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언제나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다. 주창자들이 천수를 다하면 소리 없이 사라질 것 같던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국경제의 위기를 정권교체로 몰아가려는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전쟁 도발과 함께 새삼 ‘빛’을 보고 있다. ‘일본은 한국에게 고마운 나라’라는 일본 극우의 몰염치를 공유하면서 ‘성노예’와 강제징용노동자 문제에서 ‘국산 아베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이들의 반민족적 망동은 아베의 ‘도움’으로 한국경제가 망하는 것이 정권교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연결되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경제사학계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의 원조는 안병직 교수이다. 그가 이 ‘이론’과 맞닿은 ‘중진자본주의론’을 반갑게 수용한 것은 정년퇴임을 전후하여 일본을 자주 왕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초 한국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했던 안 교수가 일본의 ‘중진자본주의론’을 받아들인 데는 몇 가지 불행한 계기가 작용했다. ‘자본론’ 소지만으로도 장기 실형을 선고받았던 박정희 정권 시절에 북한의 남한관이었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식반론)’을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그를 따랐고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그와 교류했다. 그러나 ‘식반론’은 1984년 시작된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반론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퇴출되었는데, 여기에는 안 교수의 책임이 가장 크다. 2002년 안 교수가 “식민지 반봉건사회라고 한 것은 내 의견이 아니라 북한의 연구와 모택동 문헌을 요약해 소개한 것”이라고 거리를 둔 것은 ‘식반론’ 연구가 부실했음을 무성의하게 자백하는 발언이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탄생은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비극적인 결과일 수도 있다. 체계적인 분석보다는 ‘현실의 권위’와 ‘정통’에 의존하면서 현실 설명력보다 주장의 ‘인용 출처’에서 타당성을 확보하려 할 뿐만 아니라 논쟁상대의 인간적 자존심마저 짓밟으면서 ‘욕설’이 ‘논리’를 대체하는 ‘사구체 논쟁’의 결말은 참담했다. 안 교수가 이 과정에서 후학들에게 받은 비난을 소화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사구체 논쟁’이 잦아들자 이와는 전혀 무관한 ‘중진자본주의론’으로 이행한 것은 더 이상 ‘논쟁’에 간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386세대’로 불렸던 인사 일부가 오늘날 한국 정치 무대에서 보여주는 ‘막말’ 시리즈와 맹목적 자세는 이 ‘논쟁’의 연장으로 보인다.
서울대학교에서 안 교수의 후임이 된 이영훈 교수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계승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과 서울대 명예교수를 사칭한 것을 보면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매춘부였다’는 자신의 주장에 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위안부 할머니들께 사과의 큰절을 올린 것이나 이를 번복하면서 일제에 대한 비판을 ‘종족주의’로 폄하하는 것도 안 교수가 친일부역자를 옹호하기 위해 동원하는 생존형 ‘상황논리’에 따른 행태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역사연구에서 ‘통계’만을 보다 보니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경제학 연구자 모두가 새기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라는 앨프리드 마셜의 경구를 배신한 것아 가장 큰 죄이다. 차제에 독일의 ‘극단주의자금지법’처럼 ‘국가보안법’을 개정해서 일제를 찬양하거나 범죄행각을 부정하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폄하하는 ‘국산 아베들’도 반국가사범으로 제재할 수 있으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