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되고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입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꿉시다.”
신경영 선포가 있기 전에 1992년에는 메기경영론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1992년 7월 그룹임원 연수에서 이 회장은 “국경을 초월한 기업 간 초경쟁 시대를 맞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국내에서는 최고’라는 안일한 자세가 팽배해 있다”며 “우리 현 위치와 실상이 어떠한지를 항시 비교해 긴장을 늦추지 말자”고 강조했다.
이 같은 이 회장의 '위기론'을 바탕으로 한 신경영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이후, 지금까지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각 분야에서 견고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꼽힌다. 삼성이 1997년 외환위기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도 위기를 준비했던 ‘이건희 리더십’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이 회장이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신경영이 하루아침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이 회장은 1993년 당시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 프랑크푸르트, 영국 런던,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에서 총 48회 350여시간에 걸쳐 임직원 1800명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이 내용을 정리한 강의록만 8500쪽에 달했다. 그만큼 이 회장은 절박하게 변화를 부르짖었다.
이 회장은 신경영 비전을 직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신경영실천사무국’을 설치해서 경영 철학을 설명했고, 각종 저술작업과 강연을 통해 삼성 전 계열사에 전파했다. 또 삼성그룹의 핵심이던 비서실에 공채가 아닌 당시 현명관 삼성건설 사장을 임명함으로써 체제 정비에 나섰다. 사장단과 임원 평가지표도 질적 지표 중심으로 변경했다
당시 분위기는 이 회장의 위기론이 과하다고 생각하던 임직원이 대다수였다. 1994년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산업 호황에 힘입어 국내에서 처음 ‘조’ 단위의 이익을 실현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혜안이 있었기에 삼성은 곧이어 다가온 외환위기에서 신속하게 생존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삼성은 외환위기 당시 적자사업과 저부가가치, 비핵심사업을 대부분 정리했다. 1997년말 59개였던 계열사는 1년 만에 40개로 줄어들었을 정도다. 삼성중공업의 건설기계부문, 지게차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연 1000억원의 이익이 나던 경기 부천 반도체 공장을 매각하기도 했다.
이 덕분에 위기는 기회가 됐다. 품질경영은 자리 잡았고, 세계 1위에 도전할 수 있는 삼성계열사만 남으며 그룹의 역량이 강화됐다. 1997년 296%였던 부채비율은 2000년에는 66%로 크게 내려갔고, 1999년에는 삼성전자의 모든 해외 사업장이 흑자를 기록했다. 2000년에는 6조원의 당기순이익을 내며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신경영을 통한 위기 극복은 코로나19에도 적용된다. 사태의 장기화로 삼성은 외환위기 이상의 도전에 직면했다. 이 회장식 위기 관리가 삼성에 절실하다는 뜻이다.
송재용 서울대 교수는 본인의 책 <삼성웨이>에서 “대부분 기업 혁신은 위기가 현실화한 이후에 실현되지만, 삼성의 신경영은 위기가 도래하기 이전에 대비하는 성격이었다”며 “예견된 위기가 1990년대 중반 이후 현실화했을 때 오히려 혁신이 능동적으로 이뤄져 큰 효과를 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