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리 컬렉션]① 국제 경쟁력 갖춘 미술계…연구·국내외 홍보 등 과제로

2021-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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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기부‘, 그 이후가 중요하다

이건희 회장 소장품 2만3000여점 기증

부족한 근대작 보강 문화적 자산 풍성

국립현대미술관 전담팀 구성·수장고 확충

미술사적 가치 집중조망 국내외 알려야

 

이중섭, ‘황소‘, 1950년대, 26.4×38.7cm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삼성 일가는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으로 불리는 미술품을 기증하기로 했다. 이건희 회장이 40여 년간 수집해온 작품 2만3000여점이다.

미술 작품을 대규모로 국가에 기증하는 일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국보 등 지정문화재가 다수 포함된 고미술품, 세계적 서양화, 국내 유명 작가의 근대미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가치는 감히 돈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크다.
이번에 기부된 ‘이건희 컬렉션’은 국내 문화 자산 보존은 물론 국민의 문화 향유권 제고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본지는 ‘위대한 유산, 리 컬렉션’ 연재를 기획했다. 이번에 기증한 작품들이 지니는 역사적, 미술사적 가치를 비롯해 예술품을 어떻게 보존하고 연구할지 미술계 인사들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소는 일제강점기부터 조선인을 상징하는 동물이었습니다. 특히 흰색은 조선인의 색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흰소’가 갖는 상징성은 매우 큽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서울관에서 열린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소장 기증미술품 세부 내용 공개 기자회견에서 주요 작품을 직접 설명했다. 윤 관장은 발표 전 “떨리네요”라며 평소와 달리 긴장된 모습을 보였는데, 곧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미술인들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대작들이 연이어 발표됐기 때문이다.

그중 이중섭의 ‘흰소’는 약 5점만이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진 희귀한 작품이다. 1972년 개인전과 1975년 출판물에 등장했다가 행방이 묘연했는데, 이번 기증으로 인해 다시 세상 밖으로 힘차게 나오게 됐다.

‘점화’로 불리는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한 김환기가 1950년대 그린 ‘여인들과 항아리’는 세로 281㎝·가로 568㎝인 대작이다.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를 그렸다고 평가받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에는 그가 한국전쟁 시기부터 즐겨 그렸던 소재로, 평생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조선 백자를 들거나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들이 여러 명 등장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환도한 후 자주 등장하는 ‘광화문’으로 상징되는 조선 건축과 길거리의 노점상, 꽃과 새 등 그가 즐겨 그린 1950년대의 소재들이 작품에 모두 담겨 있다. 윤 관장이 “만약 이 작품이 경매에 나오면 시작가가 300억~400억원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라고 말할 정도로 가치가 큰 작품이다.

고 이 회장 유족 측은 지난 4월 28일 이 회장 소장품 1만1023건 약 2만30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국보 제216호 ‘정선 인왕제색도’, 보물 제2015호 ‘고려천수관음보살도’ 등을 비롯해 9797건 2만1600여점이 기증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이중섭 ‘황소’,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살바도르 달리 ‘켄타우로스 가족’ 등 1226건 1488점이 기증됐다. 삼성가는 작가의 지역 연고지에 있는 미술관에도 작품을 전했다. 대구미술관과 전남도립미술관에 각 21점, 박수근미술관에 18점, 이중섭미술관에 10여점이 가게 됐다.

말 그대로 ‘위대한 유산’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및 예술성·사료적 가치가 높은 주요 미술품을 대규모로 국가에 기증한 것은 사실상 국내에서 최초다. 이는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대규모 기증 사례다. 삼성에 ‘한국의 메디치가’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이유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사상가와 화가·학자를 발굴해 르네상스가 꽃필 수 있도록 후원했다.

이번 기증은 한국 미술계가 도약할 소중한 기회다.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를 비롯해 이번 기증이 갖는 의미를 함께 생각하고, 향후 발전 방안에 대해 미술계에서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본지가 ‘위대한 유산, 리 컬렉션’ 시리즈를 준비한 이유다.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그 실천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라며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에게 보내준 이들 문화재와 예술품을 어떻게 보존·관리하고 조사·연구해서 문화의 꽃을 피워낼 것인가를 고민할 때”라고 짚었다.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대, 281×568cm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리 컬렉션’이 갖는 의의는 크다. 고 이 회장 소장품의 기증으로 우리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적 자산이 풍성해졌으며, 해외 유명 박물관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국립현대미술관 경우 소장품 중 근대미술 컬렉션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도약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중, 1950년대 이전까지 제작된 작품은 960여점에 불과했다. 특히, 희소가치가 높고 수집조차 어려웠던 근대기 소장품이 이번 기증으로 크게 보완되어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발굴 매장문화재가 대부분이던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우리 역사의 전 시대를 망라한 미술·역사·공예 등 다양한 문화재들을 골고루 기증받아 고고·미술사·역사 분야 전반에 걸쳐 전시에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일선부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건희 컬렉션’ 전담팀(TF)을 구성할 계획이다. 김준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은 “이번에 1500점이 한 번에 기증됨에 따라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다. 1년 정도 기간이 걸리는 업무다”라며 “일정 부분 미술관의 체질 개선 계기가 될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수장 공간 확충 등 보완할 부분에 대한 다양한 방안도 논의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과천관·청주관에 수장 시설을 갖고 있다. 현재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은 모두 과천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이번 기증으로 미술관 3개관 수장 공간이 평균 93% 이상 차게 됐다. 이로 인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추가적인 공간 확보를 위해 협의 중이다.

연구를 통한 한국 미술사를 새로 쓰는 작업도 병행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22년까지 작가명·작품명·재료기법·제작연도 등 작품정보 정보 구축을 위한 기초 학술조사를 실시하고, 제작 시기 및 성분분석 등의 조사연구도 병행할 예정이다. 유족·생존작가·미술계 인사 등을 통해 작품 관련 주요 정보 자료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기초 조사연구 완료와 함께 ‘이건희 컬렉션’ 소장품 도록 발간을 시작으로 기증작의 시기별, 주제별 의미를 분석하는 학술행사를 단계적으로 추진해 다양한 연구 논문과 출판물로도 공유할 예정이다. 궁극적으로는 기증작의 미술사적 가치를 집중조망함으로써 한국미술사 연구의 지평을 넓힐 계획이다.

‘위대한 유산’을 국내와 해외에 널리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6월부터 대표 기증품을 선별한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특별공개전(가제)’을 시작으로 유물을 공개한다. 아울러 13개 지방소속박물관 전시와 국외 주요 박물관 한국실 전시, 우리 문화재 국외전시 등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오는 8월 서울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1부: 근대명품’(가제)을 통해 한국 근현대 작품 40여점을 선보일 예정인 국립현대미술관은 2022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열리는 한국 근대미술전에도 이건희 컬렉션 중 일부를 선보일 예정이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열린 이 회장 기증품에 대한 기자 간담회에서 “이번 기증을 통해 국가의 문화 자산이 더욱 풍부해졌다”며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관광 또는 민간과 연계를 통해 더 풍성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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