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관광재단(대표이사 길기연)이 추천한 종로의 길목들은 과거와 현재가 한 데 뒤섞여 조화를 이룬다. 조선시대 순라군들이 직접 들려주는 ‘순라군 해설프로그램’부터 전통 한옥과 일본 가옥이 절충된 한옥까지······. 가을의 끝자락, 역사 짙은 종로의 곳곳을 천천히 거닐며 사색을 즐기려 한다.
한양을 돌며 순찰하는 경찰이 진행하는 ‘순라길, 순라군 해설 프로그램’
순라군은 야간에 화재와 도둑을 막기 위해 3~5명씩 조를 편성하여 한양을 돌며 순찰하는 경찰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종 시대, 거리에 도둑이 많아 백성들을 지키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태종의 아들인 세종대왕은 황희 정승에게 한양에 도둑이 많으니 경수소 훈련을 강화하라 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경수소는 지금으로 생각하면 경찰 지구대나 파출소를 떠올리면 된다. 세조 시대에 이르면 한양에 106개의 경수소를 설치했다고 하니 꽤 큰 규모로 순라군이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돈화문 앞길은 임금이 백성을 살피던 ‘어도’로 이 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전이 들어섰다. 북촌에는 양반이, 서촌에는 중인들이 많이 살았다면 돈화문은 앞쪽에는 궁이나 종묘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악을 연주하던 음악가들이 많이 살았다. 그 명맥이 이어져 아직도 국악학원, 악기사, 한복집 등이 운집해있다.
돈화문로를 쭉 따라가다 보면 우측에는 익선동이, 좌측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인 단성사가 나타난다. 단성사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종로3가역 앞에 있는 금은방 거리를 통해 종묘로 간다. 종묘 서쪽으로 이어지는 담장을 따라 난 서순라길을 걸어 대각사로 향한다.
대각사는 1931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재산 몰수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해온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을 때 환영회가 마련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대각사를 둘러본 후 서순라길을 따라 돈화문 앞에 있던 국악당으로 돌아오면 해설 프로그램은 끝이 난다.
잔술집과 카페가 즐비한 종로의 숨은 명소 ‘종로3가역 – 서순라길’
최근 종묘 서쪽 담장 따라 걷는 서순라길이 입소문을 내고 있다. 지도상으로는 종묘가 궁궐 오른쪽에 위치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서 왕이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을 중심으로 좌묘우사(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를 두었기에 서순라길이라 하기도 하고, 직관적으로 종묘 서쪽에 있는 길이라 서순라길이라고도 한다. 낡고 오래된 구도심 골목으로 보이는 초입이지만, 발걸음을 좀 더 옮겨 서순라길부터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역에서 서순라길 쪽으로 걷다 보면 어르신들이 주로 찾는 노포인 잔술집이 나타난다. 담장 위로는 종묘를 감싼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공원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더하고, 거리에는 특색 있는 카페나 음식점, 눈길을 사로잡는 공방들이 이어진다.
주변 건물은 종묘 담장을 넘보지 못하도록 높이가 2층으로 제한되어 있기에 담벼락과 조화로운 경관을 이루어 아늑함마저 든다. 아직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라 서울의 다른 명소에 비해 비교적 거리도 한산하다. 마음에 드는 카페나 음식점을 찾아 단골을 만들어보는 것이 서순라길을 찾는 매력을 더하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로 추천할만한 곳은 한옥 주점인 '술라'다. 새롭게 지은 한옥의 외관도 돋보이고 서순라길에서 술을 판다는 의미에서 ‘술라’라고 이름을 지었다. 주로 국내에서 생산된 다양한 수제 맥주를 팔고 칵테일이나 하이볼, 간단히 안주로 곁들일 수 있는 음식을 판매한다. 2층 창가 자리에 앉으면 종묘의 담벼락과 마주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추천하는 곳은 카페 사사이다. 전통과 현대를 재해석한 디저트와 음료를 선보이는 한옥 카페다. 무알콜 막걸리와 구운 가래떡에 조청과 인절미 가루를 얹어 소반에 담겨 나오는 한상차림 메뉴가 이색적이다. 내부는 창문에 창살을 덧대 햇빛이 스며드는 분위기가 사뭇 따스하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한국 최초 공립 공예박물관 ‘서울공예박물관’
2만여 점의 공예품이 전시된 한국 최초의 공립 공예박물관이 2021년 7월, 종로구 안국동에 들어섰다. 옛 풍문여고 건물 5개 동을 리모델링하여 건축한 박물관은 공예의 역사, 현대적 공예, 지역별 공예품, 어린이공예, 공예 도서관 등으로 조성된 공간을 통해 공예의 전통과 현대, 예술과 생활을 연결한다.
박물관이 들어선 장소는 과거 세종대왕의 아들인 영응대군의 집터로 알려져 있다. 조선 말에는 마지막 왕인 순종의 혼례를 위해 이곳에 안동별궁을 만들었다. 별궁은 왕실의 가례 준비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다 이후 풍문여고가 들어섰고 70여 년간 학교로 사용되다 현재는 공예박물관으로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 되었다.
상설 전시는 장인의 기술과 전통 공예품에 관한 이야기부터 조선 말 근대화 속에서 하나의 산업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예 역사 전시’와 다양한 자수와 보자기 작품을 소개하는 ‘직물 공예 전시’로 진행된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왕실에 쓰인 화려한 공예품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왕비나 세자를 책봉하거나 특별한 시호를 올릴 때 그와 관련된 사실을 기록한 어책(御冊), 소뿔을 얇게 저며 각자를 만들고 뒷면에 그림을 그린 후 나무로 만든 표면에 붙여 장식한 화각함은 당대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작품들이다. 뒤이어 사대부들의 공예품, 근대화 과정에서 산업으로 변화하는 공예품들까지 다양한 전시물이 이어진다.
흥선대원군의 마음을 사로잡은 ‘서울미술관 석파정’
석파정은 조선 후기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홍근의 별장이었다. 삼계동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 아래에 집이 있어 삼계동정사라 불렸는데, 고종이 즉위한 후 이곳의 풍경과 주변 정취에 마음을 빼앗긴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별장으로 삼으면서 그의 호인 석파(石坡)를 따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석파정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서울미술관 통합 입장권을 구매해야 한다. 1층과 2층에서 전시 관람을 한 후 3층을 통해 야외로 나가면 석파정이 나타난다.
석파정은 본래 8채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 사랑채, 별채, 석파정만 남아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인 별채에 걸터앉으면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계곡에 안긴 듯 자리한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종 황제가 석파정을 찾았을 당시 묵었던 방도 별채에 있다.
별채에서 내려와 짧은 숲길을 따라가면 계곡에 들어앉은 정자인 석파정이 나타난다.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가을에 석파정을 찾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포토존이다. 우리의 전통 정자와 달리 마루 대신 화강암을 쌓았고, 기와 대신 지붕에 동판을 덮어 청나라풍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전통 한옥과 일본 가옥이 절충된 한옥 ‘백인제가옥과 고희동미술관’
종로구에는 북촌 일대에 있는 전통 고택부터 서촌과 익선동의 근대 한옥까지 다양한 한옥이 있다. 그중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에서 당시의 건축상을 반영하여 전통 한옥과 일본 가옥이 절충된 구조를 지닌 근대 한옥 두 곳을 소개한다.
첫 번째로 북촌에 있는 백인제 가옥이다. 백인제 가옥은 우리의 전통 고택과는 사뭇 다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본래 한옥은 남자가 생활하는 사랑채와 여자가 생활하는 안채가 분리되어 있는데, 백인제 가옥은 두 건물이 공간적으로는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일본식 복도나 다다미방, 유리 창문, 붉은 벽돌, 2층 구조 등 전통 한옥과는 대비되는 특징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가옥에는 100년의 세월이 녹아있다. 본래 이 집은 1913년 한성은행의 전무였던 한상룡이 지었다.
친일 활동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그는 북촌에 가장 위세 있는 한옥을 지었고 사랑채 앞뜰에서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를 초대해 연회를 자주 열었다. 이후 조선중앙일보를 발간했던 민족 언론인 최선익에게 집이 넘어갔다가 1944년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였던 백인제가 가옥을 소유하게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돌아오지 못한 백인제 선생의 부인인 최경진 여사가 원형을 보존하며 가옥을 지켜왔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집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크게 고치지 않았다고 하니 애틋함이 느껴진다. 백인제 가옥은 영화 암살에서 강인국(이경영 역)의 집 촬영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해설 관람 프로그램을 통해 해설사와 함께 가옥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해설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두 번째 추천 한옥은 원서동 고희동 미술관이다.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는데 백인제 가옥과 마찬가지로 복도를 두어 오가기 편하게 만들었고, 사랑방 옆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실을 따로 둔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는 안채, 사랑채, 문간채, 공간채로 구성되었으나 여러 차례의 변형으로 훼손되었다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후 안채와 사랑채가 보수되었다.
현재는 ‘ㄷ’자형 사랑채가 안채를 감싸고 있는 형태로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길고 좁은 복도를 통해 방과 방을 잇고, 유리문 너머로는 소박한 마당이 있어 아늑하다. 이곳은 2012년부터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