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로서의 나를 완전히 알 수 있는 미래가 오고 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다. 그 미래는 현재진행형이고, 이게 유토피아(이상향)가 될지 디스토피아(역 유토피아)로 될지는 우리가 결정하고 컨트롤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인 부모’를 갖고 있다. 그의 정자와 그녀의 난자, 결합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그 유전자가 ‘생물학적인 나’를 규정한다.
유전자는 정보, 데이터다. 70조개 인간 세포 안 DNA에 위치하는 정보 사슬이다. 이 유전적 정보의 총합이 바로 게놈(Genome)이다. 2003년 미국, EU, 일본 등은 3억 달러(약 3600억여원)를 투입한 휴먼 게놈 포르젝트(인간 유전자 지도 해독)를 완성했다.
◆앤젤리나 졸리가 불 지핀 유전자 검사 비즈니스
인간의 유전자 99.9%를 해독한 게놈 지도가 나온 지 10년 만인 2013년, 미국 여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그해 5월 14일자 뉴욕타임스에 글을 기고했다. ‘나의 의학적 선택’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은 “내 모친은 거의 십년 동안 암과 싸웠고 56세에 돌아가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글에서 그는 유방절제 수술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자신에게는 두 세대에 걸친 가족력과 유방암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은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다고 했다.
졸리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BRCA(일명 브라카) 1,2 유전자가 있음을 확인했고, 이 때문에 자신에게 미래 유방암이 생길 확률이 87%라는 분석 결과를 받았다. 그는 절제수술을 받았고 이후 졸리의 유방암 발생 확률은 5% 이하로 줄었다. 비슷한 과정을 통해 졸리는 2015년 난소 제거 수술을 받았다.
두 차례 모두 수술 당시 건강에 문제는 없었지만, 가족력을 우려해 유전자 검사를 받았고 예방 차원의 수술을 한 것이다.
졸리는 미국의 모회사에 최소 10만 달러, 1억원이 넘는 돈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만에 미국에서는 단돈 100~500달러면 자신의 인종적 배경, 우려되는 질병 등의 유전자 정보를 분석해주는 ‘유전자 분석 비즈니스’가 활황이다. 대형마트에서 유전자 분석 키트를 팔 정도다.
◆타액을 보내니 유전자가 풀렸다
대한민국은 어떨까? 올 초 규제가 풀려 병의원을 통하지 않고 소비자가 직접 업체에 의뢰하는 DTC(Direct to Consumer) 유전자 검사 항목이 기존 12개에서 56개로 대폭 늘어났다.
지난 1월 29일 유전체 검사 및 빅데이터 기업 이원다이애그노믹스(EDGC)에 침(타액)을 보냈다. 입안에 침을 가득 모아 작은 플라스틱 통에 몇 차례 뱉고, 이를 연구대상 동의서와 함께 인천 송도 주소지로 보냈다.
열흘 뒤 237페이지 분량의 진투미(Gene 2 me) 유전자 분석 결과를 받았다. △건강관리 △식습관 △영양소 △운동 △개인특성 △피부모발 △유전자 혈통분석 등에 대한 보고서였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각각 항목에 대해 ‘낮음’, ‘보통’, ‘높음’으로 구분한 뒤 구체적인 수치를 %)로 제시했다.
건강관리 부문에서는 비만, 체지방률, 혈당, 혈압, 콜레스테롤, 요산치, 퇴행성 관절염증, 멀미 가능성까지 세세한 나의 유전적 특성과 경향성을 파악하고 분석했다. 예를 들면 혈압 상승 위험도는 보통, 혈당 상승 위험도는 높음으로 나왔고 그 숫자도 나왔다.
통풍의 원인인 요산치의 경우 ‘이*재님과 같은 유전자형을 가진 사람은 요산치가 평균보다 00% 낮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식습관이나 영양소 관련해서는 포만감 정도, 단맛이나 쓴맛, 짠맛 민감도도 볼 수 있었고 비타민, 칼슘 등 영양소 부족 위험에 대해서도 평균보다 높거나 낮거나, 그 숫자를 적시했다.
각종 운동 적합성, 알코올 대사, 여드름 발생, 원형 탈모에 대한 유전적 결과물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내 유전자와 잘 맞는 와인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산도, 바디감, 탄닌, 향미, 단맛 등으로 꼼꼼히 말이다.
인종분석 결과도 흥미로웠다. 보고서에는 “수세기 동안 이어온 당신의 뿌리를 추적하고 당신의 조상이 어디에 살았고, 언제 살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라”는 안내문구가 나왔다. 그 결과 대한민국 50.18%, 일본 22.59%, 중국 25.53%, 몽골 1.19% 키르기스스탄 0.35%, 카자흐스탄 0.17%로 나타났다. 한중일 3국의 피가 섞인 100% 동아시아인이라는 최종 결과가 나왔다.
◆유전자로 본 미래 질병 리포트
여기까지는 맛보기였다. 지난 19일 추가로 받은 ‘진투미 플러스’ 결과 보고서는 유전자 분석을 통해 내가 어떤 질병에 취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배진식 EDGC 연구소장은 “모든 사람의 DNA는 약 30억 쌍의 염기로 이뤄져 있는데, 일부 미세한 부분의 차이로 질병에 대한 유전적 위험도가 달라진다”면서 “그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탐침 유전자를 촘촘하게 일종의 반도체칩처럼 만들어 주요 암과 질병에 대한 유전적 위험도를 파악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2차 보고서는 각종 암과 주요 질병 27개, 즉 △상복부 질환(간암·대장암·심근경색증·심방세동·위암·췌장암·폐암) △두경부 질환(갑상선암·구강/인후암·뇌수막종·뇌졸중·식도암·우울증·치매·파킨슨병) △전신 질환(골다공증·관절염·백혈병·제2형 당뇨병·피부암·혈전증 △하복부 질환(방광암·전립선암) 등으로 나눠 결과를 보여준다. 각각의 질병에 대해 안심-양호-보통-주의-경계의 순으로 유전적 위험도를 분류했다. 상대적 위험도를 소숫점 아래 네자리까지 표시했다.
예를 들면 간암의 경우 가까스로 보통을 넘어 양호(유전적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다소 낮은 상태)가 나왔다. 총 상대적 위험도는 0.7680(범위 0.7681~1.5360)이었고, 유전자형에 따른 상대적 위험도도 각각 나왔다.
결론적으로 27개 질병 중 유전적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높으며 집중 건강관리가 필요한 ‘경계’가 2개, 이보다 다소 높은 ‘주의’가 3개, ‘보통’이 16개, ‘양호’가 6개로 나왔다. ‘안심’은 없었다.
안심에 해당하는 질병이 없어 아쉽다는 생각보다 경계와 주의에 해당하는 질병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더욱 신경 써서 관리해야겠다는 절박함이 들었다. 누구나 그렇다고 한다. 유전자 검사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미리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 소장은 “유전자 검사는 질병의 유전적 위험도를 예측하는 검사다. 실제 위험도는 생활습관이나 환경적 요인 등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과학자로서 검사를 하는 것이지 의료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더 건강하게 살고 싶다면 관리를 잘 하고 정확한 진단을 위해 전문의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유전자 검사를 통한 질병 예측이 의약분업과 비슷하게 진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의료계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나타나는 질병 가능성의 관리, 치료에 전념하고, 유전자 검사는 헬스바이오 과학에서 전담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앤젤리나 졸리 같은 유방암 유전자 검사도 병원을 통해 가능하다. 유전성 유방암이 걸릴 확률에 대해 높다-낮다가 아니라 발현 위험성이 있다-없다로 결과가 나온다.
◆유전자 편집-조작 아닌 치료의 시대를 향해
유전자라는 말이 나오면 친자 확인, 범죄자 분석 등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황우석 사태 이후, 또 ‘유전자 편집 맞춤형 아기’ 등 윤리적 논란을 부른 해외 뉴스 등에 그런 분위기가 더 심해졌다.
하지만 유전자 가위, 즉 ‘크리스퍼’(CRISPR-Cas9)라고 부르는 유전자 가위 활용 편집 기술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편집은 먼저 ‘유전자 검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전자를 조작, 변형하는 건 윤리적인 문제로 제한해야 하지만 검사 단계는 생명권, 장수권(장수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얘기다.
영국에서는 희귀질환과 암 질환 환자의 게놈을 분석하는 ‘10만명 게놈 프로젝트’가 있다. 병을 앓는 환자와 정상 가족의 유전자를 비교·분석해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찾는 것이 목표다.
한국에서는 울산광역시가 ‘게놈특별시’다. 울산 시민 만명의 게놈 정보를 분석하는 ‘울산 1만명 게놈프로젝트’를 진행, 올해 안으로 한국인의 고유한 유전적 특성을 반영한 표준 게놈을 만들 계획이다. 한국인 특유의 유전자 0.001%를 밝혀내 한국인이 어떤 질병에 취약한지를 밝혀보겠다는 거다.
‘게놈전도사’ 박종화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는 각종 강연에서 “한국인 고유의 유전자 정보해독을 통해 궁극적으로 의료 비용을 낮춰야 한다. 과학은 국민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고 주창한다.
이 분야에서 앞서 나가는 일부 나라에선 유전자 검사가 일상이자 ‘복지’다. 미국, 독일, 홍콩 등의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복지 차원에서 유전자 검사를 무료로 시켜준다. 유전자검사 서비스도 마트 등에서 생활용품처럼 쉽게 구할 수 있다. 미국 월마트와 온라인쇼핑몰에서는 '23앤드미'(23andMe)의 유전자검사 키트를 10만원 안팎(81~139달러)에 판매하고 있다. 내가 한 것과 비슷하게 침을 담아 보내면 그 결과를 온라인으로 보내준다. 가장 저렴한 인종분석을 기본으로, 각종 유전성 암에 대한 유전자 분석 결과를 할 수 있다.
유전자 검사의 현재와 미래는 치료다. 안젤리나 졸리가 받은 수술처럼 유전자 검사는 맞춤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 개인에게 특정 질환이 발생할 위험도를 미리 알아내거나 개인의 체질에 맞는 치료법을 개발하는 ‘개인별 맞춤의료’ 말이다. 이미 해외 유명 제약사들은 유전자 약을 활발히 개발 중이다.
정상기능을 하는 유전자를 체내의 비정상조직으로 전달해 세포 기능을 회복시키는 치료법이다. 쉽게 말해 유전자를 치료제처럼 사용해 세포 단위에서부터 질병의 근본 원인을 공략하는 거다. 특히 희귀병이나 유전병에 탁월한 효과가 기대되는 신기술이다.
업계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암, 유전성 질환, 심혈관계 질환 등에 대한 3000개 유전자 치료제 연구가 진행 중이다. 2023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15~20개의 유전자 치료제, 2030년 40~60개가 허가·출시될 거란 전망이다.
글로벌 유전자 검사 시장은 연평균 20% 가깝게 무서운 성장세이다. 미국과 중국, 두 거인이 이끌고 있다. ‘글로벌마켓 인사이트’는 중국의 유전자검사 시장 성장률은 2025년까지 매년 17%로 전망했다. 같은 기간 미국 역시 15%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말만 요란하다. 정부는 바이오헬스 산업을 2030년까지 5대 수출 주력산업으로 육성, 이를 위해 연구개발 규모를 2025년까지 연간 4조원 이상으로 확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전자 검사 관련한 걸음마 단계의 규제를 이제서야 풀었고, 이미 많은 이들은 해외 직구를 통해 다양한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유전자 검사는 유전자 가위로 편집하는 신의 영역이 아니다. 신이 준 유전자를 알게 되면 생물로서의 나, 자연의 극히 일부인 보잘것없는 나를 알게 된다. 미래 가능성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는 건 신을 부인하는 것도, 그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