과학자 어느 누구도 독일인 이론에 대해 생각조차 해 볼 의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인 에딩턴은 그럴 의향이 있었다.”(매슈 스탠리의 책 <아인슈타인의 전쟁>)
에딩턴은 드 지터에게 보낸 답장에 이렇게 썼다. “여태까지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연구에 대해 소문만 어렴풋이 듣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그의 논문에 관해 상세히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드 지터가 일반상대성이론을 영국에 소개하기 위해 논문 요약본을 영국 왕립천문학회 월보(Monthly Notices of the Royal Astronomical Society)에 발표했고, 에딩턴 자신은 1916년 9월 뉴캐슬에서 열리는 영국 과학진흥협회 연례회의에서 상대성이론에 대해 발표했다. 에딩턴은 이후 영국 천문학계 지도자인 프랑크 다이슨을 설득해 일반상대성이론이 옳은지를 검증하기 위한 해외 원정 관측 실험을 제안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서부 해안의 프린시페 섬과 브라질 소브랄로 원정대를 꾸려 보내는 데 성공했다. 에딩턴 자신은 프린시페 원정대를 이끌었다. 이때가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19년 5월이었다.
원정대가 프린시페 섬에 가서 본 건 개기일식 때만 볼 수 있는, 중력에 의해 별빛이 휘는 현상이다. 개기일식 때 달은 해를 가린다. 그 장면을 영국 원정대는 촬영했다. 해 뒤에는 히아데스성단이 있었다. 해라는 천체가 없으면 히아데스성단에서 출발한 빛은 곧장 지구를 향해 날아온다. 그러나 해가 중간에 있으면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라 해 주변의 공간이 휜다. 아인슈타인이 예측한 공간의 휨 정도만큼 히아데스성단에서 온 빛이 휘어들어 오는지를 검증하는 게 원정대 목표다. 촬영은 성공이었다. 분석 결과 아인슈타인이 옳았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실험으로 정확함이 확인됐다.
그런데 영국으로서는 묘한 게 있었다. 영국의 물리학 신은 아이작 뉴턴이다. 아인슈타인이 내놓은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 모두 뉴턴 이론을 수정하거나 완성도를 높인 내용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뉴턴의 절대공간,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라고 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뉴턴의 중력이론이 설명하지 못하던 수성의 근일점 궤도라는 문제를 설명하는 등 뉴턴 이론보다 훨씬 많은 물리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했다. 에딩턴의 실험 결과 영국이 숭배하던 뉴턴은 독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에게 물리학의 신 자리를 내줘야 했다.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뉴턴의 위대함을 이런 식으로 찬미한 바 있다. “자연과 자연법칙들이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신이 말했다. 뉴턴이 있으라!/ 그러자 사방이 밝아졌다.”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이 옳다는 게 밝혀지고 뉴턴 물리학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을 때 영국 시인 J C 스콰이어는 포프 작품 뒤에 이렇게 붙였다.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악마가 외치길, '워!, 아인슈타인이 있으라!’/그러자 예전 상태로 돌아갔다.“(<아인슈타인의 전쟁>에서 인용)
에딩턴과 영국 과학계가 당시에 한 일은 과학이 민족주의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학은 국경을 뛰어넘는 소통의 언어가 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에딩턴 원정대의 결과가 나오고 3주 뒤에 런던 더타임스 신문에 글을 보내 “적국에서 완성되고 발표된 이론을 시험한 것은 영국 과학계의 고귀하고 자랑스러운 전통과 일치한다”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친구를 사귀고 우정을 쌓으려면 같이 협력할 수 있는 걸 찾는 법이다. 싸울 거리를 찾지 않고. 한국과 일본 간 껄끄러운 정서도 과학이라는 소통의 언어가 잘 작동하면 완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걸 하겠다는 과학자를 한국 사회가 지원했으면 한다.
미니 박스(box)
영국 사회는 사실 2차세계대전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걸로 보인다. 영국에 가서 근무한 독일 사람들이 그걸 예민하게 느끼는 듯하다. 런던 주재 독일 대사들은 영국의 역사교육이 1945년에 멈춰 있다는 식으로 비판한다. 여전히 나치 시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 이후 독일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런던 특파원은 오늘날 영국인을 규정하는 것 중 하나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저먼 지니어스> 책) 이 말이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다. 미국과 영국에서 나오는 대중 문화 상품을 보면 1·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게 아직도 많다. 대중의 집단 기억은 쉽게 변하지 않는 듯하다. 그럴수록 과학은 중요하다. 과학자야말로 국제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최준석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 ▷뉴델리 특파원 ▷카이로특파원 ▷주간조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