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국가들이 계속해서 사우디에 증산 요구를 하고 있지만 사우디는 요지부동이다. 지난 16일(현지시간)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사우디를 방문해 증산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로이터는 밝혔다. 존슨 총리는 사우디에서 1시간 45분 동안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나고 난 뒤 기자들로부터 증산 합의를 했냐는 질문을 받고는 "사우디와 얘기해봐라"라며 "사우디도 국제 석유·가스 시장 안정을 보장할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본다"고만 답했다. 사우디 정부 발표문에도 증산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로이터는 미국과의 경색된 관계 때문에 사우디가 서방국들의 증산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사우디 내 실세로 꼽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역시 바이든 대통령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까슈끄지 암살 사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분적으로 스스로를 변호하는 한편, 더이상 암살단이 발견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3일 미국 시사잡지 애틀랜틱과의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이어 왕세자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내 최선이 충분하지 않다면, 도덕적인 외교 정책을 펴는 것에 대한 대가는 바이든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한 "현재 세계의 잠재력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 이를 버리고자 한다면 동부의 사람들은 매우 행복할 것"이라며 미국이 사우디에 대해 계속해서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면 대신 중국과의 관계를 다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4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초청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대신 중국에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WSJ·블룸버그 등 외신은 사우디가 대중 수출분에 대한 위안화 결제 허용은 물론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를 통해 일명 '페트로 위안'으로 불리는 위안화 표시 원유 선물거래 허용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빈 살만 왕세자와 바이든 대통령 간 감정의 골이 생각보다 깊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블룸버그는 21일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 3명을 인용해 빈 살만 왕세자와 바이든 대통령 간 통화를 주선하도록 시도했지만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에밀리 혼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백악관이 왕세자와의 통화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대신 백악관은 살만 빈 압둘 아지즈 사우디 국왕과 지난 2월 에너지 협력과 기후, 안보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덧붙였다. 사우디 국왕은 현재 노쇠해 사실상 실권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시절 미국과 매우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위인 제라드 쿠슈너 전 백악관 선임보좌관은 빈 살만 왕세자와 여러 차례 회동하며 깊은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코로나 이후 수요가 급증하며 이미 치솟고 있던 유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산 원유를 시장에서 배제하겠다고 나서며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해 물가를 낮춰야 하는 바이든 대통령에게도 사우디의 협력은 절실하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왕세자가 연로한 국왕만을 중요시한 바이든 대통령의 결정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여기고 있다며, 왕세자가 바이든 대통령을 용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