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부활한 美 스마트파워, 허 찔린 중국

2021-04-0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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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약한 고리를 노린 美…중국식 외교 또 한계 노출

신장위구르자치구 아커쑤 면화 재배지에서 농기계를 동원한 면화 채집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사진=신화통신]


지난 3월 26일 장쑤성을 시찰 중이던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양쯔(揚子)석화와 독일 바스프가 난징에 설립한 합작 법인을 찾았다.

양쯔석화는 세계 최대 석유화학 기업인 중국석화(시노펙)의 100% 자회사다.
지난해 바스프가 중국에서 거둔 매출은 85억 유로(약 11조3300억원)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시장이다.

리 총리는 직원들에게 "꼭 성공하라. 중국 동부 연안뿐 아니라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라"고 덕담을 건넸다.

이에 대해 일부 중국 매체는 바스프가 같은 독일 기업인 아디다스에 핵심 소재를 공급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리 총리가 은밀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아디다스는 인권 탄압 의혹을 받는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생산되는 면화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중국 내 보이콧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리 총리가 시찰을 떠나기 직전인 22일(현지시간)에는 유럽연합(EU)이 위구르족 인권 탄압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중국 측 고위급 인사와 단체 등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리 총리가 발신하려던 메시지는 명확하다. 중국이 주권과 내정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문제에 대해 어깃장을 놓지 않으면 얼마든지 돈을 벌어 갈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발붙이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행간에 함의를 싣는 중국 특유의 정치 기법이다.

모든 이가 리 총리처럼 점잖은 건 아니다. 쉬구이샹(徐贵相) 신장위구르자치구 대변인은 "(신장 면화 불매를 선언한 기업은) 중국 시장에서 한 푼도 벌지 못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집단 수용과 강제 노동, 종교 탄압, 성 범죄 등 온갖 추문에 연루돼 있는 신장 인권 문제가 중국과 서방 간 갈등의 한복판에 섰다.

미국이 중국을 향해 제재의 칼날을 겨누자 EU와 영국, 캐나다 등도 일사불란하게 공동 대오를 형성했다.

하드파워(군사·경제력 등 물리적 힘)에 의존해 미국 우선주의를 부르짖던 트럼프 행정부에 등을 돌렸던 옛 친구들이 인권과 정의 등 보편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바이든 행정부의 구애에는 적극 화답하는 모양새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외교·문화·이념 등 연성 권력)를 절묘하게 결합해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미국식 스마트파워가 부활했다는 평가다.

허를 찔린 중국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합리적인 설득과 사실 관계의 설명보다 무조건적인 부인과 거친 보복에 무게가 실린 대응이다. 덩치만 커졌지 아직 글로벌 리더 감은 아니라는 사실만 재확인됐다.

다만 이번 공세로 신장이 경제·사회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는 신장 면화의 목표 가격을 t당 1만8600위안으로 유지하는 농가 보호 정책을 시행 중이다.

또 수입산 면화에 관세 할당제를 적용해 저가 면화가 덤핑으로 수입되는 걸 막고 있다. 외국 기업이 신장 면화 구매를 줄여도 자국 기업이 그 공백을 메워 손실을 최소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동맹을 재규합하는 데 성공하는 걸 목도한 중국은 제 편 만들기에 더욱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미국은 중국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신장 면화를 사용하는 건 불의, 신장 면화를 문제 삼는 건 반중이라는 극한 이분법 사이에 갇힌 애꿎은 기업들만 난감해졌다.
 

1964년부터 신장위구르족자치구 변경 지역에서 국경을 감시하며 돌덩이에 끊임없이 '중국(中國)' 두 글자를 새겨 온 위구르족 부루마칸씨. [사진=인민일보 위챗 계정 ]


◆중국의 약한 고리를 노린 美

지난 3월 18~19일(현지시간)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열린 미·중 고위급 대화가 끝났을 때만 해도 중국은 득의만면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신장을 비롯해 홍콩·대만 등 민감한 이슈를 건드리자 중국은 기다렸다는 듯 반격에 나섰다.

양제츠(楊潔篪) 공산당 외교 담당 정치국원은 "미국은 높이 앉아 내려다보듯 말할 자격이 없다. 중국인에게 이런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왕이(王毅)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도 "미국은 중국 내정에 간섭하는 패권적 행위를 포기해야 한다"며 "이런 고질병은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외교 격식에 걸맞지 않은 발언들이지만, 중국 관영 매체는 초강대국 미국에 당당히 맞선 쾌거로 포장했다. 중국인들도 함께 환호했다.

중국을 상대로 별 성과 없이 물러나는 듯 보였던 미국은 사흘 뒤 EU·영국·캐나다와 손잡고 동시에 대중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신장 내 공안·사법기관 수장과 집단 수용소 운영 책임자 등이 줄줄이 제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EU가 중국의 인권 문제와 관련해 제재를 한 건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32년 만이다.

미국 대선 기간 중 중·EU 투자협정 협상을 신속하게 마무리하며 유럽을 중립 지대로 유도했다고 믿었던 중국은 당황했다.

중국은 경제적 이익을 미끼로 유럽을 반중 전선에서 이탈시키려 했지만, 유럽은 인권과 정의라는 보편적 가치로 접근한 미국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했고 중국과 유럽 간 정치적 갈등은 심화하고 있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비영리 단체 '더 나은 면화 계획(BCI)'이 신장 면화에 대한 승인을 거부하고, 많은 글로벌 브랜드가 불매를 선언하면서 외국 기업과 중국 기업·소비자 간의 관계도 악화했다.

중국의 대외적 이미지는 실추됐고, 신장 내 분위기도 어수선해졌다.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의 발언권을 회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신장 인권 탄압의 실상을 고발한 국책 연구기관과 싱크탱크, 주류 언론에 국제 여론이 호응했다.

소프트파워를 활용해 중국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지출한 비용은 미미하다.
 

3월 26일 장쑤성 난징의 양쯔석화와 독일 바스프 합작 법인을 방문한 리커창 중국 총리(오른쪽 둘째)가 생산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리 총리의 이번 행보는 신장 면화 불매를 선언한 글로벌 기업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진=중국정부망]


◆중국식 외교 또 한계 노출

서방 언론이 처음으로 신장의 재교육 집단 수용시설 운영 의혹을 제기하며 '나치 수용소'라는 표현까지 동원했을 때 중국은 사실 무근이라며 발끈했다.

하지만 국제 여론이 들끓자 결국 '직업기술 교육 훈련 센터'를 설립해 운영 중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이후 수많은 피해자가 등장하자 서방은 신장 문제에 대한 폭로자를 자처하며 권위를 쌓아 갔고 중국은 늘 수세에 몰렸다.

중국은 신장 관련 이슈가 터질 때마다 반박 증거를 제시하며 즉각적인 보복을 단행했지만, 증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중국 측 대변인의 분노한 표정만 잔상으로 남는다.

2014년 발표된 저우하오(周浩) 감독의 다큐멘터리 '면화'는 제51회 대만 금마장 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허난성 농촌의 한 여성은 매년 봄이 되면 기차로 56시간 걸리는 신장으로 향한다. 3개월짜리 면화 채집 일을 하기 위해서다.

구이저우성에서도, 쓰촨성에서도 100만명 가까운 노동자가 신장으로 몰려든다. 다큐멘터리는 중국 경제의 고도 발전 속 하층 노동자의 애환을 담으려다가 예기치 않게 이 같은 인력 대이동 현상과 조우한다.

중국은 수백만명의 인력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굳이 면화 채집을 위해 위구르족에게 강제 노동을 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강조한다.

관영 신화통신은 지난해 기준 신장 지역에서 면화를 기계로 수확하는 비율이 80%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마찬가지로 강제 노동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다.

신장 내 인권 탄압, 강제 노동의 문제는 그 존재 여부보다 믿느냐 안 믿느냐가 더 중요해진 양상이다. 이에 대한 공론을 만드는 건 서방의 몫이 됐고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하지 못한 중국의 책임이다.

서방 측 공세에 중국에서는 또다시 애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왕훙 웨이야(微婭)는 생방송으로 신장 면화 제품을 판매해 한 시간 만에 35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이를 다수의 중국 매체가 발빠르게 보도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등은 1964년부터 58년째 국경 감시 업무를 해 온 한 위구르족 노파의 사연을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올해 80세가 된 부루마칸씨.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하지만 변경의 돌덩이에 '중국(中國)'이라는 글자를 새겨 왔다. 그 지역이 중국 영토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란다. 이런 '중국석(中國石)'이 셀 수 없이 많아져 지역 명물로 자리매김했다는 내용이다.

신장 면화를 사용하지 않는 외국 기업에 대해 불매 운동을 벌이거나 제품을 불태우는 등의 행위는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중화권 매체 둬웨이는 "중국의 하드파워는 미국에 근접하고 있지만 소프트파워와 스마트파워는 격차가 크다"며 "세계 무대의 중앙으로 더 접근하려면 기존의 행태와 정책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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