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광신이 상식을 이길 것인가?

2019-07-2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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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신과 상식의 싸움에 있어서 후자가 승리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스티븐 핑커]

 


<정숭호의 책에서 책으로 9. S. 핑커, 『인간 본성의 선한 천사』>

‘프랑스 지성의 전당’ 아카데미 프랑세즈 최초의 여성 회원 마르게리트 유르스나르(1903~1987)의 1인칭 소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의 화자(話者) 하드리아누스(76~138, 로마 14대 황제, ‘로마 5현제’의 한 명)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이 담긴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낀 인문주의자였다. 유르스나르의 소설 속에서 하드리아누스는 아테네에 그리스 문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려던 계획이 초기 기독교 성직자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상식은 광신의 상대가 안 된다!”고 한탄했다.

하드리아누스가 한탄한 광신(狂信)은 그 후에도 상식을 이길 때가 많았다. 종교, 신앙에 국한됐던 하드리아누스 때의 광신은 인간 정신 곳곳에 침투해 이성을 마비시켜 사실을 사실로 못 보게 하고, 바른 판단을 방해하고, 진보를 늦춰왔다.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한·일 양쪽 모두에서 상식보다는 광신이 앞서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다가 하버드대학 심리학 교수 스티븐 핑커(1954~ )의 2013년 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떠올랐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고, 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게 인간임을 증명하려 한 이 책에서 핑커는 상식과 광신의 관계를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통계에 무지하고 도덕에 불감증인 사람이 많다”는 말로 광신은 통계와 자료가 뒷받침하는 객관적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나며, 그것을 악용하는 무리가 있음을 암시했다.

핑커는 “세상은 살 만하게 변해왔으며, 앞으로도 인류는 발전하고 번성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는 방대하고 다양한 통계를 제시, 이 예측을 뒷받침한다. 그중 하나가 ‘전쟁 희생자 통계’다. 이 통계에 따르면 “국가가 성립되기 전인 1만여년 전에는 세계 인구의 15%가 전쟁으로 사망했다. 20세기에는 인구의 0.7%가 전쟁으로 죽었다. 특히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전쟁이 눈에 띄게 줄어서 1980년대에는 세계 인구의 0.01% 미만이, 21세기엔 0.001% 미만이 전쟁으로 죽었다.”

20세기 인류는 예전보다 훨씬 안전한 삶을 누렸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 대한 기억 때문에 사람들이 20세기를 최악의 세기라고 믿고 있다는 게 핑커의 분석이다. 그는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발전과 확산으로 인권에 대한 의식이 발전하고, 생산과 교역이 증대한 것이 인류의 삶을 지속적으로 개선해왔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은 ‘가용성 휴리스틱(Possible Hueristic, 먼 과거보다는 가까운 과거를 더 잘 기억하는 속성)’이 사람들의 눈을 가려 통계가 뒷받침하는 객관적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칭기즈칸의 침략 전쟁이 훨씬 잔혹하고 무시무시했는데도 가용성 휴리스틱 때문에 사람들은 지난 세기의 전쟁을 사상 최악의 전쟁이라고 생각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핑커를 낙관주의의 대표자로 만들었다. 몇 해 전에는 ‘인류는 진보할 것인가, 퇴보할 것인가’가 주제였던 국제 토론회(멍크토론회)에 나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독자가 많은 스위스 출신 저술가 알랭 드 보통 등 비관주의자들과 맞선 이 토론회에서 더 많은 청중이 핑커 편에 섰다. 인간 본성이 선한 것도 이유겠지만 그가 제시한 자료와 통계가 반대편의 그것보다 더 객관적 사실에 충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는 100만 권, 우리나라에서는 올 4월 출간된 번역서가 지금까지 8만 권 팔린 <팩트풀니스>의 저자들도 핑커의 주장을 이어간다. ‘사실충실성’이라고 번역되는 ‘팩트풀니스’는 ‘사실로 사실을 판단하자’는, 저자들이 새로 만들어낸 단어다. 이 책은 극빈층 비율, 기대 수명, 재해 사망자 수, 예방 접종 등 각 분야에서 세상이 얼마나 나아졌는가를 묻는 13개의 테스트로 시작한다.

다음은 테스트 중 하나다.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A.거의 2배로 늘었다. B.거의 같다. C.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C가 정답(팩트)인 이 문제를 맞힌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7%밖에 안 된다. 가장 정답률이 높은 스웨덴조차도 25%밖에 안 된다.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답비율은 더 낮다. 고작 4%에 불과하다.)

이 책 공동저자인 안나 로슬링은 얼마 전 국내 언론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팩트에서 벗어난 부정적 세계관을 갖게 된 이유로 이분법적 사고를 만들어내는 ‘간극 본능’ 등 두뇌의 인지 오류 10가지를 제시했다. 로슬링의 말을 옮겨본다.

“이 세계의 91%가 이미 중간 소득 국가에 살고 있지만, 우리 두뇌는 여전히 세상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두 개의 간극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간극 본능이다. ‘공포 본능’과 ‘부정 본능’은 극적이고 선정적인 뉴스에 반응한다. 2009년 신종플루로 수천 명이 사망했을 때, 언론은 이 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는 6만3066명이었다. 로슬링에 따르면 눈앞의 숫자만 과장해서 현실을 왜곡하는 ‘크기 본능’, 위기의식과 스트레스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끌어내는 ‘다급함 본능’도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판단을 방해하는 ‘팩트풀니스’의 적이다.”

최악의 한·일관계에서 일본을 극복하고 견디려면 오직 사실, 객관적인 사실로 맞서야 한다. 우리가 상식과 사실을 제시해야 일본이 움츠러든다. 그러나 일본을 이기자고 주장하는 SNS에는 사실보다는 단순한 감정 표출이 많다. 상대방이 구체적 자료를 바탕으로 제시한 주장을 반박하고 반대하려면 그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할 자료를 제시해야 할 텐데 감정적 언사와 편 가르기를 부추기는 언사로 상대방을 조롱하고 경멸하는 게 많다. 광신이 표출되는 징조다. 결국 이번에도 광신이 상식을 이기고,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우리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 건가?

“영국 밖에 모르는 사람이 영국의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책에서 책으로’에서 이미 소개한
영국 역사학자 토니 주트는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로 남아 있지 말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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