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방강역고-24] 기승전결 왜곡조작 끝판왕 일본의 왜구와 원구

2021-02-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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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7할은 한국인 중국인

한반도와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은 여몽연합군(원구)에 대한 복수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왜구’는 광개토대왕이 제일 먼저 사용

왜구(倭寇)라는 단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414년)비문 ‘倭,寇OO지명’에서 유래했다.

399년 왜(倭)가 신라를 공격하여 금성(경주)을 침략했다. 신라는 광개토대왕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광개토왕은 400년 신라에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이때 왜군은 금관가야 종발성(부산 동래구정)까지 퇴각하였고, 고구려군은 금관가야 지역까지 쫓아가 왜군을 격퇴시켰다. 고구려는 낙동강 하류의 동쪽 지역인 종발성에 신라인을 관리자로 배치하고 성을 지키게 했다. 고구려군은 백여 년 동안 신라 땅에 머물려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신라는 고구려에게 조공하는 보호국이 되었고 제후국인 신라로 하여금 더는 왜가 발호하지 않게 조치했다.

한·중 양국에 왜구는 일본 침략자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됐다. 16세기 이후 임진왜란과 20세기 중·일 전쟁에서 한·중 양국 국민은 일본침략군을 왜구 또는 일구(日寇)라고 불렀다.

왜구의 주된 약탈물은 식량이었으며 지방에서 조세를 거두어 개성과 한양으로 올라가는 공선 등이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그 규모는 100척에서 500척까지 이르는 선단을 이루어 연안 마을을 습격하는 형태였으나, 때로는 내륙 깊숙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1223년부터 1392년까지 169년간 총 529차례 침입이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왜구침구 기사가 312건이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왜구에 대한 일본 특유의 왜곡조작 기승전결(起承轉結): 무중생유-본말전도-침소봉대-적반하장의 극명한 전개과정이다.

1. 기(起 무중생유) : 왜구의 7할은 고려천민과 중국해적
무중생유(無中生有) :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거짓으로 사람을 만든다

'왜곡의 달인' 일본의 기승전결은 왜구의 구성성분, 즉 사람에 대한 왜곡부터 시작한다. 다음은 왜구에 대한 후쇼사(扶桑社)비롯 일본 중학교 교과서들의 왜구에 대한 정의다.

“왜구는 13세기 후반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 출몰한 해적 집단으로 고려인도 많이 포함되었다. 16세기 중반 다시 왜구가 활발하게 되었지만, 그 구성원은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전기 왜구는 한국인 중심 후기 왜구는 중국인이 대부분이 왜구중 일본인은 3명이며 나머지 7명은 한국인과 중국인이다.(1)*"  

다나카 다케오(田中健夫, 1923~2009) 도쿄대 교수는 왜구의 대다수는 한국인과 중국인이었지 일본인은 극소수라고 주장한다. 13세기 왜구는 큐슈와 대마도를 본거지로 한 고려인이고 후기 왜구는 명 나라의 해금 (海禁)정책 때문에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으로 이주한 푸젠성과 저장성의 중국인이다. 그런데 한·중 양국은 왜구가 외환 아닌 내우임에도 은폐하고 반일감정을 조장하고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다나카 가케오 교수의 수자제인 무라이쇼스케(村井章介,1949~) 도쿄대 교수는 당시 국가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일본의 큐슈와 한반도 연안, 중국 연안 등 환동중국해의 천민들이라고 주장했다. '왜구는 일본인이 아니며 왜구는 한중일의 천민집단 내지 주변이라는 초점흐리기 물타기 신공을 펼치고 있다.

2. 승(承, 본말전도): ‘왜구’는 ‘원구’에 대한 보복이다.
본말전도(本末顚倒); 원인과 결과 순서의 처음과 끝이 뒤바뀌다.

일본은 고려와 몽골의 여몽연합 일본정벌군(1274년, 1281년)을 원구(元寇)(2)*라고 부른다. 일본 각급 교과서는 왜구 중에 3할 가량의 일본인은 한반도와 중국 남부와의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대마도·이키섬 주민과 규슈 주민들로, 이들이 고려와 원 나라의 연합군(元寇)의 일본 열도 침략 (1274년 및 1281년) 이후 경제 기반을 잃어 생계를 위해 밀무역을 했던게 왜구의 시초라고 적고 있다. 그야말로 본말전도 적반하장 왜곡조작의 끝판왕이다.

여몽연합군(원구) 1274년 이전에도 왜구는 창궐했다. ”1223년 5월 (음) 왜구가 금주(김해)를 노략질하다 (倭寇金州)등 「고려사절요」에만 8차례나 명기하고 있다. 
 

후쿠오카의 하코자카키(筥崎宮)신궁에 세워진 조선침략과 청일전쟁 준비중 1892년 원구(元寇)가곡비 원나라와 고려에 복수하겠다는 명분-청일전쟁 준비시기 1892년 작, 애국가(1893년 11월 윤치호 작사, 1896년 첫 연주, 1907년 작사한 거로 공식) 가사와 흡사하고 곡도 애국가처럼 약강약강 못갖춘마디.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3. 전(轉, 침소봉대): 원 나라의 일본 침략은 고려가 주도했다.
침소봉대(針小棒大): 소수의 사례를 전체의 상황인 것처럼 확대 해석하라

일본은 기마민족 몽골족 원 나라는 일본에 관심이 애당초 없었는데 고려가 부추겼다고 쓰고 있다.

당시 1259년 8월, 몽골로 향하던 고려의 태자(원종)가 이후 새롭게 칸이 될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講和)를 논의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귀국한 태자는 7월에 승하한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다. 원종은 개경으로 환도하지 않고 강화도에 머물렀다.
원종 7년 1266년 12월 22일 (고려사)
일본은 고려의 이웃 나라인데 제도나 법률에 찬양할 만한 것이 있고 한 나라와 당 나라때부터 중국과 통했으니 원 나라 황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라고 종용했다.
다시 원종은 원 나라의 제1차 여몽연합군 일본정벌 1274년 2년전에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낸다.

일본은 성스러운 원 나라의 덕화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고 계속 군대의 위용을 떨쳐야 하기에 모름지기 전함과 군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저에게 맡긴다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미력이나마 황제의 군대를 돕겠습니다. 『고려사』 1272년(원종13년) 3월 11일

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정벌이 실패로 끝난 4년 후이자, 2차 일본정벌 3년 전인 1278년 원종의 아들 충렬왕은 원 나라 세조 쿠빌라이에게 제2차 일본정벌을 부추기는 국사를 보냈다.

고려 국왕이 150척의 군선을 만들었으니 일본 정벌을 돕겠다(高麗国王、請自造船一百五十艘、助征日本)” 『원사(元史)』12권 본기12 1278년(지원19년)

일본의 번역판 「징비록」 (3)*에도 “임진왜란의 원인은 옛날 고려가 원래 군사를 이끌고 일본을 공격한데 대한 보복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은 이상의 사료들을 원 나라의 세계정벌 야욕과 조공을 바치라는 원 나라의 사신을 사형시킨데 대한 보복 침소봉대 (針小棒大)왜곡하고 있다.

4.결(結,적반하장): 임진왜란 청일전쟁 한국병탄 중국침략은 원구에 대한 보복
적반하장: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를 잡고 주인 노릇을 한다.

일본은 원구는 궁극적으로는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의 일본 침략에 대한 위기감과 복수심을 조장했다. 정토교를 중심으로 호국불교가 국토 수호의 존재 의의를 포교했다. 각지의 신토의 신사와 불교의 사찰에는 한반도를 정복했다는 진구황후과 삼한정벌을 부각하고 일본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외국 특히 원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고려’가 존재하는 한반도는 정벌되어야 하는 악마의 땅으로 자리 매김했다(4)* 

1350년부터 1590년 임진왜란 전야까지 매년 평균 2회 이상씩 지속된 한반도와 중국에 대한 왜구침략에 활용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임진왜란 원구는 고려가 원에 의뢰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은 정당한 보복이다.

정한론의 대표인물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1827~1877)도 원구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정벌을 외쳤고 현재 일본 최고액권 1만엔권의 주인공 후쿠자와 유키지 福沢諭吉(1835~1901년)도 원구에 대한 보복을 외쳤다.

“우리 일본은 동양의 선구자이자 우두머리로서 지나와 조선을 유도하고, 이들 원구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으로 협박하는 것이 필요하다” 1883년 1월

1892년 청일전쟁 2년전 현재 일본의 모든 애국가류 군가류 전시가요의 원조 『원구』를 제작 유포했다. “오만무례한 것놈들 떨쳐 나가서 충의로 단련된 내 실력 이제야 나라를 위해 일본도를 시험해보자."

일본은 왜구의 대부분은 한국인과 중국인이고 왜구 발생의 원인은 원구의 일본정벌이고 원 나라의 일본침략은 고려가 부추켰으니 원구의 주류는 고려이다.

연이어 왜구의 400여년 한반도와 중국대륙 전역 침략의 400여년간 지속된 국지전,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한국병탄, 만주사변 중일전쟁의 전면침략전쟁은 모두 ‘고려의 일본 침략’에 대한 복수전이라는 아주 고약한 궤변이다.

즉 이러한 무중생유, 본말전도, 침소봉대, 적반하장을 총동원 왜곡 조작한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대륙침략의 이론적 근거는 고려를 중심으로 한 원구에 대한 보복이다.

이는 나아가 일제와 식민사관의 후예 현생 종일매국 언·관·학이 『고려사』를 비롯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3대관찬사서를 지방문화재 이하로 처박아 두는 동서고금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자기역사 부정 자기조상 모독 집단패륜범행의 핵심동기라고 통찰 분석한다


◆◇◆◇◆◇◆◇각주

(1)*歴史教育研究会(日本)編, 『日韓交流の歴史』
(2)*일본 측에서 해당 사건을 가리켜 부르는 원구(元寇)라는 용어는 흔히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미쓰쿠니 등이 편찬한 대일본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18세기 長村鑒의 『몽고구기』(蒙古寇紀)、오미야야마 마사히데(小宮山昌秀)의 『원구시말』(元寇始末)、19세기의 大橋訥庵의 『원구기략』(元寇紀略) 등 한국이나 중국의 왜구에서와 같은 「구」(寇)를 사서가 등장해, 해당 사건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굳어갔다
(3)* 柳成龍 『懲毖録』 朴鐘鳴訳、平凡社東洋文庫、1979년、40-43쪽
(4)*外国とりわけ元寇で主要な役割を果たした高麗が存在した朝鮮半島は征伐される悪人の地として位置付けられた) 陸上自衛隊福岡修親会『元寇--本土防衛戦史』、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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