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이란 무엇인가
이 몸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치정(痴情)으로 생겨났고, 정충 시절부터 다른 정충을 이기려 싸움을 벌이는 진성(瞋性, 눈 부라리며 성내는 것)으로 목숨을 부여받았고, 목숨 받은 뒤에는 한평생 제 입에 무엇인가를 넣어 배를 채우려는 탐심(貪心)으로 살이를 이어왔다. 인간 몸이란 치(痴)와 진(瞋)과 탐(貪)을 원죄처럼 타고난 짐승스러움(獸性) 덩어리이다.
예수도 그렇지만 류영모도 저 탐진치의 몸으로 태어났다. 몸으로 나서 몸으로 살다가 몸으로 가는 길을 겪었다. 우리가 예수의 몸에 대해 경배를 하거나 류영모의 몸에 대해 신성한 우러름을 갖는다면, 그것은 탐진치를 경배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내 몸이 태어난 것은 사변(事變)입니다. 이 사변이 없었으면 우주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변 중에 큰 사변이 인생이 태어난 것입니다."
다석 차남이 귀농의 수신(修身)을 했던 계촌리
2021년 3월 13일, 류영모 탄신 131주년을 하루 앞둔 날 강원도 평창군 계촌2리 해발 700m의 산등성이에 있는 다석묘소를 찾았다. 이곳은 1960년 류영모 차남 류자상이 결혼하면서 자강식(自强植, 스스로를 먹일 푸성귀를 재배함)으로 은거 농경을 시작했던 곳이다. 류영모는 아들의 이런 결단을 크게 반기면서 '하늘의 은혜를 되갚아 올리고, 인간의 속알마음이 하늘에 닿아 다시 내려오는 승은강충(昇恩降忠)'이라고 하였다. 그는 해마다 서울 구기리에서 머나먼 강원도 길을 일흔의 몸으로 달려갔다. 하늘과 닿은 산마루, 아들의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길.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먼 산길을 지치지도 않고 걸어 올랐다. 현재 묘소가 있는 곳 부근, 어느 너럭바위에 앉아 호흡과 명상을 즐기기도 했다.
류영모의 삶과 죽음이 이토록 생생하게 공존하는 자리가 바로, 다석의 묘소다. 오른쪽에는 부친 류명근, 왼쪽에는 아들 류자상 부부의 비석이 저마다 나지막한 높이로 서 있었다. 다석 묘비 옆엔 꽃을 꽂을 수 있는 작은 석제화병이 하나 놓여 있었으나, 흔한 조화(造花) 한 송이도 꽂혀 있지 않았다. 몸이란 대저 이런 것이다.
찬 기운을 돋우는 봄비와 빈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으스스함을 돋웠다. 코로나 시대 어렵사리 묘소를 찾기로 한 조촐한 일행(곽영길 아주경제 회장과 필자, 다석연구회 김성언 총무이사와 정수복 연구회원이 동행)은 류영모·김효정 부부의 비석 부근에서 '아바의 노래'(김성언 총무이사)를 부르고, '참 많은 저녁입니다'라는 시(필자, 이상국 아주경제 논설실장·시인)를 낭송하고, 간결하나마 그를 기리며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관해 생각해보는 대담을 나눴다('아바의 노래'와 '참 많은 저녁입니다' 가창 및 낭송 영상과 현장 대담 영상은 아주TV 유튜브 영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참 많은 저녁입니다
@ 다석 긔림노래 1
붉음도 끄고 푸름도 끄고 밝음도 끄고 어둠도 끄고
눈꺼풀 뒤로 캄캄한 곳으로 캄캄하니 캄캄한 곳으로
먼 곳을 지나 중심을 지나 변경을 지나
눈 먼 사람이 되어 눈 뜬 사람이 되어 먼 눈사람이 되어
눈이란 게 아주 없는 한 톨의 눈길이 되어
님을 찾아가는 길 님을 찾아오는 길
나는 없어지고 나는 더없이 사라지고
너도 나도 없는 길 너도 나도 없어져 하나인 길
길이 길을 찾는 하루저녁 얼 싸안은 길
생각의 불꽃 올려 참으로 참으로 얼싸안은 길
생각의 불꽃 내려 참으로 참으로 얼싸안은 빛
빈탕 속으로 먼지 발자국들 저홀로 걸어감
저홀로 걸어간 발자국 먼지 가라앉는 빈탕
마침내 머리 속에도 마음 속에도 생각 속에도
아무 님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저 캄캄하여
그저 입이 없어 마음이 꿀꺽이는 목젖소리만
참 많은 저녁입니다 참 없는 저녁입니다
캄캄하여 나는 내가 누군지 잃어버렸습니다
환환하여 님은 내가 누군지 잊었을 것입니다
하나도 하나의 하나도 하나의 하나의 하나도
속을 뒤집어 겉이 되는 하나의 숨
겉을 돌아 다시 속을 뒤집는 하나의 꿈
시방 천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꺼풀 뒤에서
회오리치는 어둠 소리치는 적막 속에서
나는 님을 보았습니다 깊고 깊어서
보았다고 할 수도 없는 빛 한 알 빈 한 줌
들었다고 할 수도 없는 뜻 한 점 빈 한 올
푹 꺼진 눈으로 웃는 님을 보았습니다
입 없는 허공이 말하는 님을 들었습니다
천지의 비밀이 새나간 회오리와 회오리
사무치며 울어터지던 운명과 인연의 어긋짐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첫사랑이 숨진 자리
그 캄캄한 뺨을 비추는 눈물의 깨달음
님이 계셔서 님이 오셔서 님이 문득 손을 잡으셔서
참 많은 저녁도 참 많은 어둠도
별빛 한 빛에 모두 환해지며
나너 되고 너나 되는 찰나조차
적어놓지 못했습니다
님이 지난 자리에 잠시 남은 빛의 냉기
어둠을 받아내던 그 희고 여윈 손
나는 아직도 님을 만나러 가는 길일 뿐
길은 아직 멀었습니다 참 많은 저녁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하나가 있다는 소식 혹여 들으셨습니까
사무치는 빈 너울 회오리치는 빈 님
소용돌이 치는 한복판 거기 거기
가려운 등짝 같은 거기거기 닿지 못하여 꼬물꼬물
영원한 하룻밤
가물가물 어둑어둑
참 없어 없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참 있어 있음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없는 줄 있는 줄 어찌할 줄 모르다가
님이 내 품에 안겼는지 그제야 알았습니다
빈섬 이상국의 시 '참 많은 저녁입니다'
1년 6개월 '다석시리즈' 대장정의 대단원
이런 행사를 준비한 배경에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매주 200자 원고지 30장 이상의 글로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시리즈를 해온 아주경제의 기획이 3월 16일로 100회 대단원을 맺는 일에 대한 자축의 의미도 있었다. 장기에 걸친 시리즈로 다석 사후 40년 만에 그를 재조명하는 '다석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 그의 사상이 한국의 현실과 미래를 비출 의미있는 영성적 가치의 표석임을 공감하는 이도 늘어났다. SNS와 유튜브에서 류영모 공부 모임과 사상 강연이 점차 대중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종교인과 지식인들이 신문에서 전개하는 영성가치 시리즈에 공명을 표시하고 관련 인터뷰를 통해 그 류영모의 사상적 지평에 대해 발언하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는 류영모의 '자율신앙'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집단 회합과 행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종교가 허식에 빠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류영모는 삶의 어느 곳, 어느 시각에나 신과 닿아 있는 '얼나'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일행은 상징적이지만, 다석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에서 그 삶과 사상을 논하는 글이 실린 신문들을 펼쳐놓고 한바탕 '연경(硏經) 모임' 같은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류영모가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까. 그 말씀이 무엇이든, 멸망의 생명인 몸나에서 영생의 생명인 얼나로 나아가는 길을 가리켰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은 뜻도 오로지 참사람이 되자는 것일 뿐이다.
류영모가 그리운 까닭은, 왜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죽음이란 우리에게 대체 무엇인가 시원하게 말해줄 그 목소리가 간절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창궐하는 전염병으로 인간의 사이사이가 뿔뿔이 갈리고 흩어지는 시대를 살면서, 집단으로 모여 신을 향해 통성하는 믿음이 과연 어느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 또한 커졌다.
코로나 이후 정신가치 상실 시대, 다석이 그리운 까닭
그는 우선 자기를 들여다보라고 했다. 신을 향하려면 수신(修身)을 제대로 하자고 했다. 창궐하는 욕망들부터 아끼고 줄여, 그 마음을 오롯이 성스러운 데로 향하라고 했다. 아예 상놈의 삶, 거지의 삶을 지향한 '백범(白凡, 가진 것 없고 평범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
어떤 종교든 그 재산 없고 지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고 신의 뜻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종교계에 일어나는 회의와 불신들, 혹은 사회 곳곳에 일어나는 절망과 분노들, 경제가 좋아질수록 더욱 비참한 사람이 생기는 이상한 '발전'들. 이것이 모두 같은 이유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류영모는 통찰했다.
그것은 몸이 시키는 대로 탐진치로 살기 때문이며, 탐진치를 진짜 가치인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제대로 시작하는 것임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과 선함과 아름다움이 인간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신이 원하는 근본의 창세관(創世觀)이라는 것을 놓쳤기 때문이다. 또 저마다 이토록 불행하고 불안하고 불편한 까닭은 스스로 신을 만나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석탄신일을 '다오신날'로 기립니다
그의 탄신일을 '다석 오신 날(줄여서 다오신날)'로 부르면 어떨까 싶다. 다석이 오심으로써 우리에겐 '참'이 왔고, '참의 깨달음'이 왔고, 참으로 사는 삶과 죽음이 왔다고 볼 수 있으니, 모든 것이 오신 날이고, 참 많은(多) 것이 온 날이기도 하다. 또 다오신날은 대충 오고만 날이 아니라 제대로 다 오신 날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못미더워하는 날이 아니라, 얼나로 그 관계가 온전하게 다 이뤄진 날이다.
그리고, '다오심'은 '답다'에서 나온 우리말로 '그 격에 어울리며, 그 자리에 걸맞다'는 뜻도 된다. 다오신날은, 사람이 사람다우신 날이고 하느님이 하느님다우신 날이며 사람과 하느님이 사람과 하느님다우신 날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인간의 인간됨과 공평의 세상을 아름답게 아우르는 말인 셈이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