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병헌 씨를 보면 간신히 제작사 문턱에 닿은 시나리오는 수정을 거듭했지만 결국 투자를 못 받는다. 새롭게 단편 영화를 찍으며 열정을 불태워보지만 흥행은커녕 당장 데뷔도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 밖 병헌 씨, 이병헌 감독은 ‘힘내세요 병헌씨’를 만들고 7년 후 천만감독이 됐다.
어떤 경험들이 그를 천만감독으로 이끌었을까? 이병헌 감독이 경험한 극한직업 이야기를 나눴다.
Q. 요즘에 어떻게 지내시나요? 영화 '극한직업' 이후 계획 중인 영화나 드라마가 있나요?
A. 홈리스 월드컵에 처음 출전했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드림(가제)’이라는 영화를 준비 중이에요. 시나리오 수정과 프리프로덕션을 동시에 진행 중이고, 우선은 이 작품에 전념하고 있어요. 오랫동안 준비해왔고 우여곡절도 많았던 작품이지만 놓지 않았던 건 분명 의미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며 실수하거나 사고로 인해 넘어지고 낙오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소외되는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Q. 관객으로서 특별히 좋아했던 영화와 드라마가 영화를 만들 때 어떤 영향을 줬나요?
A. 너무 많지만 ‘미스리틀선샤인’이 우선 떠오르네요. 겉은 차가운데 안은 따뜻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최근에는 ‘아이엠러브’를 다시 봤는데 두 번 본 영화인데도 보면서 소리 내며 감탄했어요. 모든 것이 좋았지만 키스신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인물도 잘 보이지 않는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한참동안 멍했던 기억이 나요. 드라마 중에서는 ‘모래시계’가 그래요. 지금 다시 틀어도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극한직업' 촬영이 끝나고, 살면서 손에 꼽힐 만큼 육체와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라 지쳐 있었는데 ‘나의 아저씨’를 보며 큰 위로를 받았어요. 분명히 이런 작품들에 영향을 받아요. 다른 색깔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 사람 이야기고, 표현 방식이 다를 뿐 그 감정들이 모두 영감을 준다고 생각해요.
Q. 지금까지 했던 일 중에서 극한직업의 경험이 있나요?
A. 신문배달, 주유소, 양말 장사, 뷔페 서빙, 식물원, 신문 해외발송, 공사장, 극단 포스터, 백화점 보안, 청원경찰, 구내식당 잡일, 중고차단지 잡일 등등 다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많은 일들을 했었어요. 내 용돈 내가 벌어서 쓰려고 했거든요. 그리고 학교 가는 것보다 알바 하는 게 더 좋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캐릭터를 만들 때 예시가 되어주는 지난 인연들이 생각나기 때문에 분명 도움이 됩니다.
Q. 창작의 원동력이 있나요?
A.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열등감이 아닐까 싶어요. 영화를 좋아해서 더 좋은 걸 만들고 싶지만 더 좋은 영화들을 보면서 깊은 열등감을 느껴요. 너무 많고, 좋은 작품들을 보면서 이 열등감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고 싶어져요. 결국에는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겠죠. 평소에는 잘 모르겠지만 글을 쓸 땐 자주 일어나서 그냥 집안을 산책하듯 걸어요. 무언가 생각이 날 때까지. 생각이 안 나면 청소를 하고요. 웬만하면 스스로를 다그치고 꾸짖지 않지만 시간이 없을 땐 그러기도 합니다. 드라마 대본을 쓰며 어지간히 시간에 쫓겼는지 머리통이나 따귀를 때리기도 했어요. '극한직업' 시나리오도 약속한 시간이 있어서 조금 급했는데 그때도 저 자신에게 화를 많이 냈던 것 같아요. 아이디어가 많지도 않고 실행에 빨리 옮기는 편은 못됩니다. 펼쳐 놓고 천천히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몇 개 있는데 모두 오래 된 것들이에요.
A. 이미 좀 영화 같아서(웃음). 극적인 풍파까지는 아니더라도 별다른 꿈 없던 스물일곱 먹은 잉여가 영화를 하겠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영화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영화가 시작된 것 같기도 하고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면 그냥 그게 영화 같은 삶이라고 생각해요.
Q. 배우 캐스팅을 할 때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부분이 무엇인가요?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시나요?
A. 배우가 가장 멋있을 때는 당연히 연기 잘 할 때죠. 그 멋을 중요시하고, 존경하면서 질투할 수 있는 멋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Q. 영화나 드라마에 담고 싶은 가치관이 있나요?
A. 어떤 성과를 이뤘든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금으로서는 다양한 작품들을 해내진 못하고 있지만 열어두고 접근하고 싶어요. 그것이 이야기일 수도 있고 예산일 수도 있어요. 가치관은 사실 작품마다 다를 수 있고, 진영 논리를 버리고 순수하게 인간적으로만 판단했을 때 나쁜 것이 옳다고 말하는 이야기만 아니라면 모든 이야기는 필요가 있고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보다 시장이 가져가야 할 가치관에 대한 생각이 좀 더 깊어요. 다양성에 대한 관심인데, 정치든 문화든 한쪽으로 쏠리는 건 너무 무서운 일 아닌가 싶어요. ‘힘내세요 병헌씨’로 전국 20개도 안 되는 상영관에서 개봉한 적도 있고 ‘극한직업’으로 2000개 가까운 상영관에서 개봉한 경험도 있는데, 둘 다 무서워요. 현재는 후배 감독들과 상업 영화 한 편, 저예산 상업 영화 한 편, 독립 장편영화 한 편, 단편 영화 한 편을 제작 준비 중인데 다양한 크기의 영화가 지금보다는 수월하게 제작될 수 있는 시장에서 이야기하고 돈도 벌고 싶어요.
A. 서른 살에 처음 단편 영화를 찍고 ‘딱 10년만 쉬지 않고 해보자. 10년 후에 나에게 감독이란 타이틀이 없으면 그냥 관두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연출을 해보기로 결정했어요. 그 후 운 좋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쉴 새 없이 시나리오도 썼어요. 그러다 보니 장편 독립영화를 찍고, ‘출출한 여자’로 웹 드라마를 경험하고 이어서 영화 ‘스물’, ‘바람바람바람’, ‘극한직업’, 웹 드라마 ‘긍정이 체질’, JTBC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만들고, 제가 썼던 시나리오가 원작이 된 영화들도 몇 편 나왔어요. 1년 반 동안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했고요. 망했지만 2년 정도 작은 식당도 운영했었어요. 원래는 가만히 있는 걸 좋아했는데, 뭔가 굉장히 초조했던 것 같아요. 결국 안 해도 될 일까지 해버리면서 문제가 좀 생겼어요.
목표는 분명 초과 달성했는데, 나이 먹는 계산을 못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든 상태가 됐고, 누구에겐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도무지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생각을 고쳐먹고 한동안 병원에 다니며 건강도 챙기고 많이 걸으면서 지금은 꽤 좋아졌어요. 40대는 분명 다를 것 같습니다. 40대 전체를 아우르는 계획은 세우지 않기로 했고 그냥 그날그날 하루가 적당히 잘 마무리되길 바라며 지내고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에 뭐 먹을까?’를 먼저 생각하는데 적당량의 노동을 하고 생각했던 그 음식을 저녁에 먹고 하루를 마무리 지으면 그게 행복해요. 그냥 쪽 이랬으면 좋겠어요.
Q. 학창시절 이병헌은 어떠한 학생이었나요? 10대나 20대 때 이것만은 꼭 해봤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것이 있나요?
A. 학창시절에는 정말이지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특별히 못하는 것도 없었어요. 특별한 걸 만들려고 특별히 노력도 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 전에 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애매한 아이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잡생각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10대 때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결국 찾지 못했고, 사실 그걸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게 살짝 후회는 돼요.
20대 때는 워낙 술을 좋아해서 술 먹는데 돈을 다 쓰고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여행 얘기가 나오면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게 살짝 후회되기도 하지만 사실 그때 아니면 마실 수 없었을지도 모를 술을 마시며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누렸어요. 잘 한 선택은 오롯이 공모전 상금을 노리면서 시나리오를 한 번 써 본 거예요. 결국 그 한 번 써본 걸로 여기까지 온 게 저도 너무 신기해요.
Q. ‘멜로가 체질’에서 무심하게 던지는 대사가 참 인상 깊었습니다. 여주인공 임진주 작가가 쓰는 현학적인 말투는 누구의 아이디어인가요?
A. 글쓴이가 학식이 모자라 '내 새끼 같은 캐릭터들은 그렇게 보이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제가 다루는 캐릭터들 대부분이 그닥 완벽하지 않고, 조금씩 모자란 평범한 인물들인데 그런 사람이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자기 논리를 늘어놓을 때 번뜩 현학적이고 정갈한 말투를 이용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여요. 그러다 삑사리 났을 때의 공감형 유머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쓰다보면 그냥 그렇게 되는 부분이 더 크죠.
A. 평소 저의 말투는 굉장히 나른하고 감흥이 없어서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요(웃음). 이를테면 누군가한테 선물을 받았을 때 정말 좋아한 건데 “맘에 들지 않는구나?”라며 실망을 준다던가, 누군가 내게 실례를 범했을 때 정말 불쾌한데 “아 괜찮구나?", "쿨하네?”라며 그 누군가가 스스로 아무렇지 않아할 때 혼란을 주는 말투 같아요. 그렇지만 나를 바꾸는 건 어렵더라고요.
A. 감독으로서 이병헌은 스스로 평가하기 어렵지만 주변 사람들이 보면 “쟤 왜 저렇게 열심히 안하지?”, “왜 자꾸 일찍 퇴근하려고 하지?”라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변명이 될지 설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 노동시간을 줄이는 게 내 임금을 높일 수 있는 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일은 하는 시간에 잘하면 되고 더 한다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거든요. 심지어 이 방법은 능률도 올라가요. 전날 하루 종일 술을 마셨다면 다음 날 죄책감이 밀려들면서 글이 잘 써져요. 그렇다고 죄책감을 동력으로 삼는 방법이 좋다는 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이병헌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친구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분명히 성격은 안 좋은 것 같고(웃음), 어떤 부분이 어떻게 안 좋은지 구체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고요. 말 많고 재밌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수 적고 낯가리는 편이고 혼자 있는 걸 잘해요. 누가 일당만 챙겨주면 하루 종일 창문만 내다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에요.
Q. 극한알바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A. 지금으로선 모두가 극한의 상황인지라 '그저 힘내세요'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준다면 이겨내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Q. 마지막으로 자신의 창작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주고 있는 창작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A.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창작자 자신과 곧 그 결과물을 보게 될 사람들 양쪽 모두에게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수학은 정답을 써냈을 때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겠지만 창작은 세상에 있는 상을 죄다 쓸어 와도 아니라고 하는 누구 하나가 나오기 마련이에요.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에 평생 열등감을 느끼다가 해결하지 못하고 죽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평생 가져가야 할 것이라면 적당히 그 열등감을 즐겼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