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포병은 쉬지 않는다"... '포병 창설' 장경석 장군의 '100년 이야기'

2020-06-03 08:00
  • 글자크기 설정

6.25 전쟁의 시작... 강릉·영천·송계리 전투

36사단·8사단 부임... '강한 군대 만들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 "용서하니 은인이 됐다"

30포병부대에 다시 붙은 '독수리' 애칭

70년 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북한군의 기습으로 수도 서울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전선은 남쪽으로 하염없이 밀렸다. 연합군의 참전으로 북상하던 전선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다 정전(停戰)을 의미하는 휴전선이 그어졌다. 3년 1개월이나 계속된 전쟁 속에 한반도는 잿더미가 됐다. 성한 나무 한 그루도 찾기 힘든 황무지로 변했다. 1953년 7월 27일. 그렇게 일제 식민지를 벗어난 지 약 8년 만에 한반도는 다시 둘로 나뉘었다.

6·25전쟁은 대한민국을 처참하게 파괴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 열한 번째의 경제 강국, 선진국 수준의 민주국가, 코로나19를 성공적으로 막은 방역 강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6·25전쟁 70주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70년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장경석 예비역 장군. [사진=장경석 예비역 장군 제공]


◆포병은 쉬지 않는다

2020년 생애 100년을 맞은 영원한 포병이 있다. 사단장까지 역임한 그를 예비역 장군으로 먼저 칭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포병 출신이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25일 서울 영등포 당산동 경기 염직 공장을 부대 부지로 선정하고, 서북청년회 1800여명(포병 6개 대대)을 한 번에 모집해 육군 야전포병단을 창설한 인물. 100세에도 안광을 빛내며 “포병은 쉬지 않는다”고 기개서린 걸걸한 목소리로 강조한 노병(老兵). 쉬지 않았고, 쉬지 않을 포병. 육사 5기 우경(宇畊) 장경석 예비역 장군의 ‘100년의 이야기’다.

-6.25 전쟁의 시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6월 25일 새벽 4시. 8사단 10연대 관측소가 있는 주문진 부근의 188고지에 한 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그것이 전쟁의 서막이었다. 빗발치는 포탄에 최전방 2대대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포격이 멈추자 새벽 5시경 인민군 38경비 1여단이 남침을 개시했다. 곧이어 인민군 5사단 예하 10연대가 뒤쫓아 내려오기 시작했다. 1950년 5월 난 소령으로 진급해 강원도 8사단 제1 포병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또렷하다. 그렇게 남한의 10연대와 북한의 10연대가 서전부터 맞상대했다.”

-기습적인 남침, 강릉전투의 개전 전황은.

“강릉 후방으로 인민군 766부대와 945육전대가 상륙해 제2 전선을 구축했다. 아군 10연대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 전방이 무너짐과 동시에 퇴로도 막힌 꼴이 됐기 때문이다. 당시 8사단장은 이성가 대령이었다. 전쟁 발발 보름 전에 이형근 준장에서 교체됐다. 이성가 사단장은 초반 상황이 불리하다는 판단 아래 삼척에 주둔한 21연대를 강릉 방어에 투입했다.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전쟁 개시와 동시에 육군본부와 통신이 단절돼 8사단 단독 작전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제1 목표인 강릉 확보가 절실했다.”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1포병대대장으로서의 판단은 무엇이었나.

“1포대를 사천(沙川) 건너 석교리에, 2포대를 사천초등학교 운동장에 배치하고 포를 방열했다. 압도적인 인민군 병력에 육탄으로 맞서며 밀리고 있던 10연대를 입술을 깨물며 지켜보며 인민군이 사거리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인민군이 사거리에 들어온 시점에 M3 곡사포 사격을 지시했다. 그때가 6월 26일 오전 11시다. 관측장교였던 김용운 소위가 인민군 선두 부대가 사거리에 들어왔음을 확인했을 때, 지체 없이 사격명령을 내렸다.”

-북한군의 반응은 어땠나.

전쟁개시 후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던 인민군은 주문진 남쪽에서 갑자기 날아온 포 세례를 받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형 여건상 종대로 일렬로 진격하던 인민군은 선두가 탄막에 갇히고 계속 포탄이 날아오자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0연대는 이 틈을 타 강릉 북방 연곡천에 주저항선을 구축하는 작전을 세웠다. 당시 각 포대장은 사격 제원을 부여해 사격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각 포, 계속 쏴.“ 이 한마디뿐이었다. 포병들의 필사적인 저항은 주저항선을 돌파한 여세를 몰아 밀물처럼 밀어닥친 인민군의 진출을 지연시켰다.

-승리 아닌 강릉전투, 그럼에도 ‘전공비’가 만들어졌는데.

“개전 초에 1포병대대는 강릉 북방의 연곡천 주저항선에서 무려 27시간 동안 방어선을 유지했다. 포병도 당장 대관령으로 철수하라는 사단장의 재차 명령에 따라 2포대는 전포대장 정재남 중위의 인솔 하에 오죽헌 쪽으로 진지를 변환했다. 하지만 1포대 요원들은 철수 지시를 거부한 채 인식표를 땅에 묻고 죽음을 각오했다. 이후 1포대 요원들은 포진지에 들이닥친 인민군들과 치열한 백병전도 치렀다. 소총, 야전 삽, 야전 곡괭이, 돌멩이 등 닥치는 대로 손에 잡고 인민군과 맞붙어 싸웠다. 인민군을 간신히 격멸했지만 피해도 컸다. 두부에 파편상을 입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며 육박전을 벌인 김용운 소위가 생각난다. 27시간 동안 연곡천 방어선을 유지함으로써, 사단 병력에게는 피해 없이 대관령에 집결할 수 있는 여유와 전투력을 보존해 경북 영천 지구 전투에서 전력(戰力)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강릉 지역 주민들에게도 충분한 피란 시간을 제공해줬다. 이 전공(戰功)을 기리기 위해 1991년 12월 11일, 당시 전적지였던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에 강릉지구포병전공비가 건립됐다. 비문에는 1포병대대의 빛나는 전공으로 말미암아 기동부대가 무사히 대관령으로 철수해 전열을 가다듬어 향후 작전은 물론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다고 적혀 있다.”

 

1991년 12월 11일 강릉지구 포병 전공비 준공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장경석 예비역 장군. [사진=장경석 예비역 장군 제공]



-강릉전투에 비화(秘話)가 있다고 들었다.

“인민군이 6월 25일 강릉 시내에 진입하지 않고 주문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자 인민군 동향에 대해 이런저런 억측이 난무했다. 당시 포병은 화력 손실이 많아서 재편성한 후 강릉 공격을 감행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인민군 전사(戰史)를 읽은 후 왜 적이 6월 25일 강릉 시내로 진입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공격제대 1개 대대가 오지로 진격하면서 행방불명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6월 27일 강릉 공격에 끝내 참가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만약 인민군 1개 대대가 행방불명되지 않고 예정대로 대관령을 선점했더라면 8사단은 대관령으로도 후퇴할 수 없던 처지였다. 사단 지휘소가 평창 유천리에 개설됐다. 사단 공병대대의 엄호를 받는 57mm 대전차포 2개 중대가 강릉 쪽으로 교란사격을 계속하는 가운데 21연대는 평창 횡계리에서, 10연대는 유천리에서 각각 재편성에 착수했다.”

-강릉에 이어 영천지구 전투에도 참여했다.

“1950년 8월 20일 인민군 15사단은 각종 포 166문과 전차 12대를 지원받아 8사단을 압박했다. 인민군의 목표는 영천을 점령한 다음 대구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9월 2일 밤, 인민군 15사단은 영천을 목표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국군 8사단은 인민군의 공격을 받고 분투했으나 다음날 16대의 방어 진지가 무너지면서 영천 북쪽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 9월 4일 오후까지 횡격식(부대 이동 방향에 대해 장축의 직각 또는 사각을 이루고 있는 지형격실) 능선을 중심으로 좌측에 21연대를, 중앙에 16연대와 7사단 3연대를, 우측에 7사단 5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육군본부는 7사단 8연대를 8사단으로 배속 변경했다. 그렇게 영천지구 전투에도 투입됐다.”

-영천지구도 개전 초기 어려웠다.

“9월 4일 밤 12시경 인민군 15사단은 각종 포의 지원 하에 전차 5대를 선두로 입압리와 영천 간 도로를 따라 남진해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국군 8사단은 16연대와 3연대가 인민군의 주력 공격에 대항했다. 하지만 인민군이 몇 시간 만에 종심 깊이 진입함으로써 위기를 맞게 됐다. 21연대와 5연대는 양 측면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 영천 북쪽 대천동과 상리동을 잇는 라인(Line)까지 물러났다. 전장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2군단장으로 있던 유재흥 소장이 대책마련에 고심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결국, 영천이 인민군 손에 넘어가기도 했다.

“9월 5일 밤, 영천 읍내에 인민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국군 8사단 16연대와 7사단 8연대는 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영천 남쪽으로 철수했고 9월 6일 오전 7시 영천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 당시 8사단 21연대와 7사단 5연대도 통신 두절로 전황을 알지 못한 채 적과 교전했다. 8사단장이던 이성가 대령은 오수동에서 철수·부대 재편성을 지시했고, 2군단에 증원 부대를 요청했다.”

-인민군 수중에 떨어졌던 영천을 어떻게 되찾았나.

“유재흥 2군단장의 지원요청으로 도착한 미군 전차 1개 소대(5대)와 8사단 공병대대가 9월 6일 오전 영천 읍내로 기습 돌입했다. 오후에는 2군단의 증원 부대가 도착해 1사단 11연대가 영천 남쪽에 방어 준비를 갖췄다. 6사단 19연대는 8사단 21연대 우측방으로 진출했다. 이로써 8사단은 영천 동북쪽에 21연대와 19연대가, 영천 서북쪽에는 8사단 공병대대와 5연대 일부가, 남쪽에는 11연대가 각각 배치돼 대구 방면으로의 돌파 저지선을 형성했다. 16연대와 3연대 일부는 예비로 확보했다. 9월 7일 영천 서북쪽의 21연대가 인민군의 수차례 공격을 격퇴하며 전과를 거뒀다. 19연대는 여세를 몰아 9월 8일 오후 4시경 영천을 장악하고 있던 인민군을 격멸하고 영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영천지구 전투를 ‘6·25 전쟁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라고 들었다.

“내가 그 전투에 참전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당시 영천이 인민군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낙동강 전선은 무너졌을 것이다. 낙동강 전선 붕괴는 한반도 공산화와 다름없다는 점에서 영천지구 전투 승리는 6·25 전쟁사(史)에서 매우 중요하다. 지금도 영천지구 전투를 패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영천지구 전투도 비화(秘話)가 있나.

“전쟁이 끝나고 다부동에는 전적비가 건립됐는데, 다부동 전투 못지않게 치열했고 희생자가 많았던 영천지구 전투를 기념하는 전적비는 오랜 시간 없었다. 1997년 초부터 영천대첩기념회라는 이름으로 민간 차원에서 전적비 건립 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었다. 5년의 세월이 흘러 2002년 5월 국가보훈처, 행정자치부, 경상북도, 영천시의 지원으로 국립영천호국원 내에 ‘영천대첩비’를 세우게 됐다. 현재 반공 교육장으로,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니 기념비 건립을 추진한 나로서는 보람으로 여긴다. 정일권 사령관, 작전국장 강문봉 장군, 작전참모 이주일 장군, 11연대장 김동빈 장군 등 영천대접을 이끈 영웅들을 널리 알린 것도 소득으로 생각한다.”

-강원도 송계리 전투 이야기도 해보자.

“인민군 사살 2199명, 포로 612명, 무기 노획 1만9389점 등 전과를 올린 전투다. 이 전투로 1951년 3월 23일, 강릉 홍제리에서 군단장 김백일 장군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송계리 전투 수훈(殊勳)도 쉽게 얻어진 게 아니었다. 1950년 11월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남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인민군 수중에 넘어갔다. 전쟁은 장기전 국면으로 흘러갔다. 1950년 12월에 30포병대대가 창설돼 9사단에 배속됐다. 초대 사단장은 장도영 대령이었고, 9사단 배속 당시에는 김종갑 장군이었다. 당시 28연대장은 인민군을 완전 포위했다고 장담했지만, 인민군 3개 여단은 남하해 28연대 지휘소 근처까지 접근했었다.”

-수훈(殊勳)을 세운 결정적 이유를 꼽는다면.

“민간인 제보다. 민간인 제보를 통해 대대원들을 이끌고 야간에 28연대 지휘소가 있는 직원리에 들어가 1951년 3월 8일 새벽 3시 진지 점령에 성공했다. 당시 급히 이동하느라 계산척을 지참하지 않은 1포대 대위의 실수에 아찔했다. 하지만, 같은 포대 김종대 소위의 기지로 재빠르게 계산척을 만들고 관측반도 없이 도상 관측으로 포격했다. 당시 인민군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송계리 전투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2014년 4월 8일 9사단에서 송계리 전투 전승 63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나를 비롯해 김용우 사단장, 포병전우회 회원, 부대 창설 원로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대 진입로를 ‘장경석로(路)’, 대대 애칭을 ‘장경석 대대’로 명명했다. 이듬해 10월 2일에는 9사단 영내에 ‘장경석 장군실’이 문을 열었다. 노병의 이름을 기억해주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70년 전 전투 상황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2014년 4월 8일 장경석 대대 명명식. [사진=장경석 예비역 장군 제공]



 

2014년 4월 8일 장경석 대대 명명식. [사진=장경석 예비역 장군 제공]



◆강한 군대 만들기

-6·25 전쟁 이후, 36사단장에 임명됐다.

“육군 대학 부총장으로 1년 6개월간 근무하다가 36사단장으로 발령받았다. 1963년 2월 8일, 새로 보직을 받은 장군들과 함께 김종오 육군참모총장에게 신고했다. 당시 김 총장이 ”장 장군, 안동 인심이 고약하니 각별히 조심하게.“라고 조언했다. 안동에 도착하자마자 김종오 총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장도영 반혁명 사건에 연루돼 옥중에 있는 줄 알았던 육사 동기 이희영 대령이 갓 출옥해 부사단장으로 영접해줬을 뿐 아무도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공무원도 출영했어야 했다. 눈앞의 현실이 캄캄했다.”

-걱정이 많았을 텐데, 돌파구는 무엇이었나.

“영문을 폐쇄하고 지낼 생각도 했다. 그런데 날마다 인사차 부대를 찾아오는 손님들로 인해 그 생각은 단박에 접었다. 오히려 정보참모와 방첩대장을 불러 영문을 개방했다. 사단에 출입할 만한 인사에게 모두 출입증을 내 준 거다. 안동 생활에 전환점이 된 건 사단장 부임 후 첫 외부 행사로 도산서원을 방문한 것이다. 당시 군복 위에 도포를 입고 머리 위에 감투를 썼다. 그리고 정중하게 퇴계 선생의 영정에 배례했다. 그랬더니 종손은 물론 유생들도 흡족해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원을 방문한 전임 사단장들은 나처럼 배례한 게 아니었다. 그냥 군복을 입은 채 거수경계를 올렸다. 안동 유생들이 전임 사단장들의 그런 모습에 거부감이 강했다는 것이었다. 사단 영문 개방, 도산서원 배례 등이 소문나면서 자연스레 민관군 협조 분위기가 생겨났다.”

-민관군 협조 분위기가 1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원동력이 됐나.

“맞다. 전쟁 후 한국은 성한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들 정도로 잿더미가 됐다. 민관군 협동 조직이던 삼천위성회 소속 제동병원 김명환 원장이 좋은 나무만 눈에 띄면 사단으로 가져와 심었다. 사단을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마음씨에 감동하던 차에 손동호 사방관리소장이 30만평에 이르는 사방공사와 100만 식수(植樹) 계획을 세웠다. 1968년 가을 사업에 착수해 이듬해 4월 사방공사와 식수를 병행한 결과 사단이 크게 변모했다. 안동 지역의 시민, 학생, 공무원이 자진 참여해 군이 시민인지, 시민이 군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한 덩어리가 돼 100만 식수를 마쳤다. 1964년 6월 25일 ‘백만식수기념탑’도 세워 제막식도 가졌다.”

 

1964년 6월 25일 백만식수 기념비 제막식. [사진=장경석 예비역 장군 제공]


-36사단에서 병영 개혁에도 힘썼다.

“민관과의 협조 체제가 본궤도에 오르자 안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병영 내 자유로운 분위기 조성을 목표로 삼았다. 방안으로 소조(주제토론을 위한 소규모의 조) 활동과 자치생활을 내놓았다. 소조활동 시행 초기에 장병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소조활동 개념을 이해하면서 병영생활에 차츰 취미를 갖게 됐다. 장병들의 토의가 성숙해졌다고 판단했을 때 매주 토요일마다 장병들을 영외로 내보냈다. 소조별로 토의하고 결정한 대로 활동할 수 있게 일요일까지 1박 2일로 외출 아닌 대외 훈련을 내보냈던 것이다. 주식과 부식, 모포와 천막을 휴대하도록 했다. 지역 주민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의미에서다. 영외로 나간 장병들이 부대 몰래 선행을 펼쳤던 사례도 있다. 사단 공병대대 소속 소조가 지역 초등학교 책상과 걸상을 고쳐놓고 온 것이었다. 교장이 나를 찾아와 알게 됐다. 군의관들이 농촌 지역을 순회하면서 의료봉사활동을 한 적도 있다. 이 또한 병원장이 어느 행사에서 귓속말로 알려줘 알게 됐다.”

-36사단장 이후 8사단장도 역임했다.

“1964년 8월 18일 장창국 1군 사령부 사령관에게 부임 신고를 하면서 8사단장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민관군 협조 체제 구축과 장병 소조 활동, 자치 생활 장려를 눈여겨본 장창국 사령관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었다. 8사단은 열악했고 골치가 아픈 부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야전군 헌병참모를 맡고 있던 문종옥 대령이 ‘지난달 도망병이 72명이나 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부임 다음날 새벽에 미 1군단의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작전참모는 나에게 전화로 비상을 알리면서 ‘사단장님, 그냥 주무시고 계십시오. 예전부터 그렇게 해왔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8사단에서 ‘칠전(七顚)은 없다. 팔기(八起)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했다.

“5군단 내 사단별 사격대회에 출전한 뒤에 그랬다. 5군단에는 1, 3, 5, 8사단이 있었다. 나는 8사단이 꼴찌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8사단이 1등을 차지했다. 나는 영광스런 이변을 밑천 삼아 사단 내 새 바람을 일으키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칠전은 없다. 팔기만 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해 구호를 ‘팔기(八起)’로 정했다. ‘8사단아 일어나자’라는 의미였다. 이후 하부조직 강화를 위해 분대 테스트를 통해 전 연대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물론, 36사단에서 입증된 소조활동과 자치생활 사례를 8사단에서도 적용했다.”

◆용서하니 은인이 됐다

-36사단과 8사단에서 이룬 성과에도 소장 진급을 못했다.

“1959년 12월 준장으로 진급하며 별을 달았다. 그런데 5년이 지나도록 소장 진급을 못했다. 36사단장 시절 육군본부에서 첫 소장 진급 심사가 있었다. 인사가 공식 발표도 나기 전에 여기저기서 축하인사를 받는 등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막상 결과는 좋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 재가 과정에서 누락됐기 때문이었다. 이후 1965년 8사단장 때 진급 심사를 받았다. 당시 수석으로 소장 진급 추천이 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족들이 먼저 소장 진급이 됐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런데 결과는 또 고배였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강제 예편’의 예고였나.

“그랬다. 1965년 5월 초였다. 김계원 1군 사령관에게 전화가 왔다. 육군참모총장이 만나자고 하니 나가보라는 얘기였다. 군단장에 이유를 물었지만, ‘전혀 모르는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5월 10일 오전. 전속부관 박동원 대위를 대동하고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미아리 고개에 이르자 5명의 괴한이 권총을 뽑아들고 내가 타고 있던 지프를 가로막고 다가왔다. 8사단장이냐고 신분을 확인하더니 참모총장 명령을 받고 모시러왔다고 얘기했다. 그들은 나를 홍릉에 있는 육군 방첩부대 교육대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원충연 반정부 음모 사건’에 연루된 피의자로 취급하며 조사를 시작했다.

-원충연 반정부 음모 사건이 뭔가.

“원충연은 5·16 군부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이었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군이 지체 없이 정권을 민간에게 이양하고 원대 복귀한다는 약속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분개했다. 이에 그는 몇몇 장교들을 결집해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순방 기간을 틈타 정권을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내부자가 육군 방첩부대에 밀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났고 모두 구속 또는 불구속됐다.”

-원충연 반정부 음모 사건의 피의자로 판단한 근거는 뭔가.

“원충연 반정부 음모 사건 관련자 중 육사 7기 안중광 대령이 있었다.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안면이 있었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 공약을 이행하지 않으니 이를 바로잡자며 찾아왔을 때, ‘나는 본래 정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고 일개 무인에 불과하네. 어서 돌아가게. 또 내 부하 연대장이나 대대장들을 일체 만나지 말게. 만났다가는 내가 가만두지 않겠네. 이건 명령이네’라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수사관에 이 이야기를 그대로 털어놓았다. 수사관은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왜 곧바로 안중광을 고발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나는 ‘장군이 하급자한테 들은 이야기를 전부 고발하면 어떻게 하급자를 통솔하겠느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당신들이 사전에 파악해 제지했더라면 내가 잡혀오지 않았을 것인데 왜 죄를 뒤집어씌우느냐고도 되물었다. 수사관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런데도 억울하게 강제 예편을 당했다.

“여러 이유로 난 예편지원서에 자필 사인했다. 강제 연행된 후 10일 만이었다. 1965년 7월 27일은 내 인생에 있어서 큰 분수령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나이 마흔다섯. 한 인간으로서 한창 사회생활에 전력투구할 나이에 날개가 꺾였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용서했기에 자세히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다.”

-‘용서하니 은인이 됐다’는 말을 하면서 100년의 풍파가 아니라고 했다.

“그걸 설명하려면 50여년을 함께한 ‘요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삭탈관직 이후 노이로제와 고혈압에 시달렸다. 그러던 차에 1968년 12월 8일 대학 동창이자 당시 중앙공무원교육원 교수였던 신현직의 권유로 종로 낙원동에 있는 요가원에 입문했다. 요가에 열중한 결과 3개월 만에 고혈압은 온데간데없어졌고 노이로제도 10개월 정도가 지나 일소됐다. 육신의 삶에서 벗어나 영혼의 삶을 향한 위대한 발걸음이 떼어진 것이었다. 별이 떨어지고 실업과 병마, 생활고, 도산이라는 어려움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요가 수행을 통해 별 대신 빛을 볼 수 있었다.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강제 예편돼 날개가 꺾인 것도 모두 내 업(業)이다. 장수의 축복을 준 요가를 만나게 한 것은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은인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요가 입문 20년 만인 68세에 인도로 떠났다.

“본고장에서 본격적인 수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8년 새해 벽두에 당시 박세직 올림픽조직위원장을 만나 인도로 원정 수행을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게 1988년 2월 초 인도로 떠났다. 그해 3월 1일 아난다 무르티 구루를 친견해 대한민국이 세계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언도 들었고, 1993년 5월 8일 히말라야에서 득도한 칭하이(靑海) 우상스(無上師)를 만나 제자가 되기도 했다.”

 

1985년 만 65세의 나이로 요가 수행 중인 장경석 예비역 장군. [사진=장경석 예비역 장군 제공]



-스승 없이 ‘홀로서기’의 시작이 된 계기는 무엇인가.

“'의식혁명', '놓아버림' 등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레이먼 호킨스(1927년 6월 3일 ~ 2012년 9월 19일) 박사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호킨스 박사는 의식 수준을 1부터 1000까지 척도로 수치화한 지표인 의식지도를 제시했는데 놀라운 발견이었다. 호킨스 박사의 이론에 매료돼 1998년부터 지인을 통해 만남을 주선했다. 호킨스 박사의 방한(訪韓) 요청 거절 등 1년여의 우여곡절 끝에 1999년 5월 26일 애리조나 주 세도나에 있는 호킨스 박사 자택에서 마주앉았다. 첫날에만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걸로 부족해 다음날 시간을 또 내주기를 부탁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둘째 날 호킨스 박사가 ‘장군의 의식 수준은 980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를 가르쳤던 스승들보다 의식 수준이 더 높게 측정된 것이다. 그때 결심했다. ‘나는 이제부터 혼자 일어선다. 모든 게 가능하다’라고 말이다.”

-요가로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과도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1983년부터 1993년 말까지 용인대학교와 한국체육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요가를 가르쳤다. 이병철 회장과는 1987년에 만났다. 나에게 요가를 배우고 싶어 했다. 처음에 나는 거절했다. 개인지도를 하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행비서가 본인 입장도 있으니 이병철 회장을 만나만 달라고 해서 한남동 모처에서 만났다. 나는 이병철 회장과 2번째 만남에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무보수로 요가를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수업은 시작도 해보지 못했다. 이병철 회장이 워낙 바빴던 탓에 수업 날짜를 맞추기가 어려워 며칠이 지났는데, 어느 날 조간 신문에 이병철 회장이 폐암으로 별세했다는 기사가 실렸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병철 회장이 자신의 건강을 되찾아보려는 생각에서 나에게 요가를 배우고자 했던 것 같다.”

◆30포병부대에 다시 붙은 '독수리' 애칭

-최근 육군 9사단 30포병부대에 '독수리' 애칭이 다시 붙었다.

“내 별명이 독수리였다. 계급장에 달고 다닌 무전기의 호출 구호가 독수리라서 그랬던 것 같다. 부하들에게 독수리 같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고함지르는 게 비슷했나보다. 별명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부대 주변에 ‘독수리’라고 간판 몇 개 만들어서 달아 놓기도 했다. 그랬더니 마을 사람들이 ‘독수리 마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에는 자존감을 높여주는 단어였다. 군대도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 내 별명이 그런 용도로 다시 부대에 쓰이면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장경석 예비역 장군에게 국군의 미래에 대해 한마디를 부탁하니 “유구무언”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터뷰 내내 “포병은 쉬지 않는다. 쉬면 부패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