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인물이 아닌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영화 '인질'(감독 필감성)은 다른 작품들보다 '설득의 과정'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배우 황정민이 주인공이고 그가 납치당했다는 극적 상황을 믿게끔 해야 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몰입하기 위해서는 주연 황정민의 열연도 중요했지만 동시에 납치범들도 사실적으로 보여야 했다.
그런 이유로 필 감독은 캐스팅에 많은 공을 들였다. 연극·독립 영화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인질' 오디션에 참가했고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배우 김재범이 최기완 역을 꿰찼다. "황정민에게 주눅 들지 않는 대범함"과 연기력을 겸비한 신예. 필 감독이 찾던 배우였다.
김재범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기과 출신으로 뮤지컬 '쓰릴미' '형제는 용감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아가사' '완벽한 타인' 등 내로라하는 작품들에서 활약했다. 대선배 황정민 앞에서도 떨지 않고 제 몫을 다해낼 수 있었던 것도 많은 무대 경험 덕이었다.
"혹시 연기하는 (황)정민 형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신 적이 있나요? 눈빛이 정말…. 하하하. 다행히 형과 공연을 한 적이 있어서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만약 경험이 없었다면 마음껏 연기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인질범 조직의 수장인 최기환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이코패스다. 남자 배우들이 한번쯤 꿈꾸던 캐릭터기도 하다. 김재범 역시 시나리오를 읽고 열정이 불타올랐다고 털어놓았다.
"의욕이 넘쳤죠. '내가 가진 걸 싹 다 보여주겠어' 하는 마음도 들었고요. 하지만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최기완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인질범 다섯 명과 황정민 간 싸움이었죠. 여러 캐릭터를 인지하고 차별점을 주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필 감독과 배우들 간 상의 끝에 일인자 최기완과 이인자 염동훈(류경수 분)의 온도를 다르게 설정하기로 했다. 염동훈이 '불'이라면 최기완은 '얼음'이라는 식이다.
"염동훈과 대비감을 가지니 캐릭터가 명확해졌어요. 최기완은 자기중심적이고 우월감에 푹 빠져 있어요. 근본 없는 자신감을 느끼고 있어서 자기 외에는 모두 하찮게 여겨요. 차갑고 이성적이지만 충동적이라서 제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감정을 터트리죠.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죠.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쟤 왜 저래'라는 식의 모습에 주안점을 둔 거죠."
김재범은 배우들 간 균형 맞추기에 집중했다. 개성 강한 인물들이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었던 이유다.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서 해낼 수 있었어요. 함께 고민하고 보완해나갔죠. 그 덕에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고 최기완에게만 몰두할 수 있었어요."
특히 황정민과 연기하며 내내 감탄했다고 부연했다. 무대와는 또 다른 매력에 푹 빠졌다고.
"(황)정민 형과 대면 신이 많지 않았는데도 (황정민이) 얼마나 베테랑인지 알 수 있었어요. 머릿속에 그림이 다 있는 거 같아요. 형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어야겠다' 생각했죠."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이렇게 겸손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충분히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김재범이 이토록 살벌하고 섬뜩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건 그의 깊은 고민과 연구 덕이었다.
"다른 영화 속 인물을 차용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실제 범죄자들의 기록을 찾아보곤 했죠. 실제 기록들에서 힌트를 얻었고 그 인물의 감정 상태를 읽으려고 했어요."
워낙 살 떨리는 연기를 소화해서 후유증이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쉬지 않고 농담하며 이미 최기완을 떠나보냈음을 증명했다.
"작품이 끝나면 역할에서 금방 빠져나오는 편이에요. 계속 매몰되어 있지 않으려고 해요. 시간이 지나면 다시 김재범으로 잘 돌아온답니다."
김재범은 코로나19 속 영화 '인질'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을 위해 직접 관전 포인트를 짚어주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초고속 열차를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에버랜드 티익스프레스 같은 느낌이랄까요. 하하하. 짧은 시간 푹 빠져서 원초적 쾌감을 느낄 수 있어요. 저는 평소 땀이 없는 편인데도 손에 땀을 쥐고 봤다니까요! 관객분들도 그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