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은 청와대·정부 안보외교의 미숙함이 여실히 드러난 하루였다. 인도·태평양 전략과 일대일로로 대변되는 미·중간 해양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아무런 실리 없이 미국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했고, 중국은 이를 빌미로 사실상 우리에 대한 무한 압박을 선언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4일 정 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강경화 외교부장관 등을 만났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로 비롯된 한·일 갈등이 격화하는 시기와 맞물려 볼턴 방한 중 미국의 중재를 이끌어 내겠다는 게 청와대·정부의 복안이었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2시간반에 걸친 양국 안보실장 회담 후 두 사안 공히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볼턴과의 회담 전 모두 발언에서 호르무즈 해협 파병건에 대해 ‘전적인 지지(fully surppotive)’를 표명했다. 앞서 볼턴은 여당 대표는 패스하고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만났다. 국회 동의 절차를 감안해 파병에 찬성하는 야당 대표를 먼저 만난 것으로 해석된다. 일련의 과정에서 볼턴은 파병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
강경화 장관의 적극적 지지 표명은 파병에 대한 약속으로 해석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윗한 대로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유조선의 60% 이상은 아시아 국가들이며 우리의 경우 원유 수입량의 70%가 이 해협을 통과한다. 파병은 우리로선 에너지 안보와 직결된 문제다. 앞서 지난달 30일 트럼프 대통령 방한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간 조화로운 협력을 다짐했다. 한·미 동맹을 재확인 함으로써 미·중 패권전쟁 과정에서 수반되는 문제들을 풀어나가겠다는 전략적 판단이었을 것이다.
정부가 에너지 안보 차원이 아니라 한·일 갈등 해결책의 일환으로 파병을 약속한 것이라면 잘못된 계산이다. 상대가 청구서를 내밀기도 전에 덥썩 지불을 해버린 것도 협상 전략 측면에선 미숙했다. 볼턴은 한·일 갈등과 중국·러시아 폭격기의 영공 침해와 관련해선 아무런 실리를 약속하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가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파병의 명분으로 내세운 수혜자 부담의 원칙은 합당하지 않다.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항행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전세계 유조선이 해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미국은 동맹국의 에너지 안보를 목표로 항행의 자유를 보장한 것인가.
아니다. 미국은 작게는 자국의 석유 안보를 위해 큰 틀에서는 자유무역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해군을 키우고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항행의 자유를 지켜왔다. 미국이 그 대가로 얻은 건 패권이며, 그 핵심은 기축통화 달러다. 미국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구축한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그동안 30조달러란 막대한 돈을 찍었다. 그 중 6조달러 정도만 미국에서 유통된다. 산술적으로 24조달러란 주조이익을 누린셈이다. 주조이익이란 액면가액과 인쇄비용의 차이로 종이와 잉크값만으로 미국은 24조달러 어치의 상품을 수입해 흥청망청 호시절을 누려왔다.
셰일가스 혁명으로 미국이 100% 가까운 에너지 자립에 성공하면서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항행 안전이 이전보다 중요도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이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에서 지적한 대로 미국은 수입이 GDP(국내총생산)의 15%를 웃돈 적이 별로 없다. 미국의 석유 수입 안정보다 달러 패권이 해군력 유지의 목적이란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우리의 에너지 안보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사안을 단순화하면 우리가 파병을 거부해도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동맹국 안전을 보장해 줘야 한다. 그 것이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는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한·일 갈등의 해법으로 미국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파병이 유효하지도 않다. 일본은 자위대 파병을 사실상 결정했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 이슈만 놓고 따지면 미국 입장에서 한·일은 무차별하다. 우리의 파병이 유인책이 될 수는 없다는 의미다. 강장관이 한·일 문제 해결을 위해 유창한 영어로 'fully supprtive'를 외쳤다면 우리 정부의 외교 전략은 재점검 돼야 한다.
볼턴은 한·일 갈등과 관련해선 "양국이 외교로 풀어야 한다"고 했고, 중국·러시아 폭격기의 영공 침범에 대해서는 "재발시 긴밀히 협조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마나한 정치적 수사들이다.
이날 중국은 '신시대 중국 국방'이란 제목의 2019년 국방백서를 공개했다. 미국이 한국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배치한 것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균형과 안보이익을 크게 훼손한다는 게 골자다.
6개 부문으로 구성된 국방백서 중 1부 ‘국제 안보정세’ 부문엔 "세계 경제와 전략의 중심축이 아태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이 지역이 대국 게임의 초점이 돼 지역 안보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고 기술돼 있다. 동시에 "미국은 아태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군사 배치와 관여를 확대해 아태 지역 안보에 복잡한 요소들을 더하고 있다"고 써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후 침묵했던 중국이 처음 입을 뗀 것이다. 겉으로는 미국을 언급했지만 사실상 우리에 대한 경고다. 중국은 우리가 사드를 없앨 때까지 압박할 것이라는 게 중국 소식통들의 전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