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감히 5.18 성역을 건드린 최진석 시와 대한민국의 '파르헤시아 인내심'

2020-12-1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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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최진석 교수가 11일 '나는 5.18을 왜곡한다'라는 시를 소셜네트워크에 올렸다. 스스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지자자로 살아왔으며 촛불혁명의 광화문 대오 속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밝히는 그는, 이 시 속에서 '지금 나는 5.18을 저주하고, 5.18을 모욕한다'고 말했다. '감히' 말했다.

이 시가 올라가자 사나운 반응들과 격려의 반응이 굴비처럼 매달렸다. 우선 시를 읽어보자. 다만, 시를 표현한 글자와 낱말에 주목하면서 그 글자와 낱말이 이루고 있는 맥락과 행간, 그리고 그 발언이 전복(顚覆)하고자 하는 어떤 불온한 공기에 관한 생각을 함께 읽어나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네 편 내 편의 '한 바탕 걸신들린 춤'에 또다른 역성을 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



지금
나는
5.18을 저주하고,
5.18을 모욕한다.
1980년 5월 18일에 다시 태어난 적 있는 나는
지금 5.18을 그때 5.18의 슬픈 눈으로
왜곡하고 폄훼한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죽기를 원하면서
그들에게 포획된 5.18을 나는 저주한다.
그 잘난 5.18들은 5.18이 아니었다.
나는 속았다.

금남로, 전일빌딩, 전남도청, 카톨릭쎈타,
너릿재의 5.18은 죽었다.
자유의 5.18은 끝났다.
민주의 5.18은 길을 잃었다.
5.18이 전두환을 닮아갈 줄
꿈에도 몰랐다.
나는 속았다.

3.1, 4.19. 6.10,
부마항쟁의 자유로운 님들께
동학교도들의 겸손한 님들께
천안함 형제들의 원한에
미안하다.

자유를 위해 싸우다
자유를 가둔
5.18을 저주한다.
그들만의 5.18을 폄훼한다.
갇힌 5.18을 왜곡한다.

5.18이 법에 갇히다니.
자유의 5.18이
민주의 5.18이
감옥에 갇히다니
그들만의 5.18을 저주한다.
이제 나는 5.18을 떠난다.
5.18이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죽어라, 그러면 산다.
나는 5.18을 지키러 5.18을 폄훼한다.
그날처럼 피울음 삼키며
나는 죽는다.

5.18아 배불리 먹고
최소 20년은 권세를 누리거라
부귀영화에 빠지거라
기념탑도 세계 최고 높이로 더 크게 세우고
유공자도 더 많이 만들어라
민주고 자유고 다 헛소리가 되었다.
5.18 너만 홀로 더욱 빛나거라.
나는 떠난다.
내 5.18 속에서 나 혼자 살련다.
나는 운다.

5.18역사왜곡처벌법에
21살의 내 5.18은 뺏기기 싫어.

    최진석 철학자의 시 '나는 5.18을 왜곡한다'



시를 읽으며 나도 놀랐다. 그 표현된 내용이 놀랍다기 보다는, 심오하고 정연한 사유(思惟)로 이 시대 하나의 길을 열고 있는 명망있는 철인(哲人)이, 지금 이 나라에서 이런 시를 공표할 까닭이 잘 짚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라고 한 까닭은, 시대의 공기(空氣), 그 중에서 주류로 형성되어 부정하기 어려운 공기를 거스르고 있는, 불온(하다고 평가를 받을 수 있는)한 시여서이다. 

'나는 5.18을 왜곡한다'를 읽는 동안, 내 머리에 떠오른 건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1926~1984)였다. 그는 말년에 '파르헤시아(parrhesia)'에 관한 연구에 전념한다. 파르헤시아는 BC 5세기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품에서 쓰이기 시작해, AD 4세기 로마시대까지 약 1000년간 사용된 낱말이다. 이 말은 '두려움 없는 발언(Fearless Speech)'이라고 번역되며, 직설, 직언, 솔직함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쓰이던 의미는 '목숨 내놓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용기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정치적 윤리적인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푸코가 이 말을 연구하기 시작한 까닭은, 대체 이 말이 고대를 지나면서 왜 사라졌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직접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그리스에서 이 말이 서서이 사라지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양상이 도태되는 과정이며 사회에 드리워지는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공기 때문에, 하고싶은 말을 삼키는 발언환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게 푸코의 문제의식이었다. 푸코가 이 그르노블대학교에서 이 내용을 강의하던 날이 바로, 한국의 광주 5.18이 있은 뒤 정확하게 2년 뒤인 1982년 5월18일이다. 최교수가 '5.18을 왜곡한다'고 언급한 그 시 속의 언행은, 바로 푸코의 '5.18 파르헤시아'를 정확하게 '실천적으로 감행한'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내겐 읽혀졌다. 

최교수의 시는, 5.18의 '참'이 훼손되고, 권력이 5.18의 역사 전체를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5.18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생명력인 민주주의의 희원(希願)을, 법적인 강제나 권위적인 억압으로 도포(塗布)함으로써 그 안에서 질식해 죽도록 한 것이 아니냐는 탄원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 땅의 민주화의 고귀한 역사를 이렇게 무지하게 다루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한 문제 제기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시해야 할 것은, 5.18에 관해 함부로 입을 놀려 그 명예를 훼손하는가에 대한 감시가 아니라, 그 5.18이 이 땅의 건전하고 당당한 삶의 원칙들로 살아날 수 있는 그 민주주의 생태계의 완성이 아닌가. 최진석 교수의 시는, 뜨거운 애정으로 그 뒤집힌 가치를 다시 바로 세우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읽지 않고, 최교수가 '충격'의 방편으로 삼은 직설의 에너지에 휘둘려 선불 맞은 범처럼 대드는 양상은, 그야 말로 푸코가 밝힌 '5.18 파르헤시아'가 이미 죽어나간 대한민국의 공기를 웅변한다. 5.18이 무슨 권세의 빌미인 것처럼, 감히 어디다 혀를 놀려? 하는 권위의식들이 5.18의 본질마저 오해하게 하는 치명적인 모독자들이 아닐 수 없다. 최교수의 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5.18이라면, 그것은 1980년의 5.18이 아니라, 푸코가 1982년 5.18로 선언한, '죽은 낱말의 가짜 추억'일 뿐이다. 

최교수는 시를 발표한 뒤 격한 반론이나 일방적인 질타를 만났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석명하고 천명하는 글을 13일 다시 올렸다. 여기 함께 올려, 그 생각을 음미하고자 한다.

.................................

“나는 5.18을 왜곡한다”를 발표하고 나서 - 최진석 교수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이런 말을 한다.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한 사람이 이따위 글을 쓰다니. 공부를 많이 한 것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인가 보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한 사람’(사실 이 말씀에는 매우 부끄럽다.)이라는 평가를 했으면,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한 사람이 왜 이따위 글을 썼을까?”를 한 번 정도는 생각해 주면 어떨까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나는 갈수록 더 “사람이 한 번 가진 생각을 바꾸는 것은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가는 일 만큼이나 어렵다”고 보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 그렇다고 본다. 정해진 생각을 한 번 가지면, 바로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신념만 강화하는 전사가 된다. 생각 없는 사람들끼리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회는 폭력적 사회가 된다. 평범한 사람도 악인이 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악인이 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해서이다.(한나 아렌트) 그래서 예수님도 회개를 말하고, 부처님도 참회를 말한 듯하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생각하라!”는 말에 제일 가깝다. 장자는 ‘자기살해’를 해야 겨우 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다. “너는 참회나 회개나 자기 살해를 했느냐?”는 누군가의 말이 귓가에 들려서 이 말은 여기까지만 하는 것이 좋겠다.

어제 “나는 5.18을 왜곡 한다”를 발표하고, 많은 양의 비난과 찬사에 둘러싸여 있다. 글을 발표하고 매번 드는 생각이 있다. 글을 읽지 않고 먼저 반응한다는 것이다. 읽지 않고 우선 판단한다. 판단은 주로 맘에 드는지의 여부다. 내 글은 (수준은 아주 낮지만 짧다는 이유로) 시적 형식을 취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만 있으면 이해할 수 있다. “나는 5.18을 왜곡한다”라고 쓰고, 5.18을 왜곡하는 사람들을 저주했다. 나는 5.18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5.18을 폄훼하는 사람들을 폄훼한다. 나는 5.18의 순수를 지키고 싶고, 그 자유와 민주의 정신을 지키고 싶은 소망으로 썼다. ‘읽으면’ 알기 어렵지 않다. 판단하면 불쾌하다. 내 글 어디에도 5.18을 폄훼하는 내용이 없다. 5.18을 향한 절절한 내 사랑만 있다. 나는 내 21살 때의 순수했던 5.18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야 5.18이 산다. 나는 5.18을 왜곡하지 않았다. 나는 5.18을 폄훼하지 않았다.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하는 중이다.

5.18은 혁명이고 민주화 투쟁인데, 여차여차 한 이유로 민주당의 전유물이 되었다. 정치인들에게 포획되었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길에 민주당과 정치인들의 노고는 또 얼마나 컸겠는가.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정치인들은 5.18만 가져가고 5.18의 정신인 민주와 자유는 잃어간다. 추종하는 대중들은 민주건 자유건 아무 상관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정치행위를 하는지 아니면 정치인들에게 포획되었는지의 여부를 알아채기 어렵다. 역사에서 내내 그랬다. 그래서 홍위병도 되고 빠도 되는 것이다. 그것을 권력자들은 알고 이용하지만 대중들은 모른다.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면서, 의기양양하기만 하다.

이제 문제는 법으로 지키는 것이 5.18을 더 살리는 길이냐, 아니면 법으로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 5.18을 더 살리는 길이냐가 남는다. 나는 법으로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5.18을 살리는 길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법으로 지키려 하는 것은 매우 나쁘다. 왜 나쁜가? 그것은 5.18이 쟁취하려고 했던 민주와 자유의 정신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반대자들을 처단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자유와 민주의 정신을 더 높은 것으로 볼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는 공부가 되어 있어야 한다. 소유적 목표와 존재적 목적 가운데서, 존재적 목적이 더 가치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겠다’는 헤밍웨이의 말 정도는 이해할 줄 알아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역사 문제를 법으로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표현의 자유를 심히 침해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와 자유의 핵심 사항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아무리 이해가 안 되고 꼴 보기 싫어도 ‘역사의 정신’으로 힘들게 제압하면서 가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꿀 때의 주장도 국가가 역사 해석을 독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표현의 자유를 국가가 좌지우지 말라는 것이다. 민군 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침몰사건과 관련하여 북한 어뢰 공격으로 결론지어 공식 발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천안함 왜곡 처벌법”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의 소지가 있어서 법안 소위에도 오르지 못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6.25보다 더 큰 일이 있을까? 아직도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왜곡처벌법을 만들지 않는다. 민주와 자유를 위해서 표현의 자유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순간 민주와 자유는 숨이 막히기 시작한다. 독재의 첫걸음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 표현 내용을 국가가 독점하겠다는 것으로 출발한다. 모든 역사적 사건에 대한 왜곡처벌법을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어진다.

표현의 자유는 좀 높이 있고, 분노를 일으키는 왜곡 현상은 바로 눈앞에 가까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분노를 일으키는 왜곡을 얼른 제거하거나 금지하고 싶어진다. 생각을 하는 습관이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부정적으로 보이는 그 현실의 문제가 즉각 정의를 자극하는 문제로 급선회한다. 뜬금없이(물론 정당화 하는 설명은 구구절절할 것이다) ‘선거출마 1년 전 검찰 사직’ 법안을 만들려고 하는 것도 다 이런 맥락이다. 법의 정신은 이미 다급한 현실에 의해 심히 왜곡되고 유린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조건 속에 살고 있다. 이 정도의 법은 이미 사소해져버렸다.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통치’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법을 공부한 자들은 입을 열어 말을 해보라. 긍정이 되었든 부정이 되었든 자손들에게 남겨 자신의 영욕으로 삼으라. 이런 법을 만들려는 행위가 정의가 되어 버린 사회, ‘5.18 역사왜곡 처벌법’도 이 연장선의 출발로 해석될 큰 위험을 안고 있다.

5.18 역사왜곡처벌법을 주도한 김정호 변호사가 발표한 문장의 제목은 “5․18 허위사실유포 처벌법, 최악을 면하기 위한 불가피한 고육책”이고, 그 안에 소제목으로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가 달려 있다.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유신헌법도, 수많은 긴급조치들도, 통일주체국민회의도 다 ‘최악을 면하기 위한 불가피한 고육책’이었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었던 고육책이었던 것이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계획도 “유대인 문제 해결책”이었다. 유대인을 전멸시키려는 계획도 “최종해결책”이었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도 문화혁명도 다 그랬다. ‘대약진’, ‘문화혁명’, 얼마나 좋은 단어들인가. 모두 다 ‘현실’에서 최악을 면하기 위한 ‘불가피한 고육책’들이다. 유대인 학살에까지 연결시키는 것이 과하게 느껴지고 서운한가. 아이히만도 그랬다. 평범한 얼굴을 한 악인이 탄생하는 경로는 다 이렇다. 독재의 길은 이렇게 열리는 것이다. 밑에서 ‘의기양양’하기만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독재의 주구가 되어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각성되지 않은 정의감은 각성된 불의보다 잔인하다. 각성되지 않은 사명감은 각성된 게으름보다 무모하다.

‘현실의 불가피한 고육책’ 정도의 사유에 멈춘 사람들이 법을 만들면서 하는 말들이 있다. “네가 법에 안 걸리게 바르게 살면 된다.”, “내용은 아주 간단하고 제한하는 것이 몇 개 안 된다.”, “정해진 몇 개 만 빼 놓고는 훨씬 더 많은 다른 일들은 할 수 있다.”, “너한테는 직접적으로 해당되지 않는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속임수이다. 내게 법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이 정도다. 나는 여기서 내용의 간단이나 복잡의 문제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허용의 범위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오십보백보이고 대동소이일 뿐이다. 역사를 법으로 묶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5.18을 5.18로 살려내자는 말이다. 내 5.18을 네 5.18로 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이 더 민주이고 더 자유이기 때문이다.

5.18역사왜곡처벌법을 놓고 논의를 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홀로코스트부정행위 처벌법이다. 우선 5.18은 국가가 어떤 한 인종을 타깃으로 만들어 부정하고, 의도적으로 법까지 제정하며, 철저한 계획 하에, 국민 전체를 공범으로 조작해가면서 자행한 일 정도까지는 아니다. 홀로코스트와는 다르다. 하지만, 아무리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피해 당사자 입장에서(내 입장에서도) 이런 정도의 차이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모든 사람은 다 하나의 우주이다. 이것을 정도의 문제로 살피는 것은 진실 된 태도가 아닐 수 있지만, 하나의 예로만 자신의 입법을 정당화하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역사왜곡처벌법으로 정해서 처벌하지 않는 예는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서 근거를 찾는다면, 역사왜곡처벌법을 만들지 않아야 할 근거가 훨씬 더 많은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행위를 처벌한다고 해서 독일이나 프랑스의 법체계가 후진적이라거나 전체주의로 몰아가는 악법이라거나, 반대의견을 억압하는 파시즘이라는 평가를 받지는 않고 있다.”라고도 한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5.18역사왜곡처벌법’으로도 법체계를 후진적이라고 평가하거나 파시즘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 같다. 이런 말을 하려면 조금 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독일은 우리 법이 거의 대부분을 따라서 할 정도의 법 선진국이다. 프랑스는 근대형 국가를 출발시킨 나라다. 그들이 가진 법의 건강성과 견고함이나 ‘법 정신’을 우리도 그들만큼 가지고 있다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우리 법의 건강성과 법 정신은 일상적으로 훼손되고, 법이 임의대로 행사되고 있으며, 법의 적용에 ‘내로남불’이라는 비아냥이 있을 정도이다. ‘우리가’ 혹은 ‘내가’ 법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우선 필요하다. 그래서 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각하고 각성하는 능력을 먼저 배양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정권이나 기업이나 나라가 망할 때 외부의 공격에 의해 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의 모두가 스스로 망한다. 먼저 스스로 망하고 나서, 외부의 힘에 굴복한다. 대중은 당신들이 믿는 것처럼 선하지 않은가. (물론 맘에 드는 소리만 해 주는 대중이 훨씬 더 선해 보일 것이다) 선한 대중(국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터전에 균열의 위험이 감지되면 경고를 하는 호루라기를 불어준다. 그것이 ‘반대의 소리’다. 시위다. 바로 표현의 자유인 것이다. 표현의 자유에 입각해서 호루라기를 부는 대중들을 “살인자”라고 하면 안 된다. “살인자”라고 하는 말이 튀어 나왔다면, 이제는 맘에 드는 소리만 듣지, 맘에 들지 않은 호루라기 소리는 듣지 않고 증오하겠다는 뜻이다. 자신들을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살겠다는 뜻이다. 동네에서는 이렇게 해도 되지만, 국가에서는 이러면 안 된다. 이것이 망할 징조일 수 있다. 물론 호루라기 소리가 다른 많은 잡다한 소리에 섞여 있어서 듣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서 “실력”이 필요한 것이다. 망하기 싫으면, 들어야 한다. 모든 변화에는 호루라기 소리를 닮은 조짐이 먼저 등장한다. 조짐이 등장하지 않고 갑자기 변화가 나타나는 일은 우주 천지에 하나도 없다. 남녀 간의 이별에도 수없이 많은 조짐이 먼저 등장한다. 그래서 우리보다 앞 선 사람들이 ‘경청’(傾聽)을 그리도 중요하게 말 한 것이다. 세종대왕이나 한나라 유방이나 당나라 태종이 위대한 업적을 쌓게 된 힘의 근원도 ‘경청’이었다. 아마 삼성을 성공시킨 핵심 이유 가운데 하나도 ‘경청’(傾聽)일 것이다. 비판하는 소리가 비난으로 들리고 거기다가 듣기 싫어지면, 깨달아라. 자신이 무너지고 있음을.

차지철이나 이기붕 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주 쉬운 일이다. 너무 쉬워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쩌다 차지철이 되어 있고, 어쩌다 이기붕이 되어 있다. 자신만 모른다.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모르고 가는 사람도 많다. 수련의 경지를 쌓기는 팔만대장경을 한 손가락으로 들기보다 어렵고, 수련의 결과를 까먹기는 아침에 일어나 코 만지기보다 쉽다. 생각을 하지 않고 각성도 하지 않고 자기를 객관화하지 않으면, 누구나 다 쉽게 그리될 수 있다. 주의하고 살 일이다.

***
덧붙일 말이 있다. 어떤 분으로부터 받은 글에 내 말을 조금 더 남길 필요를 느낀다. 요지는 나의 그동안의 일관된 생각과 “나는 5.18을 왜곡한다.”라는 글이 서로 어긋난다는 것이다.

내가 받은 글은 이렇다.

“최진석교수님은 평소 경계의 철학자라고 불리었고, ‘확신하지 않는 힘’이 내공이고, ‘대립면의 긴장을 품고 있을 때’ ‘대립면의 경계에 설 수 있을 때’ 나오는 것이 내공 이라고 자신의 저서와 강의를 통해 강조하셨습니다. 최진석교수님의 <5.18법, 저주시>는 교수님이 그동안 강조해왔던 경계의 철학과 내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고, 단선적인 확신과 비난의 언어가 들어 있어 최교수님의 글이라고 하기에 낯설고 믿기지 않습니다. 최진석교수님의 강의와 책을 통해 성찰과 소통을 고민했던 한 사람으로서 당황스럽습니다.”

우리는 높은 경지를 말 할 때, 가끔 ‘중용’(中庸)이니 ‘중도’(中道)니 하는 개념을 제시하곤 합니다. 중용이나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탁월함’ 혹은 ‘가장 높은 곳’입니다. ‘경계’에 서는 것은 중간에서 어정쩡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편을 지키지 않는 일입니다. 한 편을 지키면, 지키는 수고가 있더라도 마음이 편안합니다. 하나의 이념에 빠지면 우선 편안합니다. 한 편을 지키지 않고, 대립면을 모두 품으면, 즉 경계에 서면 불안합니다. 불안이 ‘탄성’을 만들어서 지성을 살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통찰’이 나옵니다. 이때 튀어나오는 지성은 참 믿을 만합니다.

제가 제 제자 국민의힘당 국회의원 후원회장을 하니까, 경계에 서라고 해 놓고 왜 한 편을 지지하느냐고 따지는 분도 계셨습니다. 요즘 정치계에도 검찰총장에게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라는 인민재판식의 차마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나도 의사 표시를 한다면, 저는 국민의힘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자의 일을 돕는 사람일 뿐입니다. 저하고 인간적인 믿음이 있는 민주당이나 정의당 등의 국회의원이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해도 당연히 합니다. 저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지지자로 살아왔습니다. 촛불혁명의 광화문 대오 속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말하는 경계는 아마 민주당도 아니고 국민의힘당도 아닌 곳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에도 확신을 갖지 않고 중간에서 어정쩡 하는 것. 이것은 경계에 선 것이 아니라 바보죠. 박정희의 독재를 비판하는 세력과 비판하지 않는 세력이 있을 때, 그 사이에서 어정쩡 하는 것이 경계에 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정희후보와 김대중후보가 경합을 할 때 중간에 어정쩡하게 있는 것이 경계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경계에 서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가장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말해 준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는 경계에 서서 확신을 가지고 불법을 전합니다.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있는 것을 경계라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한 편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을 불안 속에 밀어 넣은 후 어떤 탄성을 발견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때는 불교와 기독교의 경계에 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단선적인 확신과 비난의 언어는 잘 이해하기 힘듭니다.”라고도 하는데, 입장 차이일 수 있습니다. 맘에 들면 비판으로 보이고, 맘에 안 들면 비난으로 보이기 쉽죠. 나는 ‘비판’이라고 썼지만,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제가 어찌해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단선적인 확신”도 주관적인 가치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에 내가 어찌 해볼 수 없습니다.  <최진석 교수>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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