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는 한때 일본 제국주의에 열광하기도 했다. 영국 식민지의 경험을 지닌 인도인으로서 일본이 영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동방의 부활'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감행하면서 제국주의적 탐욕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일본은 동양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욕망으로 또다른 제국주의자가 되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는 1929년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한국방문을 요청받았다. 타고르는 이에 응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여 시를 써서 준다.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타고르 '동방의 등불(등촉)'
짧은 네 구절로 되어 있는 시는, 시인인 주요한이 번역한 것이다. 이 시는 그해 4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3·1운동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에게 이 시는 큰 격려와 희망을 던져주었다. '동방의 등불'은 이에 그쳤던 게 아니라, 이후 이 나라의 세계적 흥기(興起)를 돋우는 강력한 암시와 예언이 되어왔다. 그의 시집 '기탄잘리Gitanjali)'는 103편의 '신에게 바치는 송가(頌歌)'이다. 그 시집 '35번'은 이렇다.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펴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이여 깨어나소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구절을 찾아내어, '동방의 등불' 뒤에 붙여서 읽기도 했다. 자유의 천국이자 내 마음의 조국은, 타고르에겐 인도였겠지만 읽는 우리에겐 당연히 코리아였다.
류영모는, 타고르보다 29년 뒤에 태어나 이미 타오르고 있던 '동방의 등불'이었다. 그는 '신에게 바치는 노래'와 '깨달음의 노래'와 '가르침의 노래'를 축복처럼 많은 분량으로 남겨놓았다. 그 시들의 심오함과 진실함 속에 담긴 깊은 울림과 성스러움은, 세계인들에 의해 발견되어지지 않은 채 묻혀 있는 뚜렷한 보물이라 할 만하다. 지금에 와서야 후인의 영혼에 다가서서 빛을 발하면서 그 말씀의 우주에 황홀해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형편이다. 타고르의 시는, 오히려 지금 다시 읽어보면 류영모의 시가 말하고 있는 오의(奧意)의 아랫목까지 다가서진 않았으며 삶 속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신에 대한 영감을 풍유(風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류영모의 시를 읽어볼 차례다.
허공신관의 복음서, 시조 '마음과 허공'
마음이 속에 있다고 쫓아들어 못 봤거늘
허공이 밖에 있대서 찾아나가 만날손가
제 안팎 모르는 임자 아리따운 주인인가
달라붙은 속알이 마음을 제 속이라고만 녁
터믄이도 모르는 이 한데를 밖이라만 암
우주를 휩싼 허공도 빈맘 속에 드느먼
온갖 일에 별별 짓을 다 봐주는 마음이요
모든 것의 가진 꼴을 받아주는 허공인데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하나인 법 싶구먼
제맘이건 쉽게 알고 못되게는 안쓸 것이
없이 보고 빈탕이라 망발을랑 말을 것이
님께서 나드시는 길 가까움직 하구먼
- 다석시조 '마음과 허공' (성서조선)
이 4연의 시조는, 마음과 허공에 대한 사상을 정연하게 펼쳐낸다. 인간에게 있는 것은 마음이요, 인간 밖에 있는 것은 허공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안은 마음이요 밖은 허공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심외공(內心外空)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심(心)과 공(空) 사이의 무엇이다. 사람의 몸을 그릇으로 비유하면 그릇 안에 담긴 것은 심(心)이요, 그릇 밖에 펼쳐진 것은 공(空)이다. 심과 공의 경계를 이루지만, 그릇이 그렇듯이 심과 공이 서로 넘나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인간 속에 있다지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머리 속에 있는 듯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고, 심장 속에 있는 듯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뱃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성기나 항문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중에서 어디까지가 마음인지도 뚜렷하게 구별해내기 쉽지 않다. 하나의 마음으로만 되어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음과 마음이 싸울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마음이 모두 널부러져 그저 육신만 숨 쉬고 있는 듯할 때도 있다.
인간 밖에 허공이 있다지만 허공이 무엇인지 어떤 형상인지 어디서 어디까지가 허공인지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우주를 허공이라 한다지만, 우주라는 것이 대부분 우리 인식의 바깥에 있고 경험의 외부에 있어서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이 오히려 공허할 때가 많다. 마음도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고 허공도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이, 과연 그 안팎 사이에 있는 몸 하나의 임자인 것처럼 사는 일이 진짜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달라붙은 속알이 마음'은 생계를 도모하는 얕은 심산(心算)들이 피상적으로 운용되는 것이다. 마음을 허비하고 오용하는 방식이다. 주로 그 마음들은 먹는 것을 탐하고 싸우고 경쟁하는 것에 탐닉하고 색욕과 번식욕에 골몰한다. 속알이는 속알맹이 혹은 작은 속내나 '속앓이'라고 볼 수 있다. 욕망은 대개 자기를 넘어서는 일을 하기 위해 속을 앓는 것이다. 그 속앓이가 인간에게 착 달라붙어, 주인행세를 한다. 그래서 인간은 그게 진짜 자기 '속'인 줄로 착각하고 산다. 그게 제 '마음'이라고 여기고 먹고 싸우고 희롱하는 데 인생을 쓰는 셈이다.
'터믄이도 없는 이 한데'는 터무니(근거)가 없는 이 바깥 허공을 말한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이것이 무엇인지 대체 왜 저토록 잴 수도 없는 허공으로 펼쳐져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감관에 들어온,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허공의 발톱 끝만을 보면서 이게 밖이구나 여기고 살아갈 뿐이다.
안도 모르고 밖도 모르는 인간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밝혀내던 류영모는, 한마디로 그 문제의 핵심에 나아간다. '우주를 휩싼 허공도 빈맘 속에 드느먼'. 허공이 너무 크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허공은 '공간'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상대세계의 관점이며 상대세계의 계측방식일 뿐이다. 절대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허공은, '상대세계의 크기'가 아니라 한 점이 우주를 머금을 수 있는 하나의 '차원'일 수 있다. 그렇다면 허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들어있을 수 있다. 류영모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마음과 허공이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이렇게 풀어내고 있는 셈이다.
3연에서 그는 마음허공의 사유를 펼친다. 마음이란 것은 인간의 모든 상황, 모든 경우, 모든 변화를 다 접수하는 거대한 내부다. 허공이란 것 또한 우주 내의 모든 상황, 모든 경우, 모든 변화를 접수하는 거대한 외부가 아닌가. 내부와 외부가 경계없이 넘나든다면, 둘이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결론을 내린다.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하나인 법 싶구먼'
4연은 허공신관이 더욱 뚜렷해진다. 마음이 제 것이라고 함부로 써선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공이 들어와 있는 것이기에 제 것이 아니라 허공의 것이기 때문이다. 허공이 그냥 텅빈 것이라고 여겨서 우습게 봐서도 안된다. 저것은 아무런 영혼도 없고 마음도 없을 거라고 여겨선 안된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속에 들어온 마음과도 같은 것이 저 우주에 펼쳐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류영모의 허공신학이 생생하게 등장한다. 마음이 있는 허공. 이것이 바로 신의 모습이다. '님께서 나드시는 길 가까움직 하구먼'. 바로 이것이 마음과 허공 사이에 오가는 신의 길이다. 노자가 말한 무유입무간(無有入無間, 있음이 없으면(허공) 없는 사이(인간)로 들어올 수 있다)을 적실하게 규명해낸 구절이다. 류영모의 영적 인식은, 어디서도 볼 수 없이 뚜렷하고 정밀하며 생생하다. 마음과 허공이 하나라는 인식은 '얼나'라는 개념을 낳고, 마음과 허공이 서로 넘나든다는 생각은, 신과 인간의 친연(親緣,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명료하게 한다. 이것은 시조를 넘어, 우리에게 온 복음이다. 시성(詩聖) 류영모의 영적인 정수가 이 한편에 흐르고 있다.
기도와 예배하는 게 종교 아니다- 다석 한시 '기독자(基督者)'
祈禱陪敦元氣息(기도배돈원기식)
讚美伴奏健脈搏(찬미반주건맥박)
嘗義極致日正食(상의극치일정식)
禘誠克明夜歸託(체성극명야귀탁)
힘차게 숨 잘 쉬는 것이 기도를 독실하게 지키는 것이며
맥박이 잘 뛰는 것이 찬송가 잘 부르는 것이며
날마다 밥을 잘 먹는 것이 가을 예배(嘗) 올리는 것이며
밤에 모든 걸 맡기는 것이 낮을 이기는 5년 예배(禘)다
(*3행에 나오는 상(嘗)과 4행의 체(禘)는 '중용(中庸)' 19장에 나오는 말이다. '체상지의(禘嘗之義, 하늘에 지내는 제사 체와 상의 뜻)에 밝으면 나라 다스리는 일은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는 구절이다. 禘(체)는 5년마다 종묘에 지내는 여름제사이고 嘗(상)은 가을제사이다. 논어 '팔일(八佾)'편에도 '체'가 등장한다.)
이 시엔 날렵한 풍자가 숨어있다. 서구 기독교가 교리와 교회의식에 의존하고 그 종교적 일상에 매몰되어 그것이 종교행위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기도는 마음이 하는 것이며, 찬송도 마음이 하는 것이며, 예배도 마음이 드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 생각의 불꽃에 닿아야 그것이 하느님에게 보내는 것이요 하느님이 받는 것이요 하느님에 닿는 것이다. 신앙은 삶 전부에서 깊이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며, 우러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에서 꾸준히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류영모는, 2천년 기독교 역사가 '하느님과 통한 보증수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생각 속에 깃든 오롯한 성령만이 하느님에 닿는 티켓이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이, 기독교에 평생 열광했던 그가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엄격하고 때로는 고독했던 '참 교리(敎理)'의 길이 아니었을까.
일상에서 신의 뜻을 찾다, 시조 '참'
함석헌은 사상계에 '진리에의 향수'라는 글을 실었다. 함석헌이 말하는 진리는, 생명체가 추구해야 할 진리다. 이것을 이기상 교수는 '생명학적 진리'라고 표현했다. 진리 앞에 '생명학적'이란 말을 붙인 까닭은, 그것이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식론적 진리와 다르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 글 속에 류영모의 시조 '참'을 인용했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잘 참가
참 참이 참아 깨새 하늘 끝 참 밝힐 거니
참 든 맘 참 빈 한 아 참 사뭇 찬 참 찾으리
다석 류영모의 시조 '참'
우리말로 '참'은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진리의 참, 짧은 시간(때)인 참, 차례를 의미하는 참, '참다'의 어근인 참, '진실로'라는 의미의 강조어, 가득 차 있음의 참, 갑자기 깨닫는 말인 '참'. 우리말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결을 읽어내는 빼어난 예인(藝人)인 류영모는, '참'이라는 시에서 함석헌이 말한 생명의 진리를 풍성한 뉘앙스로 돋을새기고 있다. 한번 풀어보자.
진리를 찾아 가는 길에 / 한참 오래 길게, 한 차례 두 차례 쉬자고 할 태세인가 / 그때 그때 참아서 깨어있을 사이/ 하늘 끝에 있는 가득 찬 진리를 밝힐 것이니
진리가 들어온 마음/ 진실로 비어있는 하나, 아 참!(깨닫는 소리)/ 사뭇 가득 들어차 있는 진리를 찾으리
'참'은 인간에게 접속된 신의 숨결이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인간이 숱하게 벌여놓은 허상과 오류 속에서,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오롯한 신의(神意)다. '참 든 맘 참 빈 한 아 참'은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한 우리말의 별미(別味)를 독창적으로 보여준다.
신의 명령을 노래하다, 한시 '생명'
天命是性命 천명天命은 올바른 하느님(是性)의 명령이다
革命反正命 혁명革命은 뒤집어 바로잡으라는(反正) 명령이다
知命自立命 지명知命은 스스로 바로 서라는(自立) 명령이다
使命必復命 사명使命은 반드시 돌아오라는(必復) 명령이다
다석 류영모 한시 '생명(生命)'
류영모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늘에게서 명령을 받은 것을 생명(生命)이라고 했고, 그 구체적인 명령인 <천명과 혁명과 지명과 사명>으로 나눠 풀어주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그것을 알았으면 세상의 아닌 것을 바로잡기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예수처럼 하느님에게 기필코 돌아가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받은 생명 속에는 이런 네 가지의 하느님 뜻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성서의 이 구절을 정밀하게 부연한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니라."(요한 1:1)
"본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느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 1:18)
신은 천지창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보였으나 스스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천지창조라는 프로그램이 실현되는 모습을 통해서만 드러났다. 그런데 예수란 인간의 육신을 입고 등장한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 그 프로그램의 핵심을 직접 전했다. 천지창조의 핵심은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에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한 프로그램이기도 하지만 천지를 끝없이 사멸해 새로운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지속성임을 말한 것이다.
류영모의 시에서 '천명'은, 바로 인간이 부여받은 하느님의 프로그램 진본(眞本)이다. '혁명'은, 인간이 잘못 알고 있고 왜곡하고 있는 하느님의 프로그램을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예수가 한 일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지명(知命)'은 하느님의 프로그램을 스스로 꿰뚫어 자기 속의 성령을 바로 세우라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것을 '얼나'라고 불렀다. 얼나는 곧 예수를 예수이게 한 비밀이었고,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기적이기도 했다. '사명'은,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 나아간 길이며 류영모가 파사(破私)의 깨달음을 통해 돌아간 루트다. 그것을 필복(必復, 반드시 신에게로 복귀함)의 명령이라고 한 류영모의 생명 의식은, 그의 신앙사상의 정수를 드러낸다. 이 시는 성경 구절에 담긴 신과 성령과 예수의 신비(神秘, 신의 비밀)를 심령으로 내통한 희귀한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류영모는 한글시 약 1700수, 한시(漢詩) 약 1300수 등 3000수의 시를 남긴 시인이다. 특히 한글시는 시조를 활용해 정형의 율격으로 신의 숨소리를 드러냈다. 다석의 시편은, 가장 가까운 데 와 있는 신과 가장 먼 곳까지 닿아있는 신에 대한 깨달음의 언어수행이라 할 만하다. 신과 독대하는 인간의 뚜렷한 지향, 자기 탐구와 삶의 성찰, 해박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인류 보편의 거룩함을 향한 열정이 가득하다. 문제는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축복처럼 쌓여있는 다석 시편들을 그 영성적 높이와 사유의 깊이만큼 풀어내고 감당하고 호흡할 만한 뒷사람이 존재하느냐일 것이다. 이 지상의 누구도 가보지 못한 성령의 광맥이 묻힌 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말씀은 신의 말을 받아쓰는 것이라 했던 류영모가, '받아써놓은' 불후의 시편을 살짝 맛보는 것만으로도 시성(詩聖)을 대하는 감동이 일어난다.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시리즈 100편의 대장정은, 시로 남은 '다석 복음성가'를 전하는 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끝>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