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저블루', 자본주의의 흡수력
미국에서 1970년 ‘솔저블루’라는 영화가 나왔다. 랄프 넬슨 감독의 이 영화에는 당대의 인기 여배우 캔디스 버건 등이 출연했다. ‘솔저블루’는 '인디언 대학살'을 다룬 영화이다. 그러니 아주 독특하다. 기병대가 서부개척민을 약탈하는 인디언을 때려잡는 존 웨인식의 서부영화가 한물 갔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기병대가 힘없는 인디언들을 학살하다니. 영화에서는 기병대가 말을 달리면서 아무 무기도 들지 않은 인디언들의 머리를 참수하는 사무라이식 장면도 버젓이 나온다.
1960년대 중반부터 미국 영화에는 기성문화에 저항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괴이쩍은 영화들이 속속 출현했는데, 영화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아메리칸 뉴시네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졸업’, ‘이지 라이더’, ‘미드나이트 카우보이’ 등이 대표작이다. 이런 영화들은 대체로 미국의 어두운 일면을 파고들었다. 그런 영화들이 나오게 된 뒷배경에는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똬리를 틀고 있고 모든 기성가치관과 충돌하는 히피문화가 깊이 삼투(滲透)되어 있었다.
아무튼 ‘솔저블루’가 미국 주류영화에 등장한 것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미국 사회가 어떻게 통합을 이루고 세계 지도적인 위치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고 나라가 두동강이 날 것 같은 위기를 겪었지만 결국 미국 청년운동의 외침, 즉 ‘감성적인 이성의 외침’을 체제 안에 흡수했다. 이런 과정에서 ‘블랙리스트’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미 ‘매카시즘의 광기’를 극복한 뒤였다. 그래서 미국 청년들, 특히 히피들이 “결국 미국은 살 만한 나라이다”는 인식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 당대의 히피들이 ‘진보적 보수세력’으로 미국 사회의 한 축이 된 것은 그 이후 역사가 잘 보여준다.
한국에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적용은 무리다.
우리나라 보수진영에서는 진보, 특히 좌파세력을 비난하는 주요 논거로 이탈리아의 좌파 사상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진지론’ 등을 즐겨 차용한다. 그람시는 자본주의는 물리력으로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람시는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의 현실을 지각하고 평가하는 인식과 감정의 구조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교육적·종교적·단체적 제도의 총체인 시민사회의 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피지배계층의 ‘동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아주 쉽게 말하면, 프롤레타리아들조차 ‘자본주의 사회는 기회를 균등하게 주니 어쨌든 살 만한 체제이고 패배자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보장제도 등으로 조금 돌봐주면 된다’는 인식을 하고 ‘혁명적 동기’를 잊어버린 채 체제 순응적이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람시는 좌파진영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진지(陣地)’와 싸울 수 있는 ‘좌파만의 진지’를 문화·사회·경제 전반적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람시는 물리력을 동원한 유혈혁명만으로는 안 되고 사회 각계각층에 좌파 이데올로기를 확대전파하는 진지를 구축해야 사회혁명에 성공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하지만 미국 대중문화사를 보면 우파 이데올로기의 ‘진지’가 훨씬 광대하고 공고했다. 가령 서두에서 꺼낸 ‘솔저블루’ 같은 반항적인 영화도 할리우드 안에 흡수해 버렸다. 요즘 미국 사회의 화두인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는 외침처럼 ‘인디언, 부랑아, 베트남 등 그 모든 소수세력의 목숨도 소중하다’는 뉴시네마의 외침을 체제 안에 받아들였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계에 좌파세력들이 만연해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보고 이네들을 물리적으로 축출해야 한다는 인식 하에 ‘블랙리스트’를 만들어내는 소동을 빚었다. 보수 진영의 논객들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원용해 좌파들이 ‘사회주의적 진지’를 공고하게 만들어가고 있다고 경고하지만 정작 ‘우파적 진지’를 구축하는 데는 소홀하고 게으르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보수 논객인 소설가 이문열은 지난해 당시 자유한국당의 대표를 맡고 있던 황교안을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는 문화계의 기울어진 헤게모니를 바로잡겠다는 인식에서 출발했지만 방법과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우파들이 자기들의 진지를 확대하고 공고하게 만드는 작업보다는 진보진영의 진지를 인위적으로 파괴하는 작업에만 몰두했다는 비판일 것이다.
이문열은 이에 앞서 2014년 삼성그룹 수요 사장단회의에 참석해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삼성 사장들이 이문열의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이준 삼성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 팀장(전무)은 "(이씨가)이탈리아 공산당을 창시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 등을 들어가며 한국사회를 분석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이씨는)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이면서 동시에 진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이씨의 강연을) 대기업이 지식인과 예술인 등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중간계층과 대화를 적극적으로 해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이 팀장은 설명했다. 이문열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우리 사회에 이미 좌파들이 진지를 구축한 상태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있는 세력이나 주역들이 진보진영의 진지 구축에 걱정을 하면서도 정작 ‘현 체제는 민중의 입장에서도 살 만하다’는 ‘우파적 진지 구축’에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이문열도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는 여전히 부족한 측면이 있고, 범보수 진영이 그동안 보여준 모습들이 국민들의 합리적인 ‘동의’를 얻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동의’하기 어렵다.
포드자동차에 공산주의 화가 리베라의 작품이 등장한 이유는?
멕시코 벽화가이자 공산주의자인 디에고 리베라는 1932년에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는 에드셀 포드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포드는 대공황으로 노동자와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자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상호의존적으로 이미지화하기 위해 디트로이트미술관 현관에 걸릴 벽화를 리베라에게 부탁한다. 에드셀 포드가 요구한 벽화의 조건은 단 하나이다. 디트로이트 산업과 관련된 그림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벽화가 완성되자 미국의 여론은 발칵 뒤집혔다. 신문들은 당장 벽화를 떼어내라고 아우성을 쳤다. 간단히 말해 “세계적인 첨단 자동차 회사에 웬 공산당 그림이냐”는 것이다. 벽화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민중화가들의 작풍(作風)과 아주 유사하다. 리베라는 아마 우리 민중화가들의 스승쯤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벽화의 이미지는 뭔가 음산하고 불온하다. 노동자들은 그저 자동차의 한 부품에 불과하다. 미술평론가들이 우려했듯이, 비(非)미국적인 그림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기계적으로 일하면서 착취를 당하는 반자본주의 성향이 짙은 벽화이다.
하지만 이 벽화는 이후 디트로이트의 명물이 되고 관광산업의 선두주자로 활약하게 된다. 매년 수십만명이 이 벽화를 보기 위해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를 찾아온다. 역설적이지만 포드는 공산주의 화가를 불러들여, 거꾸로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노동자들은 벽화를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했지만 “포드 오너가 자기들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또 다른 이해를 했다. 물론 하나의 벽화가 모든 계급갈등을 끝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포드자동차의 노사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접근과 분석이 필요하다. 어쨌든 한 치 양보 없이 대치하던 포드자동차 내 노사분규는 공황이 끝나가면서 거짓말처럼 화해무드로 전환된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포드는 다시 세계 자동차업계를 진두지휘했다. 이게 바로 그람시가 우려했던 ‘자본주의의 헤게모니 장악’이었다.
지금 한국의 형편은 어떠한가. 우파들의 걱정대로 진보세력이 ‘좌파 헤게모니 진지 구축’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어차피 유혈혁명으로 가지 못할 것이라면, 그리고 자본주의를 뿌리부터 바꾸지 못할 것이라면 “자본가들을 포함해서 있는 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同意)’하는, 보다 견고한 진보적 진지(陣地)”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보수세력 역시 "현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게 나(그 무슨 계층에 속하든)에게 기회를 주고 유리하다"는 이념적 헤게모니 구축에 성공하지는 못하고 여전히 '빨갱이', '간첩' 타령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닌지. 체제 구축의 기본이 되어야 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한번 잡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태도는 좌와 우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견고한 이념적 진지'는 고사하고 좌우 모두 각자의 '참호'에 틀어박혀 국민의 절반만 가져가면 된다는 소모전만 계속하고 있다. 국민의 입장에서 이게 비극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비극이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