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선 진영(陣營)논리가 한풀 꺾일 줄 알았다. 무슨 ‘조국 사태’도 아닌데, 또 내 편 네 편으로 갈리랴 싶었다. 그러나 생명을 위협하고 나라를 마비시키는 질병 앞에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코로나 확진환자 수가 급증한데 대해 한쪽은 “정부가 초기에 중국인 입국을 막지 않아서”라고 몰아붙이고, 다른 한쪽은 “전부 신천지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전자는 이 정권의 책임을 더 부각시키려는 거고, 후자는 그 책임을 덜어주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조국 사태’를 대입해보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전자는 대체로 “조국 구속”을 외쳤던 쪽이고, 후자는 “조국 수호”를 주장했던 쪽이다. 개인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전자는 이 정권에 비판적인 소위 반문(反文)에, 후자는 이 정권을 지지하는 친문(親文)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한마디로 ‘이슈의 진영화’다. 어떤 이슈에 대해 독립적 주체로서 사안별로 접근하기보다는 ‘진영’의 판단을 선도하거나 따라가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모든 이슈들은 결국 ‘반문’이냐, ‘친문’이냐 로 나뉠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가히 신종 한국병(韓國病)이다.
교차압력(cross-pressure)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민주사회가 아니다. 조국 사태 초기만 해도 지지자들은 조국에 대해 뭐든 지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국과 그의 범죄혐의를 구별해서 보려는 기류가 생겼다. 같은 진영이지만 검찰이 기소한 조국의 혐의에 대해선 보수진영 쪽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진중권이 그중 하나다. 교차(상충)하는 압력 사이에서 스스로 입장을 바꾼 셈이다. 진영에 틈새가 생겼다고나 할까. 코로나 바이러스 논란 앞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사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진영의 벽에 갇혀 있으면 합리적 진단도, 처방도 나오기 어렵다.
“초기에 중국인 입국을 전면 차단하지 못해 사태를 키웠다”는 주장에 대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4일 국회 외통위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전면 차단하더라도 한국에 들어와야 하는 사람은 경유든 불법적 방법이든 들어온다. 그 경우 오히려 (입국자들의) 관리망에서 벗어나게 돼, 받아들이되 철저하게 모니터링을 하라는 게 국제기구의 권고였다.” 그러나 미래통합당을 비롯해 반문(反文) 진영은 정부가 시진핑(習近平)의 방한(訪韓)을 성사시키기 위해 입국을 막지 않았고, 이게 코로나 확산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됐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신천지에 대한 책임 추궁은 그 다음 순위처럼 보인다.
반대로 추미애 법무장관이 신천지에 대한 강제수사를 지시하고 나선 것도 진영의 관점에서 읽힌다. 원칙적으론 신천지 측이 역학조사나 자료 제출을 거부해 구체적인 범죄혐의가 있고, 이에 대한 관련 기관의 행정조치가 선행된 후에 검찰이 나서는 게 옳다. 장관이 거두절미하고 압수수색부터 지시할 일은 아니다. 신천지만이 감염병예방법의 규제를 받는 것도 아니다. 법을 위반하는 다른 개인이나 단체도 수사대상이다. 그런데도 추 장관은 신천지라고 특정했다.
윤언여한(綸言如汗), 말을 아꼈으면
‘이슈의 진영화’를 주도하는 건 정치다. 야당은 그저 정부만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여권은 섣부른 판단과 대응으로 일관하니 이성적 논의가 설 자리가 없다. 한 야당의원은 정부가 중국인 입국을 안 막았다면서 “문재인 정부가 슈퍼 전파자”라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각국이 다 힘들지만 자기나라 정부를 “슈퍼 전파자”라고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또 다른 의원은 “코로나 급증 속에 대통령이 영화 ‘기생충’ 관계자들과 짜파구리 파티를 하고 파안대소했다”면서 “국민의 생명이 기생충보다 못한가”라고 질타했다.
문 대통령이 자초한 면이 있다. 처음엔 “머지않아 종식될 것”, “중국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이라고 하더니 곧 “신천지 사태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상황”, “가장 시급한 과제는 신천지”라고 했다. 최근엔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9일)에서 “낙관은 금물이지만, 현재의 추세를 이어나가 신규 확진자 수를 더 줄이고 안정단계로 간다면, 한국은 코로나 방역의 모범사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약국에서 마스크 한 장 사기 어렵다. 윤언여한(綸言如汗·왕의 말은 흘린 땀처럼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을 더 아낄 필요가 있다.
정치는 늘 주변의 원군들을 논쟁에 끌어들인다. 작가 공지영은 페이스북에 “현재 코로나 상황도 박근혜 정부였다면 더욱 엉뚱한 국면으로 가서 희생자가 더 많았을 거라 확신한다”는 글을 올렸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정치에 환장을 해도 이 상황에서 할 소리인가”(진중권)라는 반응이 나올 만하다. 한 친문 방송인은 “코로나 사태는 대구 사태이자 신천지 사태”라고 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대구는 손절(損切)해도 된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다른 지역은 더 안전해서 문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더 강해졌다“고 했다. 신념-정확히는 일종의 허위의식-으로 포장된 진영 논리의 민낯이 이렇다. 실로 폭력적이다. 언제든, 무슨 말을 하든, 내 뒤에는 많은 우군(友軍)이 버티고 있다고 믿기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정치의 틀을 바꾸는 계기로
확진환자 수가 급증하고 있는데 여당은 비례대표 위성정당을 만드는 데 골몰하고, 청와대는 김정은의 친서를 들고 남북 공동방역의 성사 여부만 저울질하고 있는 듯 비쳐진다.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은 박근혜 서한을 놓고 셈법이 복잡하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선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보다 ‘정치적 거리두기(political distancing)'가 더 시급해 보인다. 안철수 국민의 당 대표가 대구에서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 진료봉사에 나서자 지지율이 꿈틀거렸다. “이 시점에서 제가 있을 곳은 여의도가 아니라 대구라고 생각했다”는 그의 말에 많은 국민이 감동한 이유를 헤아려봐야 한다.
코로나 사태는 여야는 물론 우리 모두의 오만(傲慢)에 대한 경종이다. 우리가 자부심을 갖는 모든 성취가 신종 바이러스 한방에 훅 하고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줬다. 그동안 먹고사는 문제쯤은 해결됐다고, 민주화도 됐다고 얼마나 으스댔나. 심지어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우려된다고들 했으니 교만이 하늘을 찔렀다.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으로 정의했던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1917~2014)은 정치의 존재 이유를 ‘국가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 제시’에서 찾았다.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통계수치만 만지지 말고 현실에서 우리가 부닥치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 답을 내놓을 걸 주문한 것이다. 이른바 후기(後期) 행태주의의 시대를 연 것인데, 여전히 우리 정치에 주는 함의가 크다. 코로나 사태는 겸허한 자세로 국가와 사회의 틀을 새롭게 짤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치를 문제 해결능력의 관점에서 재(再)설정할 것을 주문한다.
문재인 정권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대처에 대해선 긍정 평가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투명성, 창의적이고 전면적인 검사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대놓고 자화자찬할 정도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민간(民間)의 참여와 역할이 더 고무적이다. 정치는 문제 해결의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추경예산 통과가 한 일의 전부다. 망국적 지역감정의 자리에 ‘진영’이라는 더 견고한 텐트를 쳤다.
이 걸 뜯어고치지 않는 한 사태의 합리적 수습은 물론 국민통합도 선진화도 불가능하다. 제도 때문이라면 개헌도 더는 미룰 일이 아니다. 마침 여야 의원 148명이 국민 발안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공동 발의했다. 개헌이든 뭐든, 뭐라도 해야 한다. 코로나 너머, 총선 너머, 국민 전체를 봐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헛되이 흘려보낼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