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이순신, 그리고 다석··· 시대의 인물
"인도가 300여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피해는 식민지 기간 동안에 마하트마 간디의 탄생으로 보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36년 동안 일제(日帝)의 식민지가 되었던 손해는 식민지 기간 동안에 류영모의 탄생으로 보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순신이란 인물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인물은 그 시대의 소산입니다. 나라에는 참된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류영모 한 사람의 탄생이 일제 36년 동안 온 겨레가 겪은 고통의 값만큼 크고 귀하다(이 말은 결코 겨레의 고통을 낮춘 것이 아니라 그 극한의 고통만큼이나 류영모가 이룬 정신적 성취가 값지고 높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고 말한 사람은 농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류달영(1911~2004)이다. 인도의 간디에 비견되는 사람,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해낸 일과 비교되는 사람으로 류영모를 꼽은 류달영은 대체 누구인가. 그는 왜 류영모를 이 겨레붙이가 낳은 최고의 성자로 손꼽았는가. 그에게 매료된 한 지식인의 과도한 평가였는가. 아니면 그뒤의 많은 이들이 잊어버리거나 놓쳐버린, 한 인물의 어마어마한 가치를 그가 일찍이 발견하고 저토록 명쾌하게 밝혀놓은 것인가.
러시아 레닌을 바꾼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
1870년대 러시아 차르의 전제정치를 극복하려는 지식인들의 몸짓은 농촌으로 파고들었다. '브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은 농촌을 계몽하여 나라를 바꾸려는 청년들의 작은 혁명이었다. 이 운동의 중심이었던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는 감옥 생활 속에서 소설 '쉬토 젤라치(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다. 이 책은 러시아 청년의 혁명고전이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1902년 발표한 공산당 조직론을 '쉬토 젤라치'라고 이름 붙였다.
브나르도 운동은 러시아에선 실패했지만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부활한다. 청년들은 농촌계몽을 하러 저마다 시골로 내려갔다. 이때의 분위기를 담은 소설이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다. 소설 '상록수'는 박동혁과 채영신이란 작중 인물을 겨레의 뇌리에 기억시킨 작품이다.
채영신은 실제 인물 최용신(1909~1935)을 모델로 했으며, 그와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펼친 이는 류달영이었다(그는 나중에 이 소설이 팩트를 바꾼 점을 바로잡기 위해 '농촌계몽의 선구 최용신 소전'이란 책을 펴내기도 한다). 1931년 여름 양정고보 4학년이던 류달영은 동아일보의 브나르도운동에 참여하면서 농민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의대를 보내려는 가족의 뜻을 물리치고 수원고등농림학교(3년제, 서울대 농대 전신)에 입학한다.
류달영의 삶을 바꾼 책 '덴마크 이야기'
양정고보 시절 5년간 류달영의 담임선생이었던 김교신은 이 무렵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라는 책을 선물한다. 농업국가 덴마크의 부흥 스토리가 소개되어 있는 이 책을 읽은 류달영은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해방 뒤인 1952년 서울대 농대교수 류달영은 피란지 대구에서 책 한권을 펴낸다. '새 역사를 위하여: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란 책이었다. 전쟁통에 찍은 이 책은 몇년 새 26쇄를 찍어낼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류달영을 여러 차례 만나 "덴마크 연구에 조예가 깊은 류 선생을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으로 위촉하고 싶다"고 밝혔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 업무에 당시 군사정부(국가재건최고회의)가 간섭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직책을 수락한다. 그해 9월 본부장을 맡은 류달영은 덴마크 모델에 따른 국민운동계획을 수립한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나의 숙소에는 1956년 덴마크에서 사온 그곳 지도자 그룬트비 사진을 걸어놓았고, 출근 때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나왔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중에서)
이때 류달영이 시도한 재건국민운동은 박정희 새마을운동의 모델이 된다. 그는 국민교육, 향토개발, 생활혁신, 사회협동의 네 분야로 사업을 나눠 농촌운동 지도자를 교육하고 마을 청년회관과 농로 및 수로를 건설한다. 결식아동 급식제와 부엌, 화장실 등의 생활환경 개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류달영, '새마을운동의 아버지'
그러나 군사정부가 민간정권으로 옷을 갈아입던 1964년 국민재건운동법이 폐기되고 본부가 해체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용당한 모양이 됐다. 1965년 5월 15일 동아일보에는 류달영의 기고가 실렸다.
“5·16군사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이 나라의 하나의 비극으로 종말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 존재하였고, 또 그것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류달영의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
이후 류달영은 민간 차원의 재건국민운동중앙회(사단법인)를 결성했다. 그는 자신이 펼친 재건국민운동을 새마을운동과 연관 짓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류달영이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실질적인 힘이 되어준 것은 사실이었다. 새마을운동연수원장 김준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서울대 농대)이 이 운동의 주요 간부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는 박정희의 가장 가치있는 성과로 꼽히는 새마을운동의 원천기획자이자 실행의 핵심두뇌였다. 식민지 시절 우연히 받아든 한권의 책이 이 나라의 운명을 바꾼 거대한 동력이 되었다. 류달영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세운 숨은 힘이다.
여의도에 있는 성천재단과 다석연구회
류영모의 사상과 삶을 배우는 다석사상연구회는 서울 여의도 63빌딩 옆의 조촐한 건물인 라이프오피스텔 강의실에서 매주 모임을 갖는다. 이 모임에는 류영모의 정통 제자라 할 수 있는 박영호 회장과 최성무 대표, 김성언 총무를 비롯해 다석을 좇는 '언님'과 후학들이 모여 신앙행사와 강연, 학습의 시간을 갖고 있다. 다석사상을 꽃피우고 있는 이 '교실'을 무기한으로 쓰도록 유지(遺旨)를 남긴 사람이 류달영이다. 그의 재단인 성천(星泉·류달영의 호)문화재단이 다석을 기려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류달영은 농업시범을 목적으로 경영해 오던 수원의 평화농장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로 편입되었을 때 그 보상비 10억원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의미에서 문화재단을 세웠다. 이것이 1991년 설립된 성천문화재단이다. 발기인으로는 류달영을 비롯해 구상, 김도창, 류화숙, 서영훈, 전택부 등이 참여했다. 이 재단은 정신 및 생활문화 창달을 위한 고전과 현대와 미래 교육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재단의 키워드는 문화이며, 문화사업과 문화민주주의,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추구한다. 이 재단은 특히 류영모와 관련된 사업과 행사들을 팔을 걷어 지원하고 있다.
류달영은 왜 스승의 스승(스승 김교신의 스승인 류영모)을 이렇듯 사후에까지 길이 모시려 했을까. 그는 류영모가 예수나 석가처럼 사람들에게 진리의 생명을 가르쳐 주었기에 그 가르침이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고통받던 겨레를 구하는 중차대한 역할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류영모의 정신혁명, 류달영의 경제혁명
그 스스로가 뛰어난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류달영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강권에 '국가 기틀을 잡는 작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바를 꿋꿋이 지키며 문화 창달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랬기에 류영모의 '크기'를 읽은 것이다. 이 나라의 '정신'이 걸어온 본연의 길과 마땅히 서야 할 자리를 가리키면서도 서양이 수천년에 걸쳐 이뤄놓은 종교의 원천적 본령(本領)으로 치달아 올라 기독교의 지순한 경지를 개척한 성자의 '가치'를 헤아린 것이다. 중국의 공자가 해놓은 동양 정신가치의 혁명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다.
류영모 앞에 옷깃을 여민 후학(後學) 류달영 또한 예사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 내면엔 이 나라를 위한 위대한 비전과 에너지가 꾸준히 솟아나, 우리가 선진국으로까지 도약하는 경제의 주춧돌과 엔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역사는 지하수처럼 숨은 물길로 이렇게 흐른다. 류영모의 정신혁명과 류달영의 경제혁명은 20세기 이 나라를 각성시키고 도약시킨 놀라운 저력의 비밀이었다.
류달영은 중·고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수필가이기도 하다. 그의 수필 '슬픔에 관하여'는 생에 대한 비감(悲感)과 관조를 이해하게 되는 명편이었다. 그의 인간적 면모를 이해하게 되는 글이라 소개한다. 막내아들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난 다음에 쓴 절절한 문장들이다.
"나의 막내아들은 지난봄에 국민학교 1학년이 되어 있어야 할 나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이 아이는 '신장종양'이라고 하는 매우 드문 아동병에 걸렸다. 그러나 곧 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왔다. 그런데 오늘, 그 병이 재발한 것을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의학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선고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손목을 하나씩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우리 내외는 천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은 시골에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 사람의 물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티끌만한 근심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자기의 마지막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맹목(어두운 눈)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빠, 구두."
그는 구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두가 신고 싶었나 보다. 우리 내외는 그가 가리킨 가게로 들어가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어린 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는 그의 기쁜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주 보고 웃어 주었다. 오늘이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할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한 것이다. 6·25때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이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아이가 밖으로 놀러나갈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넌 커서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사가 너의 병을 고쳐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나쁜 병을 고쳐줄 수 있게 말이다."
하고 말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든지 의사가 되겠다고 말해왔었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없이 총명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류달영의 '슬픔에 대하여' 중에서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