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은 지난 6일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삼성 측이 요구한 손경식 CJ그룹 회장을 소환증인으로 채택했다. ‘수동적 뇌물’을 강조하려는 삼성 측의 전략에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다만 법원은 다음달 17일 열리는 공판기일 전까지 무거운 숙제를 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 측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거절할 수 없는 요구였다는 주장을 계속 하고 있다”며 “그렇다면 향후 정치 권력자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을 경우 또 뇌물 공여할 것인지, 그런 요구를 받더라도 기업이 응하지 않으려면 삼성그룹 차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을 다음 기일 전에 재판부에 제시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이전부터 이 부회장에게 뇌물 공여 방지책 마련을 주문해왔다. 정준영 부장판사는 10월 25일 첫 공판에서 이 부회장에게 미국 연방정부와 미국 대기업의 준법감시제도를 참고하라고 훈계했다. 기업 총수와 대통령이 무서워할 정도의 기업 내 준법감시 제도가 있었다면 삼성이 국정농단에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이를 두고 형량 낮추기를 위한 가이드라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특히 법원이 요구한 예방책은 입법・사법・행정부의 명확한 법적 근거와 정책이 맞물려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임 떠넘기기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법원이 이 부회장에게 ‘권력자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방법’을 요구한 점을 볼 때 정치권에 쓴소리를 한 측면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변호사는 “내가 맡고 있는 의뢰인에게도 이런 가이드라인이 주어졌으면 좋겠다”며 “(한편으로 재판장의 발언은) 정치적으로 충분히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 역시 “흔한 기회는 아니다”라며 “(정치적으로) 내포된 의미는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국민적 관심이 큰 사건을 맡은 판사들은 높은 스트레스 속에 재판을 진행한다. 재판장 말 한마디에 비난이 쏟아지곤 한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이 부회장에게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는 비판을 감수하며 풀기 힘든 숙제를 던졌다. 기업인에게 뇌물을 요구하는 정치인들에게도 엄중 경고를 던지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해석이 나온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