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이 여행 빗장을 서서히 풀자 부리나케 해외여행을 계획한 것도 어쩌면 여행의 소중함을 다시 마주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목적지는 '체코'로 정했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였기에 두근대는 마음 주체할 길이 없었다. 오랫동안 마주하지 못했던 연인을 만나러 갈 때도 이토록 마음이 달뜨진 않았으리라. 코로나19 확산 전후 여행 사정은 많이 까다로워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떠날 수 있게 됐다는 '설렘'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사실 이곳에서 이렇게 많은 양의 맥주를 마시게 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더는 살이 차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맥주를 멀리하리라 굳게 마음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숙소에 짐을 푸는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그저 오랜만에 오랜 시간 비행을 한 데 대해 나름의 '보상'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식사를 주문하면서 "맥주 한 잔을 달라"고 힘차게 외쳤다.
맥주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식도를 타고 흘러 들어가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왜 체코를 여행하면 맥주를 꼭 맛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흔히 맥주 하면 독일을 떠올린다. 아일랜드를 먼저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테고, 네덜란드나 벨기에라 대답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세계 맥주 연간 소비량 1위 국가는 독일이 아닌 체코였다. 의외의 결과다. 2021년 각국 맥주 소비량 통계를 살펴보니, 프라하에 거주하는 체코인은 468병(1병 330㎖ 기준)을 소비했다. 2위를 차지한 스페인 마드리드(417병), 3위 독일 베를린(411병)을 크게 따돌린 소비량이라는 점이 가히 놀랍다.
체코 맥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필스너 우르켈'이다. 1842년부터 생산한 필스너 우르켈은 쌉쌀한 홉 맛이 풍부하게 감돌면서도 깔끔하게 떨어지는 뒷맛까지···. 청량감 넘치는 맥주 한 잔에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혹자는 이 맥주를 맛보는 것이 체코 여행을 꿈꾸는 이유라고 이야기한다. 프라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원도시 '플젠'에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도 가보겠노라 다짐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체코에는 필스너 우르켈 이외에도 버드와이저로 알려진 부드바이서 부드바르(Budweiser Budvar), 흑맥주 코젤(Kozel), 감브리누스(Gambrinus), 스타로프라멘(Staropramen), 풍성한 거품 덕에 톡 쏘는 청량감보다는 다소 부드러운 맛을 품은 벨벳(Velvet) 등 다양한 맥주를 판매한다.
체코 맥주를 맛볼 때는 콜레뇨(체코식 족발 요리)나 나초, 버거를 곁들이는 것이 좋다. 체코 맥주와 최고의 궁합을 자랑하는 음식이다.
중세도시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체코 남부의 체스키크룸로프(Český Krumlov)다. 블타바강이 감싸고 도는 작고 아담한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의 길은 무척 인상적인 풍광이다. 중세마을의 속살은 살을 파고드는 추위 속에서도 포근함을 선물했다.
남부 보헤미안 지역의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품은 이곳을 바라보는 순간, 조용했던 가슴이 쿵쾅거린다.
중세마을은 300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덕에 이곳을 걷는 내내 타임머신을 타고 18세기 유럽 마을로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 든다.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체스키크룸로프 역사지구에는 고딕, 르네상스 건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유적, 그리고 상점이 마을의 절반을 차지한다.
거주 인구 1만5000여명에 불과한 아담한 마을, 체스키크룸로프를 둘러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걸어서 반나절이면 눈과 마음에 오롯이 담을 수 있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는 마을의 관문 '부데요비츠카 문(Budějovická Brána)'을 지나면 옛 영주들을 모시던 하인들이 거주했던 라트란(Latrán) 거리가 이어진다. 오렌지색 지붕과 흰 담벼락이 마치 동화 속 골목을 산책하는 착각을 안긴다.
마을 어느 곳을 서성거리든 체스키크룸로프의 상징이 눈에 담긴다. 우뚝 솟은 체스키크룸로프성이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프라하성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 성은 르네상스 양식의 방, 바로크 양식의 홀 등 귀족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3세기 크룸로프 영주가 성을 건축했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당시 유행했던 양식이 하나하나 덧씌워졌단다.
각각 다른 양식의 정원과 건축물들을 지나면 가장 안쪽에는 바로크 양식의 넓은 정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으로 향하는 '붉은 문' 아래에는 곰들도 사육되고 있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은 세계 300대 건축물로도 지정된 바 있다.
160여개의 계단을 지나 원형 탑에 오르면 구시가와 그곳을 'S'자로 감싸고 흐르는 블타바 강이 시야에 담긴다. S자 형상의 강은 우리나라에서도 쉬이 마주할 수 있지만, 중세풍의 마을이 이 강물과 어우러지니 그 어떤 풍광보다 아름답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이 있는 라트란 거리와 강 건너 구시가를 이발사의 다리(Lazebnický most)가 잇는다. 예전에 다리 인근에 이발소가 위치해 이런 이름이 붙었단다. 체스키크룸로프에서 작품활동을 펼친 에곤 실레의 흔적, 체코 인형극의 인형들을 보관한 마리오네트 박물관 등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여행업계는 '지속 가능한 여행'에 주목한다. 체코도 이에 동참하고 있다. 체코의 풍경, 자연, 지역 전통·문화의 경험에 주목하도록 돕는 것이 지속 가능한 여행이 품은 뜻이다.
카를로비 바리와 크리스탈밸리는 체코 대표의 지속 가능 여행지다.
오흐르제강과 따뜻한 테플라강이 합쳐지는 곳에 매력 넘치는 온천도시 '카를로비 바리'는 최근 마리안스케 라즈녜, 프란티슈코비 라즈녜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카를로비 바리 온천은 유럽 전역에서 방문객이 찾는 명소로서 300년이나 번성했다. 1482년에서 1664년에 걸쳐 홍수와 화재, 전쟁 등 피해가 이어지면서 관광객이 급감하다가 19세기 다시 부흥기를 맞았다.
괴테, 베토벤, 칼 마르크스, 차르 표트르 대제, 비스마르크, 쇼팽 등 유명인이 이곳을 찾아 휴양했다는 이야기가 퍽 흥미롭게 다가온다. 오스트리아 빈에 가야만 이들의 흔적을 만나리라 생각했는데, 우연찮게 카를로비 바리에서 마주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다.
카를로비 바리는 마시는 온천시설 콜로나다(kolonada)를 무료 개방한다. 온천수를 마실 수 있는 곳도 15곳이나 된다. '코로나 시대' 맞춤형 치유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 중인 호텔도 있다. 호텔에서 상주하는 의사의 처방을 받아 호텔에 머무르면서 치유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카를로비 바리는 영화 촬영소로도 자주 이용된다. 최근에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 '카지노 로열'의 일부가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됐다고 한다.
리베레츠 지역의 크리스탈밸리도 지속 가능 여행지다. 지역민이 똘똘 뭉쳐 청정자연과 전통기술을 함께 계승·발전시킨다는 점에서다.
체코는 예로부터 크리스털 생산이 발달했다. 독특한 자연조건과 장인의 열정이 어우러져 탄생한 아름다운 유리 제품은 곧 유럽의 유리 문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곳의 유리 공예 장인들은 세계 최초로 원석을 연마해 완벽한 크리스털 공예품과 우아한 샹들리에를 제작했고, 이는 곧 '보헤미안 크리스털'로 알려지며 체코의 특산품으로 주목받았다.
롯데월드 서울스카이 '물질하는 해녀' 작품, 합스부르크 쉔부른궁과 터키 돌마바흐체궁의 샹들리에도 크리스탈밸리에서 제작해 공급했다.
유리 덩어리가 어떻게 고급스러운 유리잔이나 예술작품으로 재탄생될까. 궁금증은 공방에서 해결해 준다. 이르지 파치넥은 츠비코프의 쿤라티체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대중에게 공개한다.
공방에서는 장인의 손길에 따라 변하는 유리의 모습, 크리스털 공예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공방에서 밖으로 나오면 파치넥이 쿤라티체에 만든 유리정원 '호루투스 스페쿠라리스'가 눈길을 끈다. 유리로 만든 유리 식물들이 빛을 가득 머금고 정원 곳곳에서 반짝인다.
2년여 만에 무척 조심스레 다녀온 해외여행이었다. 마치 해외여행을 처음 떠났던 때처럼 가슴이 설렜다. 입국 후 두 번의 'PCR 검사'라는 고통은 뒤따랐지만, 이 모든 경험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이번 여행에 마음이 달떴다. 체코에서 보낸 일주일, 그 낭만의 물결은 오늘도 폐부를 촉촉히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