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어쩌다가 한국 백신 구걸國 되어버렸나

2021-05-0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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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미국 바이오제약 회사인 노바백스의 스탠리 어크 회장을 만나 코로나19 백신 공급을 부탁하는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오는 21일 문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해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인데 그 자리에서도 백신을 달라고 손을 내밀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초부터 K-방역으로 세계의 우등생 자리에 있었던 한국이 올 들어 코로나 백신 지체국으로 낙인이 찍히는 대추락을 경험하고 있다. ‘정부 연구개발비 30조원, 국가연구개발비(민간포함) 100조원 시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연구개발비 비중 세계 1, 2위에다 연구개발비 총액으로는 세계 5, 6위’를 자랑하던 ‘기술강국 코리아’와 ‘IT강국 코리아’는 도대체 어디로 숨어버리고 말았는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집계에 따르면 코로나19의 세계 누계 감염자수는 지난 4월 30일 현재 1억5000만명을 돌파했다. 감염력이 강한 변이 바이러스가 만연한 인도 등지에서 신규 감염자수가 급증하고 있다. 전 세계를 보아도 감염자 증가 추세가 가속화하고 있다. 누계 사망자수는 약 316만명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세계 185개국·지역에서 10억회 이상의 백신접종이 이뤄졌다. 백신을 생산하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 백신을 확보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제 백신은 국가안보이며 외교다. 또한 경제와 사회를 지탱하는 생명수다.

미국 바이든 정권은 가까운 시일 내에 국내에서 남아도는 코로나 백신을 다른 나라에 공급한다고 한다. 미국은 3월 중순 캐나다와 멕시코에 백신을 제공할 방침이라고 밝힌 데 이어 4월 하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몇 주 내에 1000만 회분, 또한 2개월 동안에 5000만회 분량을 세계에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FDA(식품의약국) 심사를 거쳐 다른 나라에 인도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은 세계 어디에서 백신이 필요한지를 판단하는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있는 단계에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듀크대학 연구팀의 추계로는 오는 7월말까지 화이자와 모더나의 백신 약 6억회 분량이 공급되어 아스트라제네카 등의 백신을 합치면 모두 9억회분이 될 전망이라고 한다. 만약 미국의 전체 인구 약 3억3000만명이 2회씩 접종했다고 해도 2억회 분량 이상이 남는다는 계산이다.

구체적인 양도처는 분명하지 않지만 세계보건기구(WHO) 등이 공동 조달해 개도국에도 분배하는 ‘COVAX(코박스)’도 대상이 될 수 있다. 미국은 올 하반기에 세계 최대의 백신 수출국이 될 전망이다. 새 전선(戰線)이 펼쳐지고 있는 백신 외교에서 미국의 행보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가 예의주시하며 맞대응하는 태세를 갖추고 있다.

왜 우리는 코로나 백신을 만들지 못하고 있고, 확보마저 제대로 안되고 있는가. 이제 우리의 싸움 상대는 코로나 백신이 아니라 낙후한 ‘한국형 시스템’이다.

백신 개발 전쟁에서 선두에선 미국 화이자와 독일 바이온테크, 영국의 아스트라제네카, 미국의 얀센, 모더나와 노바백스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회사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1849년 창업해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는 화이자는 전세계에 9만6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세계 최대 제약회사 중의 하나다. 화이자와 백신개발에 손을 잡은 독일 바이온테크는 2008년 터키출신 독일 이민자 부부가 설립한 바이오제약 벤처기업이다. 아스트라제네카는 1913년에 설립한 스웨덴의 아스트라와 1926년 설립한 영국의 제네카가 1999년 합병해 본사를 런던에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다. 이번 백신 연구에는 옥스퍼드대학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얀센은 1953년 벨기에에서 설립됐으나 1961년 미국의 존슨앤존슨에 인수됐다. 2010년에 설립된 모더나는 매사추세츠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83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다. 노바백스는 1987년 메릴랜드에서 사업을 시작했으며 현재 790여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백신 선두주자들이 성공한 특징을 요약해 보면 우선 글로벌 대기업과 초격차기술을 가진 벤처기업의 협업(화이자와 바이온테크), 풍부한 경험을 가진 글로벌 기업과 유력 대학의 협업(아스트라제네카와 옥스퍼드대학)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제약강국인 벨기에의 실력을 구사하도록 한 그룹(존슨앤존슨의 얀센), 실적이 없어도 끊임없는 정부지원으로 성공한 정책협업(모더나와 노바백스)도 주목거리다. 특히 벨기에는 자국의 전체 연구개발비에서 차지하는 신약개발비가 40%(미국 37%, 일본 18%, 한국 8%)에 달해 세계 전체 신약개발 연구개발비의 5%를 점하고 있다.

노바백스는 작년 7월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초고속 코로나 백신 개발 프로젝트‘워프 스피드 작전(Operation Warp Speed)’을 통해 16억 달러(약 1조7200억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이후 대규모 임상시험과 양산에 자금이 투입됐다. 노바백스는 면역 활동을 도와주는 백신 보조물질에 독자 기술과 인플루엔자·에볼라 출혈열 등 백신 후보를 갖고 있지만 상품화한 제품은 없었다. 노바백스에 대한 지원금은 트럼프 행정부의 ‘워프 스피드 작전’ 중 최대 규모다. 30여년간 실적이 거의 없는 중소기업에 정부가 대규모 투자를 한 것이다. 모더나도 매년 수억 달러의 영업적자를 기록해 오고 있으나 정부지원과 월스트리트에서의 투자유치로 연구개발형 기업으로 유지해 왔다.

70개국 이상에서 백신 사용 허가를 얻고 있는 아스트라제네카는 지난 30일 2021년 1~3월기 결산에서 매출액이 전년 같은기간보다 15% 늘어난 73억2000만 달러(약 8조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매출 증가는 암 치료약이 호조를 보이며 개도국에서 판매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코로나 백신 매출액은 2억7500만 달러(약 3000억원)에 불과했다. 이 회사가 옥스퍼드대학과 공동 개발한 코로나 백신은 1~3월 전 세계에 6800만회분을 납품했다. 유럽에서의 수입이 전체의 80%를 차지했다. 그러나 팬데믹 기간 동안 이 백신 사업을 무이익으로 실시하자는 옥스퍼드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여 그다지 돈을 벌지는 못했다. 백신의 공적 역할을 이행한 아스트라제네카와 옥스퍼드의 자세가 돋보인다.

백신 개발 업체들은 오픈 이노베이션,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의 협업, 산학관협력의 생태계 구축을 통해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회자되고 있는 새로운 차원의 연구개발 체제를 이번 백신 개발에서 폭넓게 실행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코로나19 대책에서 비장의 카드는 역시 백신이다. 의료인들과 노인들을 중심으로 접종이 이뤄지고 있지만 당장 국민 전체에 확산될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공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는 백신 제조업체가 있는 나라에서 접종률이 높은 경향이 나타난다. 한국의 접종률은 5%를 겨우 넘고 있다. 국내 기업도 개발에 임하고 있지만 한참 뒤처져 있다. 백신이 코로나19 팬데믹 대책에 필수적이지만 각국에 의한 쟁탈전이 격렬해지고 있어 해외 의존으로는 불안하다. 늦었지만 정부는 국내 백신 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장기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2009년 유행했던 신종 플루 때도 국산 백신의 개발과 공급이 늦었다. 뒤처진 국산 백신 개발을 앞당기기 위한 중장기적 전략이 필요하다.

대학의 기초연구와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산업정책, 그리고 기업전략이 한데 어우러진 새로운 한국형 이노베이션 정책과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정부 부처 간, 학문 영역 간의 칸막이 체제로는 불가능하다. 이번 백신 개발에서는 연구개발 성공부터 시장에 나오기까지 4~5년 걸리던 것이 1년 이내로 짧아졌다. 기초연구가 바로 비즈니스로 이어지는 초스피드 시대다. 이럴 때 가장 절실한 것은 이를 끌고 나갈 추진력과 사명감을 갖춘 컨트롤타워다. 이러한 시스템 부재가 한국이 겪고 있는 코로나19 위기의 진정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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