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 4일 (음력 섣달 그믐날) 금요일 오후였다.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주중대사관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필자는 중국 설인 춘제(春節) 일주일간 연휴에 모처럼 장기 휴가를 떠났다. 베이징에서 손수 운전해서 허난(河南)성 성도 정저우(鄭州)까지 이어지는 107번 국도를 따라 남행했다.
허베이(河北)성 성도 스좌좡(石家莊)을 지나 잠시도 쉬지 않고 6시간 이상을 달려 내려가자 허베이성 최남단의 한단(邯鄲) 근교에 들어섰다. 총주행거리 15만㎞가 넘은 한국산 자동차 엔진이 이제 제발 좀 쉬었다 가자며 보채기 시작한다. 머릿속까지 심하게 윙윙거리며 아프다. 한단 시내에 못 미친 5㎞쯤, 국도 동쪽으로 제법 큰 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샛길로 들어섰다.
‘아!’ 그 순간 어떤 풍경 하나가 시야로 들어왔다. 필자의 가슴팍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사당 입구에 걸린 편액 '황량몽·여선사(黃梁夢呂仙祀)'. 실제 가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한단지몽(邯鄲之夢)(1)* 이야기의 성지를 생시에 밟게 되었다.
『장자』에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고사가 나온다. 전국시대 한단은 조 나라 수도였다. 시골 사람이 멋들어진 서울, 한단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다 결국 자기 걸음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이야기 한 우화다
한단 시내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한단 시내 동남부의 한산구(邯山區) 조 나라 한단고성(邯鄲古城)을 구경했다.
여행 가이드가 한단고성은 '초한지'에도 나오는 진 나라 명장 장한(章邯, ?~기원전 205년)이 파괴했다고 한다.
그 순간 필자의 뇌리에는 아주 큰 의문 부호 하나가 떠올랐다.
◆ '邯'鄲은 '한'단이라 읽는데···姜'邯'贊은 왜 강'감'찬이라 읽을까
한단의 '邯’은 '한'이라고 읽고 한단성을 파괴한 장군의 이름도 '장한(章邯)'이라 읽는다. 그런데 어째서 이순신 을지문덕과 더불어 한국사의 3대 영웅이자 필자의 조상인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邯’은 ‘한’으로 읽지 않고 ‘감’으로 읽는가?
누구라도 그러하듯 우리네 일상에서 좀 더 들춰보면 뭔가 끔찍한 게 나타날까봐 두려워 그냥 생각을 멈추고 지나가는 게 꽤 있다. '강감찬' 장군의 성함도 그중 하나다.
‘樂’을 ‘악’·‘락’·‘요’로 읽듯, 두 가지 이상으로 발음되는 글자 즉 ‘다음자(多音字)’겠지..,그냥 넘어갔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 탄환같이 흘렀다. 작년 8월 아주경제에 '신아방강역고>' 칼럼을 연재하면서 유독 일제와 그 후예 식민사관의 ‘고려’에 대한 은폐와 왜곡이 상상 그 이상임을 깨달았다. 저들은 고려 시대 대표 위인 '강감찬' 장군조차 가만히 두지 않았다.
‘강감찬’ 장군 성함과 관련 국내의 온· 오프라인 자료와 한국사학회의 태도를 살펴보자
1) 일제 강점기 이전의 한글 문서에도 강감찬으로 나온다. 『강감찬전(姜邯贊傳)』은 1908년 우기선(禹基善)이 지은 강감찬 전기인데 ‘일한주식회사(日韓株式會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강감찬은 ‘강한찬’을 잘못 읽은 것이라는 논쟁과 관련해 한국사학회는 “그동안 입에 굳은 대로 강감찬으로 가자”고 결론을 내렸다. 邯의 음은 오직 '강감찬'에서만 '감'이고 그 외에는 '한'이다 -< 네이버 백과>
3)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감찬'이라고 읽는 것이 일본어의 잔재라는 주장은 낭설이다. 그냥 흔히 알려진 대로 '강감찬'이라고 읽으면 된다. 우선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글 문서에도 엄연히 강감찬으로 나온다. 따라서 일제 때문에 강감찬이라고 불린다는 말은 근거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나무위키>
◆입에 굳은대로 강감찬으로 가자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필자는 결론부터 말하지 않겠다. 과연 그럴까. 조목조목 짚어보겠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는 ‘邯’이라는 한자가 모두 1413회 나온다.
邯의 음은 오직 ‘강감찬’에서만 ‘감’ 으로 713회 표기, 나머지 모든 인명·지명·관직명 등 690회는 ‘한’으로 표기해놓고 있다.
1) 『삼국사기』에는 ‘邯을 ‘한’으로 표기한 국편위의 국역이 113회(원문22회) 나온다.
‘감’표기는 0회다.
244년 1월(음) 석우로를 서불한(舒弗邯)에 임명하다
248년 1월(음) 장훤을 서불한에 임명하다
249년 4월(음) 서불한 석우로가 왜에게 죽임을 당하다
263년 1월(음)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다
285년 2월(음) 홍권을 서불한에 임명하다
295년 백제와 함께 왜를 공격하려다 서불한이 만류하다
310년 6월(음) 서불한 우로의 아들 흘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403년 1월(음)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다
408년 2월(음) 대마도의 왜인 군영을 정벌하려다 서불한이 만류하여 그만두다
433년 5월(음) 미사흔을 서불한으로 추증하다
461년 2월(음)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삼다
479년 2월(음) 서불한의 외손자 소지마립간이 즉위하다
637년 1월(음)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삼다
679년 1월(음)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삼다
681년 8월(음) 서불한 진복을 상대등으로 제수하다
743년 4월(음) 서불한 김의충을 딸을 왕비로 삼다
765년 6월(음) 서불한 김의충의 외손자 혜공왕이 왕위에 오르다
857년 9월(음) 서불한 의정의 증손자 문성왕이 조서를 남기다
898년 1월(음) 서불한 준흥을 상대등으로, 계강을 시중으로 삼다
서불한은 무엇인가? 국편위는 원문 모든 기사 하나하나에 "서불한(舒弗邯)은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일 높은 이벌찬(伊伐湌)의 이칭"이라고 친절한 주석을 달았다.
648년 겨울 한질허(邯帙許)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5권 진덕왕 2년
한질허는 누구인가? 국편위는 이에 대해서도 "한질허(邯帙許): 진골(眞骨) 출신으로 진덕왕 원년(648)에 당나라에 조공사(朝貢使)로 파견되었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2)*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2) 『삼국유사』에는 邯을 ‘한’으로 표기한 국사편찬위원회의 국역이 12회 나온다. ‘감’ 표기는 0회다.
이중 『삼국유사』 맨 처음 기사 제1권 제1 기이 신라 시조 혁거세왕을 예로 들어보겠다.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며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리다 혁거세왕은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 국사편찬위원회 국역
어디 이뿐인가? 한국의 거의 모든 서적은 강감찬을 제외한 邯의 인명에도 ‘한’이라고 적고 있다. 앞서 조나라의 한단성을 파괴한 진나라의 장한(章邯 ?-기원전 225년)과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저명한 서예가 한단순 (邯鄲淳, 132년 ~ ?)도 ‘한’으로 적고 있다.
◆'邯'의 음은 오직 '강감찬'에서만 '감'이고 나머지는 '한'이라니
국어사전·한자사전·한중사전·중한사전·옥편·자전·중국인명사전·백과사전 등 50권의 국내 모든 사전을 전수분석했다.
邯의 독음은 'hán'·'한'으로만 표기돼 있다. 'gam'·'감' 표기는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2000년 한국 문화관광부가 펴낸 邯의 한글 표기법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 han, ham, 매큔 - 라이 샤워 표기법 : han, ham 예일 식 : han, ham"이라고 적고 있다.
국내 가짜 텍스트는 『강희자전」에도 감gam 또는 간gan으로도 나온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说文解字설문해자』부터 『玉篇옥편』·『字汇자회』·『康熙字典강희자전』·『中华大字典중화대사전』·『新华字典신화자전』·『汉语大词典한어대사전 』과 오늘날 중국 최대 포털 바이두의 전자판 중문대자전까지 중국의 모든 자전·중영사전·영중사전 등 중국 출판 사전류 50종을 전수분석해 보았다. 邯은 'hán' 으로만 독음표기 돼있다.
심지어 홍콩에서 발행된 방언사전 『광동화보통화서전·广东话普通话词典 』에도 邯은 'hon'으로 발음된다. 예나 지금이나 표준중국어나 방언중어에는 ‘gam’이란 발음 자체가 없다.
다만 일본의 온·오프라인 사전에서는 邯은 gan(ガン, 오음) 또는 kan(カン, 한음)으로 적혀있다.(3)*
◆강한찬 장군은 한국사의 황금시대를 연 구국 영웅
1018년 '강한찬' 장군은 당시 송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던 11세기 세계 최강국(당시 유럽은 암흑시대) 요 나라 소배압 10만 대군을 몰살시켰다. 강한찬 장군의 귀주 대첩 이후 고려는 금 나라가 요 나라를 멸하는 1125년까지 세계 최고의 선진강국으로 천하를 군림했다. 이때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다.
이런 의미에서 강한찬 장군은 구국의 영웅 이상으로,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일대 위인이다.
강한찬 장군과 위대한 업적은 『고려사』 뿐만 아니라 『요사』·『송사』·『금사』·『원사』·『명사』 등 역대 중국의 정사에도 명기돼 있다.
강한찬 장군 관련 국내 기존 대다수 텍스트와 위인전에는 전설이나 설화로 취급된 대목은 『고금도서집성』·『사고전서』등 중국의 정사에 명기돼 있다.
“어떤 사신이 밤중에 시흥군(始興郡)으로 들어오다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관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사신이 기이하게 여기고는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길렀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강한찬(姜邯贊)이었다.”라고 한다. 재상으로 있을 때 송(宋)에서 온 사신이 그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보이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금도서집성』 「조선부휘고朝鮮部彙考」
◆일제는 왜 강한찬 장군의 성함을 '감'으로 날조했을까?
일제는 왜 강한찬 장군의 성함까지 '감'으로 날조했을까? 한 마디로 일본의 고려에 대한 열등감 폭발이다.
11세기 중국은 고려를 황제국으로 예우한 반면, 중국은 대체로 일본을 나라도 아닌 고려의 부속지역으로 난쟁이 해적 소굴로 취급했다. 중국은 일본을 ‘왜’나 ‘왜국’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종놈나라(奴国), 개종놈나라(狗奴国), 왜종놈(倭奴), 왜오랑캐(倭夷)로 불렀다.( 『양서梁書」)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했는데, 동쪽 끝에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今則臣屬高麗也).- 『사고전서』 「도화견문지图画见闻志」(4)*
심지어 일본 스스로 자국을 종놈나라(奴国(なこく)로 자칭했던 일본의 흑역사 중의 흑역사였다.(5)*
◆창씨개명보다 악랄한 일제의 창지개명·창사개명·창인개명
흔히들 일본 제국주의 종말기인 1940년대 한국인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창씨개명(創氏改名)만 기억하고 있다. 그보다 더 악랄하고 근본적인 창지개명(創地改名), 창사개명(創史改名), 창인개명(創人改名)을 잊어버렸다.
창지개명:
1908년 일제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후렴으로 반복되는 <애국가>를 유포시켜 한국인의 고유 영토관 남북 4천리를 3천리로 축소 조작했다.
1910년 일제는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한국의 대외국호 ‘COREA’를 ‘KOREA’로 개명했다.
1911~1914년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과 행정구획 개편을 빌미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개시했다. 백악을 북악으로,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목멱산을 남산으로,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흥인지문을 동대문으로 개명하는 것을 비롯해 한반도의 모든 지명을 제멋대로 바꿔 불렀다.(6)*
창사개명: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조약일 명치 칙령 318호는 대한제국(1897년10월12일~1901년8월28일)의 말소를 명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한국사의 왜곡과 원활한 식민통치 수행을 위해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식민사관에 입각한 한국사를 조작했다.
통일후의 신라시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창사개명해 한반도를 평양과 원산 이남으로 3분의 2로 축소조작했다.
특히 고려사에서 그들의 열등감이 폭발했다. 이병도·최남선 등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고려사 왜곡 은폐작업에 착수했다. 고구려는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420년경 '고려'로 국호를 개명했는데도 계속 고구려로 표기하고 후삼국 시대 후고려를 후고구려로 창사개명했다.(7)*
고려전기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과 공주강외’를 ‘차령이남 공주이남’으로 조작하고, 왕건 황제를 지역차별이나 하는 풍수쟁이로 왜곡했다. 고려 중기는 무신 시대의 암흑상을 부각하고, 고려 후기는 원나라의 복속 상황을 침소봉대 왜곡 조작했다.
그러나 일제는 황제국 고려의 찬란한 빛을 가릴 수 없었다. 자국이 고려를 상국으로 모시고 수십회나 조공을 바치고 717회나 침략한 왜구의 흑역사를 모두 조작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고려역사를 서술한 조선3대 관찬사서를 철저히 '블라인드 처리'하는 프레임을 짰다. 내선일체·일선동조론을 날조해내고, 이는 박정희·전두환 시대때 『환단고기』류로 표출돼 황금의 고려 475년 사실을 허환(虛幻)소설화하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
창인개명:
창지개명과 창사개명으로도 모자랐던 일제는 창인개명까지 자행했다. 이를테면 『삼국사기』· 『고려사』·『삼국유사』 등 한국 대표 사서엔 선덕왕·진덕왕·진성왕 뿐이다. 그런데 일제는 ‘女’자를 넣어 선덕여왕·진덕여왕·진성여왕으로 날조했다. 이는 일본의 뿌리 깊은 여성차별과 간교하고 은밀한 한국사 조작과 모멸의 실례다.(8)*
더욱이 한국사 최고의 황금시대를 연 강한찬 장군을 그냥 가만히 두지 않았다. 성함 가운데 邯의 한을 일본식 발음 gan과 비슷한 ‘감’으로 ‘창인개명’했다. 1908년 조선통감부 산하 일한주식회사에서 강한찬을 강감찬으로 날조한 『강감찬전 姜邯贊傳』 을 펴냈다. 1913년 조선총독부 산하 출판사 조선서관(朝鮮書館)에서 『고려강시중전』을 펴내며 다시 ‘강감찬’ 장군으로 조작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강감찬’으로 부르는 너무도 부끄러운 우행을 범하고 있다.
◆당장 강한찬 장군으로 바로 잡아라
Karl Marx도 칼 맑스가 아닌 마르크스(マークス)로 발음하는 이유는?
니체의 대표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짜라투스트라를 차라투스트라로 표기하는 이유는?
니체의 대표작 『Also sprach Zarathustra』의 국내 번역본 책제목 절대 다수 (무려 360권)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된 까닭은 뭘까?
답은 아주 간단한다. Z도 발음 못하는 일본인 번역책 『ツァラトゥストラはこう語った』 무뇌증으로 제목까지 통째로 재탕 번역하다 보니 그런 것이다. '강한찬'이 아닌 '강감찬'인 이유는? 답은 똑같다. 1895년 이후 현재까지 대일본제국과 그 후예들이 그렇게 말하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한단지보’는 못난 사람이 잘난 사람 흉내내는 걸 풍자한 사자성어다. 그런데 한을 감으로 읽는 건 최우수민족 한국인이 열등민족 일본인을 추종하고 스스로를 모독하는 거나 마찬가지 기가 막히고 딱하고 한심한 종일매국 '한심종일(寒心從日)'이라 할까?
가짜 뉴스보다 100배 나쁜 것은 가짜 텍스트다. 일제보다 10배 더 나쁜 자는 옛 친일파다. 옛 친일파보다 100배 더 나쁜 자는 현생 종일매국 언관학 현행범이다.
특히 을지문덕 이순신과 더불어 한국사 구국 3대 영웅이자 한국사 최고의 황금시대를 연 위인을 ‘강감찬’으로 오독 모독하는 것은 자기 선조 모독 패륜범죄이다.
더구나 ‘강한찬’을 잘못 읽은 것이라는 논쟁을 한국사학회에서 “그동안 입에 굳은 대로 강감찬으로 가자”고 결론 내리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대역범죄이다. 관계 당국은 우리 한민족이 역사와 진실 앞에 더 죄를 짓지 말게 하지 말라. 당장 ‘강한찬’ 장군으로 바로 모셔라!
◆◇◆◇◆◇◆◇주석
(1)*당 나라 시절, 노생이라는 소년이 한단((邯鄲)지방의 객사에서 도사 여옹의 베개를 빌려 잠깐 잠을 잤다. 꿈속에서 그는 명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출세하고 재상까지 지내는 등 80년간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눈을 뜨자 여전히 자기는 도사의 베개를 베고 곁에는 도사가 앉아 있으며, 자기 전에 끓던 황량(메조) 아직도 끓고 있었다. 지금도 중국에서 이 한단지몽(邯鄲之夢)즉 황량몽(黃梁夢)은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견될 만큼 널리 알려졌다.
(2)*한질허(邯帙許)의 한(邯)은 성(姓)이다. 한邯씨는 중국에 희귀성씨로 베이징 근교에 1000여명 집성촌이 있는데, 흉노족의 후손으로 적고 있다.
(3)*章邯(しょう かん、拼音: Zhāng Hán、? - 紀元前205年)は、秦の将軍。雍王。三秦の一人。弟に章平がいる。
(4)*倭國乃日本國也,本名倭,既耻其名,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今則臣屬高麗也.
(5)*日本史においては、古くは中国史書『漢書』にあらわれる奴国(なこく)などがある。
(6)*중국 역사마저 하상주(夏·商·周)를 하은주(夏·殷·周)로 서한과 동한을 전한과 후한으로, 장강을 장강의 일부 양자강으로, 창지개명과 창사개명을 자행했다.
(7)*태조· 정종·태종부터 세종대왕을 '총편집장'로 당대 최고의 두뇌집단이 60년 걸려 편찬한 [고려사](지방문화재로 처박고 있음)엔 '후고구려'라고 하지 않고 '후고려'라 명기돼 있다.
(8)*역대 일왕에는 몇몇 여성이 있으나 女를 붙이지 않고 칭호한다.
허베이(河北)성 성도 스좌좡(石家莊)을 지나 잠시도 쉬지 않고 6시간 이상을 달려 내려가자 허베이성 최남단의 한단(邯鄲) 근교에 들어섰다. 총주행거리 15만㎞가 넘은 한국산 자동차 엔진이 이제 제발 좀 쉬었다 가자며 보채기 시작한다. 머릿속까지 심하게 윙윙거리며 아프다. 한단 시내에 못 미친 5㎞쯤, 국도 동쪽으로 제법 큰 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샛길로 들어섰다.
‘아!’ 그 순간 어떤 풍경 하나가 시야로 들어왔다. 필자의 가슴팍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사당 입구에 걸린 편액 '황량몽·여선사(黃梁夢呂仙祀)'. 실제 가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한단지몽(邯鄲之夢)(1)* 이야기의 성지를 생시에 밟게 되었다.
한단 시내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한단 시내 동남부의 한산구(邯山區) 조 나라 한단고성(邯鄲古城)을 구경했다.
여행 가이드가 한단고성은 '초한지'에도 나오는 진 나라 명장 장한(章邯, ?~기원전 205년)이 파괴했다고 한다.
그 순간 필자의 뇌리에는 아주 큰 의문 부호 하나가 떠올랐다.
◆ '邯'鄲은 '한'단이라 읽는데···姜'邯'贊은 왜 강'감'찬이라 읽을까
누구라도 그러하듯 우리네 일상에서 좀 더 들춰보면 뭔가 끔찍한 게 나타날까봐 두려워 그냥 생각을 멈추고 지나가는 게 꽤 있다. '강감찬' 장군의 성함도 그중 하나다.
‘樂’을 ‘악’·‘락’·‘요’로 읽듯, 두 가지 이상으로 발음되는 글자 즉 ‘다음자(多音字)’겠지..,그냥 넘어갔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 탄환같이 흘렀다. 작년 8월 아주경제에 '신아방강역고>' 칼럼을 연재하면서 유독 일제와 그 후예 식민사관의 ‘고려’에 대한 은폐와 왜곡이 상상 그 이상임을 깨달았다. 저들은 고려 시대 대표 위인 '강감찬' 장군조차 가만히 두지 않았다.
‘강감찬’ 장군 성함과 관련 국내의 온· 오프라인 자료와 한국사학회의 태도를 살펴보자
1) 일제 강점기 이전의 한글 문서에도 강감찬으로 나온다. 『강감찬전(姜邯贊傳)』은 1908년 우기선(禹基善)이 지은 강감찬 전기인데 ‘일한주식회사(日韓株式會社)’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강감찬은 ‘강한찬’을 잘못 읽은 것이라는 논쟁과 관련해 한국사학회는 “그동안 입에 굳은 대로 강감찬으로 가자”고 결론을 내렸다. 邯의 음은 오직 '강감찬'에서만 '감'이고 그 외에는 '한'이다 -< 네이버 백과>
3)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감찬'이라고 읽는 것이 일본어의 잔재라는 주장은 낭설이다. 그냥 흔히 알려진 대로 '강감찬'이라고 읽으면 된다. 우선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글 문서에도 엄연히 강감찬으로 나온다. 따라서 일제 때문에 강감찬이라고 불린다는 말은 근거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나무위키>
◆입에 굳은대로 강감찬으로 가자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필자는 결론부터 말하지 않겠다. 과연 그럴까. 조목조목 짚어보겠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는 ‘邯’이라는 한자가 모두 1413회 나온다.
邯의 음은 오직 ‘강감찬’에서만 ‘감’ 으로 713회 표기, 나머지 모든 인명·지명·관직명 등 690회는 ‘한’으로 표기해놓고 있다.
1) 『삼국사기』에는 ‘邯을 ‘한’으로 표기한 국편위의 국역이 113회(원문22회) 나온다.
‘감’표기는 0회다.
244년 1월(음) 석우로를 서불한(舒弗邯)에 임명하다
248년 1월(음) 장훤을 서불한에 임명하다
249년 4월(음) 서불한 석우로가 왜에게 죽임을 당하다
263년 1월(음)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다
285년 2월(음) 홍권을 서불한에 임명하다
295년 백제와 함께 왜를 공격하려다 서불한이 만류하다
310년 6월(음) 서불한 우로의 아들 흘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403년 1월(음)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다
408년 2월(음) 대마도의 왜인 군영을 정벌하려다 서불한이 만류하여 그만두다
433년 5월(음) 미사흔을 서불한으로 추증하다
461년 2월(음)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삼다
479년 2월(음) 서불한의 외손자 소지마립간이 즉위하다
637년 1월(음)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삼다
679년 1월(음)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삼다
681년 8월(음) 서불한 진복을 상대등으로 제수하다
743년 4월(음) 서불한 김의충을 딸을 왕비로 삼다
765년 6월(음) 서불한 김의충의 외손자 혜공왕이 왕위에 오르다
857년 9월(음) 서불한 의정의 증손자 문성왕이 조서를 남기다
898년 1월(음) 서불한 준흥을 상대등으로, 계강을 시중으로 삼다
서불한은 무엇인가? 국편위는 원문 모든 기사 하나하나에 "서불한(舒弗邯)은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일 높은 이벌찬(伊伐湌)의 이칭"이라고 친절한 주석을 달았다.
648년 겨울 한질허(邯帙許)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5권 진덕왕 2년
한질허는 누구인가? 국편위는 이에 대해서도 "한질허(邯帙許): 진골(眞骨) 출신으로 진덕왕 원년(648)에 당나라에 조공사(朝貢使)로 파견되었다.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2)*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2) 『삼국유사』에는 邯을 ‘한’으로 표기한 국사편찬위원회의 국역이 12회 나온다. ‘감’ 표기는 0회다.
이중 『삼국유사』 맨 처음 기사 제1권 제1 기이 신라 시조 혁거세왕을 예로 들어보겠다.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며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리다 혁거세왕은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 국사편찬위원회 국역
어디 이뿐인가? 한국의 거의 모든 서적은 강감찬을 제외한 邯의 인명에도 ‘한’이라고 적고 있다. 앞서 조나라의 한단성을 파괴한 진나라의 장한(章邯 ?-기원전 225년)과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저명한 서예가 한단순 (邯鄲淳, 132년 ~ ?)도 ‘한’으로 적고 있다.
◆'邯'의 음은 오직 '강감찬'에서만 '감'이고 나머지는 '한'이라니
국어사전·한자사전·한중사전·중한사전·옥편·자전·중국인명사전·백과사전 등 50권의 국내 모든 사전을 전수분석했다.
邯의 독음은 'hán'·'한'으로만 표기돼 있다. 'gam'·'감' 표기는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2000년 한국 문화관광부가 펴낸 邯의 한글 표기법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 han, ham, 매큔 - 라이 샤워 표기법 : han, ham 예일 식 : han, ham"이라고 적고 있다.
국내 가짜 텍스트는 『강희자전」에도 감gam 또는 간gan으로도 나온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说文解字설문해자』부터 『玉篇옥편』·『字汇자회』·『康熙字典강희자전』·『中华大字典중화대사전』·『新华字典신화자전』·『汉语大词典한어대사전 』과 오늘날 중국 최대 포털 바이두의 전자판 중문대자전까지 중국의 모든 자전·중영사전·영중사전 등 중국 출판 사전류 50종을 전수분석해 보았다. 邯은 'hán' 으로만 독음표기 돼있다.
심지어 홍콩에서 발행된 방언사전 『광동화보통화서전·广东话普通话词典 』에도 邯은 'hon'으로 발음된다. 예나 지금이나 표준중국어나 방언중어에는 ‘gam’이란 발음 자체가 없다.
다만 일본의 온·오프라인 사전에서는 邯은 gan(ガン, 오음) 또는 kan(カン, 한음)으로 적혀있다.(3)*
◆강한찬 장군은 한국사의 황금시대를 연 구국 영웅
1018년 '강한찬' 장군은 당시 송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던 11세기 세계 최강국(당시 유럽은 암흑시대) 요 나라 소배압 10만 대군을 몰살시켰다. 강한찬 장군의 귀주 대첩 이후 고려는 금 나라가 요 나라를 멸하는 1125년까지 세계 최고의 선진강국으로 천하를 군림했다. 이때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다.
이런 의미에서 강한찬 장군은 구국의 영웅 이상으로,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일대 위인이다.
강한찬 장군과 위대한 업적은 『고려사』 뿐만 아니라 『요사』·『송사』·『금사』·『원사』·『명사』 등 역대 중국의 정사에도 명기돼 있다.
강한찬 장군 관련 국내 기존 대다수 텍스트와 위인전에는 전설이나 설화로 취급된 대목은 『고금도서집성』·『사고전서』등 중국의 정사에 명기돼 있다.
“어떤 사신이 밤중에 시흥군(始興郡)으로 들어오다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관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사신이 기이하게 여기고는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길렀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강한찬(姜邯贊)이었다.”라고 한다. 재상으로 있을 때 송(宋)에서 온 사신이 그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절을 올리며 말하기를, “문곡성(文曲星)이 보이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금도서집성』 「조선부휘고朝鮮部彙考」
◆일제는 왜 강한찬 장군의 성함을 '감'으로 날조했을까?
11세기 중국은 고려를 황제국으로 예우한 반면, 중국은 대체로 일본을 나라도 아닌 고려의 부속지역으로 난쟁이 해적 소굴로 취급했다. 중국은 일본을 ‘왜’나 ‘왜국’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종놈나라(奴国), 개종놈나라(狗奴国), 왜종놈(倭奴), 왜오랑캐(倭夷)로 불렀다.( 『양서梁書」)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했는데, 동쪽 끝에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今則臣屬高麗也).- 『사고전서』 「도화견문지图画见闻志」(4)*
심지어 일본 스스로 자국을 종놈나라(奴国(なこく)로 자칭했던 일본의 흑역사 중의 흑역사였다.(5)*
◆창씨개명보다 악랄한 일제의 창지개명·창사개명·창인개명
흔히들 일본 제국주의 종말기인 1940년대 한국인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창씨개명(創氏改名)만 기억하고 있다. 그보다 더 악랄하고 근본적인 창지개명(創地改名), 창사개명(創史改名), 창인개명(創人改名)을 잊어버렸다.
창지개명:
1908년 일제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후렴으로 반복되는 <애국가>를 유포시켜 한국인의 고유 영토관 남북 4천리를 3천리로 축소 조작했다.
1910년 일제는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한국의 대외국호 ‘COREA’를 ‘KOREA’로 개명했다.
1911~1914년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과 행정구획 개편을 빌미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개시했다. 백악을 북악으로, 삼각산을 북한산으로, 목멱산을 남산으로,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흥인지문을 동대문으로 개명하는 것을 비롯해 한반도의 모든 지명을 제멋대로 바꿔 불렀다.(6)*
창사개명: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조약일 명치 칙령 318호는 대한제국(1897년10월12일~1901년8월28일)의 말소를 명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한국사의 왜곡과 원활한 식민통치 수행을 위해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식민사관에 입각한 한국사를 조작했다.
통일후의 신라시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창사개명해 한반도를 평양과 원산 이남으로 3분의 2로 축소조작했다.
특히 고려사에서 그들의 열등감이 폭발했다. 이병도·최남선 등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고려사 왜곡 은폐작업에 착수했다. 고구려는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420년경 '고려'로 국호를 개명했는데도 계속 고구려로 표기하고 후삼국 시대 후고려를 후고구려로 창사개명했다.(7)*
고려전기는 훈요십조의 ‘차현이남과 공주강외’를 ‘차령이남 공주이남’으로 조작하고, 왕건 황제를 지역차별이나 하는 풍수쟁이로 왜곡했다. 고려 중기는 무신 시대의 암흑상을 부각하고, 고려 후기는 원나라의 복속 상황을 침소봉대 왜곡 조작했다.
그러나 일제는 황제국 고려의 찬란한 빛을 가릴 수 없었다. 자국이 고려를 상국으로 모시고 수십회나 조공을 바치고 717회나 침략한 왜구의 흑역사를 모두 조작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 고려역사를 서술한 조선3대 관찬사서를 철저히 '블라인드 처리'하는 프레임을 짰다. 내선일체·일선동조론을 날조해내고, 이는 박정희·전두환 시대때 『환단고기』류로 표출돼 황금의 고려 475년 사실을 허환(虛幻)소설화하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
창인개명:
창지개명과 창사개명으로도 모자랐던 일제는 창인개명까지 자행했다. 이를테면 『삼국사기』· 『고려사』·『삼국유사』 등 한국 대표 사서엔 선덕왕·진덕왕·진성왕 뿐이다. 그런데 일제는 ‘女’자를 넣어 선덕여왕·진덕여왕·진성여왕으로 날조했다. 이는 일본의 뿌리 깊은 여성차별과 간교하고 은밀한 한국사 조작과 모멸의 실례다.(8)*
더욱이 한국사 최고의 황금시대를 연 강한찬 장군을 그냥 가만히 두지 않았다. 성함 가운데 邯의 한을 일본식 발음 gan과 비슷한 ‘감’으로 ‘창인개명’했다. 1908년 조선통감부 산하 일한주식회사에서 강한찬을 강감찬으로 날조한 『강감찬전 姜邯贊傳』 을 펴냈다. 1913년 조선총독부 산하 출판사 조선서관(朝鮮書館)에서 『고려강시중전』을 펴내며 다시 ‘강감찬’ 장군으로 조작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우리는 ‘강감찬’으로 부르는 너무도 부끄러운 우행을 범하고 있다.
◆당장 강한찬 장군으로 바로 잡아라
Karl Marx도 칼 맑스가 아닌 마르크스(マークス)로 발음하는 이유는?
니체의 대표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짜라투스트라를 차라투스트라로 표기하는 이유는?
니체의 대표작 『Also sprach Zarathustra』의 국내 번역본 책제목 절대 다수 (무려 360권)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된 까닭은 뭘까?
답은 아주 간단한다. Z도 발음 못하는 일본인 번역책 『ツァラトゥストラはこう語った』 무뇌증으로 제목까지 통째로 재탕 번역하다 보니 그런 것이다. '강한찬'이 아닌 '강감찬'인 이유는? 답은 똑같다. 1895년 이후 현재까지 대일본제국과 그 후예들이 그렇게 말하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한단지보’는 못난 사람이 잘난 사람 흉내내는 걸 풍자한 사자성어다. 그런데 한을 감으로 읽는 건 최우수민족 한국인이 열등민족 일본인을 추종하고 스스로를 모독하는 거나 마찬가지 기가 막히고 딱하고 한심한 종일매국 '한심종일(寒心從日)'이라 할까?
가짜 뉴스보다 100배 나쁜 것은 가짜 텍스트다. 일제보다 10배 더 나쁜 자는 옛 친일파다. 옛 친일파보다 100배 더 나쁜 자는 현생 종일매국 언관학 현행범이다.
특히 을지문덕 이순신과 더불어 한국사 구국 3대 영웅이자 한국사 최고의 황금시대를 연 위인을 ‘강감찬’으로 오독 모독하는 것은 자기 선조 모독 패륜범죄이다.
더구나 ‘강한찬’을 잘못 읽은 것이라는 논쟁을 한국사학회에서 “그동안 입에 굳은 대로 강감찬으로 가자”고 결론 내리는 것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대역범죄이다. 관계 당국은 우리 한민족이 역사와 진실 앞에 더 죄를 짓지 말게 하지 말라. 당장 ‘강한찬’ 장군으로 바로 모셔라!
◆◇◆◇◆◇◆◇주석
(1)*당 나라 시절, 노생이라는 소년이 한단((邯鄲)지방의 객사에서 도사 여옹의 베개를 빌려 잠깐 잠을 잤다. 꿈속에서 그는 명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출세하고 재상까지 지내는 등 80년간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눈을 뜨자 여전히 자기는 도사의 베개를 베고 곁에는 도사가 앉아 있으며, 자기 전에 끓던 황량(메조) 아직도 끓고 있었다. 지금도 중국에서 이 한단지몽(邯鄲之夢)즉 황량몽(黃梁夢)은 도연명의 무릉도원에 비견될 만큼 널리 알려졌다.
(2)*한질허(邯帙許)의 한(邯)은 성(姓)이다. 한邯씨는 중국에 희귀성씨로 베이징 근교에 1000여명 집성촌이 있는데, 흉노족의 후손으로 적고 있다.
(3)*章邯(しょう かん、拼音: Zhāng Hán、? - 紀元前205年)は、秦の将軍。雍王。三秦の一人。弟に章平がいる。
(4)*倭國乃日本國也,本名倭,既耻其名,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今則臣屬高麗也.
(5)*日本史においては、古くは中国史書『漢書』にあらわれる奴国(なこく)などがある。
(6)*중국 역사마저 하상주(夏·商·周)를 하은주(夏·殷·周)로 서한과 동한을 전한과 후한으로, 장강을 장강의 일부 양자강으로, 창지개명과 창사개명을 자행했다.
(7)*태조· 정종·태종부터 세종대왕을 '총편집장'로 당대 최고의 두뇌집단이 60년 걸려 편찬한 [고려사](지방문화재로 처박고 있음)엔 '후고구려'라고 하지 않고 '후고려'라 명기돼 있다.
(8)*역대 일왕에는 몇몇 여성이 있으나 女를 붙이지 않고 칭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