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운동(이하 5·18)이 18일로 40주년을 맞았다. 5·18은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해 광주광역시에서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 운동이다.
5·18은 전두환 정권의 무력 탄압으로 진압당했지만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계기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5·18 발발과 전개 과정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집권을 노렸다. 이에 민중운동 세력 및 반(反)군부 세력들이 민주주의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후퇴하고 더욱 억압받을 것을 우려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을 개시했다.
광주의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시국성토대회가 개최되고 대규모 가두 정치집회가 개최되는 등 1980년 5월 초 시위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군부는 5월 14일부터 공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해 집회와 시위를 진압할 계획을 세웠고 결국 17일 공수부대 투입 명령을 내렸다.
18일 자정 무렵 공수부대는 전남대와 조선대에 계엄군으로 배치돼 학생을 연행했고, 언론사와 방송국 등 시내 주요 기관을 점령했다.
이후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해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더 많은 계엄군이 투입되고 발포까지 이뤄져 사상자가 급증했다. 그러나 무기를 획득한 시민들은 이른바 '시민군'으로 조직해 계엄군을 후퇴시켰고 27일까지 얼마간의 '민중자치'가 실현됐다.
하지만 27일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개시해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다시 점령함으로써 시위는 완전히 종결됐다. 2001년 12월 18일 기준으로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218명, 행방불명자 363명, 상이자 5088명, 기타 1520명으로 총 7200여명에 이른다.
◆5·18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 의지를 보여준 사건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계기이자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라는 의미를 가진다.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일어난 민주화 시위로, 대통령 직선제 등을 담은 헌법 개정에 합의하면서 구축된 1987년 체제를 이룬 민주화운동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護憲)조치를 발표하며 장기 집권을 시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에서 반독재, 민주화를 내걸고 시위가 일어났다.
6월 항쟁으로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등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한 9차 헌법개정이 이뤄졌다. 5·18 정신이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주화를 이뤄낸 것이다.
아울러 5·18은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열망과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 아시아 여러 국가의 민주화운동을 촉발했다는 의미도 있다.
유네스코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1980년대 필리핀, 태국,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 운동 27주년 기념사에서 연설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은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 시켜 줬다"며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던 그 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 질서를 유지했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다"고 연설했다.
5·18은 전두환 정권의 무력 탄압으로 진압당했지만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계기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집권을 노렸다. 이에 민중운동 세력 및 반(反)군부 세력들이 민주주의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후퇴하고 더욱 억압받을 것을 우려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을 개시했다.
광주의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시국성토대회가 개최되고 대규모 가두 정치집회가 개최되는 등 1980년 5월 초 시위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군부는 5월 14일부터 공수부대를 광주에 투입해 집회와 시위를 진압할 계획을 세웠고 결국 17일 공수부대 투입 명령을 내렸다.
18일 자정 무렵 공수부대는 전남대와 조선대에 계엄군으로 배치돼 학생을 연행했고, 언론사와 방송국 등 시내 주요 기관을 점령했다.
이후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해 계엄군에 맞서 싸웠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더 많은 계엄군이 투입되고 발포까지 이뤄져 사상자가 급증했다. 그러나 무기를 획득한 시민들은 이른바 '시민군'으로 조직해 계엄군을 후퇴시켰고 27일까지 얼마간의 '민중자치'가 실현됐다.
하지만 27일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개시해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다시 점령함으로써 시위는 완전히 종결됐다. 2001년 12월 18일 기준으로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218명, 행방불명자 363명, 상이자 5088명, 기타 1520명으로 총 7200여명에 이른다.
◆5·18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 의지를 보여준 사건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계기이자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라는 의미를 가진다.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일어난 민주화 시위로, 대통령 직선제 등을 담은 헌법 개정에 합의하면서 구축된 1987년 체제를 이룬 민주화운동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護憲)조치를 발표하며 장기 집권을 시도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에서 반독재, 민주화를 내걸고 시위가 일어났다.
6월 항쟁으로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등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한 9차 헌법개정이 이뤄졌다. 5·18 정신이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주화를 이뤄낸 것이다.
아울러 5·18은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열망과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 아시아 여러 국가의 민주화운동을 촉발했다는 의미도 있다.
유네스코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1980년대 필리핀, 태국,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 운동 27주년 기념사에서 연설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은 "5·18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 시켜 줬다"며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던 그 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 질서를 유지했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다"고 연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