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 신용장 개설 거부...SWIFT 발동시 기업 피해 확대
2일 금융권과 무역협회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들과 러시아 간 금융 거래는 이번주 들어 사실상 차단된 상황이다. 국민·신한·우리 등 국내 주요 은행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튿날부터 선제 대응을 위해 신용장(L/C) 개설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석유 등 러시아산 원자재 수입을 원하는 에너지 기업들은 사실상 대금 결제 창구가 막혀 거래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실제로 무역협회 우크라이나 사태 긴급대책반이 지난 1일 오전까지 긴급 애로사항을 접수한 결과 대금 결제 중단 사례가 가장 많았다. 이날까지 총 119개 기업(160건)의 애로 상황이 접수됐는데 대금 결제가 전체의 58.7%(94건)에 달했다. 그다음은 물류 31.9%(51건), 정보 부족 6.9%(11건) 순이었다. 러시아의 주문을 받아 기계장비를 생산하는 한 업체는 “일부 선수금을 받고 생산을 완료한 상황인데 자금 회수에 차질이 생격 자금운영에 애로가 발생했다”고 토로했다.
◆ FDPR 배제...반도체, 자동차 업체 수출 직격탄
이런 가운데 미국이 강력한 대(對)러시아 수출통제 조치의 하나로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실시키로 하면서 우리나라 기업들의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FDPR 조치 계획을 발표하면서 반도체를 비롯해 컴퓨터,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기업의 러시아 수출규제를 예고했다. 이에 따라 반도체·정보통신·센서·레이저·해양·항공우주 등 57개 품목·기술 분야에서 미국 기술이나 소프트웨어(SW), 장비를 활용한 제품을 러시아에 수출하려면 반드시 미국 상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문제는 유럽연합(EU)과 일본, 호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미국 동맹국 대다수가 FDPR 예외 적용을 받지만, 우리나라는 면제 국가에서 빠졌다. 이로 인해 반도체와 조선, 자동차 등을 수출하는 국내 기업들은 일일이 허가 품목 여부를 확인받아야 해 고통이 가중될 전망이다.
특히 산업계는 모든 전자기기의 핵심부품인 반도체가 FDPR에 포함됐다는 점을 우려한다. 한국 반도체의 대러 수출 비중(2021년 기준 0.06%)은 크지 않지만 현지에 있는 우리 기업의 생산 제품에 쓰이는 관련 부품들까지 고려한다면 파급효과는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다. 현대자동차가 러시아 공장에서 생산하는 완성차는 수출 실적으로 잡히지 않지만 이번 제재로 반도체 칩 등 자동차 부품을 공급받지 못해 생산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뒷북 대응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정부가 대러 전략물자 수출 차단, SWIFT 결제망 배제 등 미국의 대러 제재에 뒤늦게 동참해 실익을 놓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FDPR 예외 적용을 받으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3일 미국으로 가, 수습에 나선 점도 마뜩잖은 분위기다. 러시아 수출 전문인 A기업 관계자는 “우리 회사 제품이 FDPR 적용이 되는지 몰라서 속만 태우고 있다”며 “정부가 선제 대응했다면 불확실성을 신속하게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불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