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기자라 그런가. 몇개월 전 우연히 TV에서 영화 ‘더 포스트’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흥분했다. 피가 끓었다고나 할까. 좋아하는 배우 메릴 스트립이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으로 분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1971년 ‘펜타곤 페이퍼’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의 분투 과정이 박진감 있고 정말 쫄깃했다. 펜타곤 페이퍼는 4명의 미국 대통령이 30년간 숨겨 온 베트남전쟁의 비밀이 담긴 정부기밀문서다. 왕왕 권언유착이 지탄을 받지만 본디 권력 감시는 언론의 임무다. 이 보도로 당시 지역신문에 불과했던 워싱턴포스트는 뉴욕타임스 반열의 정론지로 우뚝섰지만 2013년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에 넘어간다. 이 사건은 한국에도 ‘종이신문의 쇠락'을 알리는 대표 사례로 거론되며 충격을 주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지금 워싱턴포스트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궁금했다.
지난 6월 초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71차 세계뉴스미디어총회(WNMC2019: World News Media Congress 2019)는 평소 궁금했던 내용이 가득했다. 현장을 다녀온 언론의 보도를 종합해보면, 언론의 지속가능성과 수익창출 모델 등 미디어의 혁신과 생존 전략 등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여러 콘텐츠를 엮은 멀티미디어 패키지와 새로운 스토리텔링 개발, 다큐멘터리 제작, 데이터 그래픽, 팟캐스트와 소셜플랫폼 활용이라는 6가지 혁신을 통해 뉴스를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독자들에게 도달시킬 것인지를 실험하고 있다. 결국 ‘인터넷에서 뉴스는 무료’라는 인식을 뒤집는 이 실험의 현재 결과는 고무적이다. 채 4년이 되지 않은 2017년 초 100만 유료 독자를 달성한 워싱턴포스트는 디지털 혁신을 계속하고 있다.
전 세계 언론에 ‘과감하게 혁신할 것인가, 관망하다 무너질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 2014년 '혁신보고서'로 한국 언론에 디지털 혁신의 교본으로 인식되는 뉴욕타임스 역시 발군이었다. 뉴욕타임스도 2000년대 들어 지면광고 매출이 급감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이들이 내놓은 타개책은 ‘기사 유료화’였다. 2014년 보고서에서 “저널리즘에 투자해 수백만명이 기사를 보기 위해 결제하게 하겠다”고 공언한 이들은 4년 뒤인 2018년 말 입증해 보였다. 유료 구독자 수가 430만명이다. 사상 최대인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가운데 79%인 340만명이 디지털 구독자라는 사실이다.
총회 대담에서 뉴욕타임스 마크 톰프슨 최고경영자(CEO)는 2025년까지 유료 구독자 수를 1000만명까지 늘리겠다고 했다. 이 야심찬 목표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지향점이었다. “변화의 속도를 높이고 꾸준히 혁신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핵심은 최고의 저널리즘을 제공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뉴스와 칼럼, 기획기사를 생산하는 회사다. 뉴스룸에 투자해 지면을 잘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최고의 제품을 선보이면 독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다.”
디지털 혁신에서 앞서가는 세 언론사 사례를 보면서 강화되는 생각은 세 가지다. 역시 최고의 저널리즘 추구가 위기 타개 전략의 요체같다. 디지털 세상의 독자에 맞추는 노력도 필요하다. 뉴스룸에서 기자뿐 아니라 엔지니어와 그래픽디자이너 같은 IT 기술자와의 협업이 선택 아닌 필수인 세상이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독자’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게 할 수 있을까. 한국 언론이 서비스 제공자로서 진화가 멈춰버린 것은 뉴스의 직접 유통 공간을 플랫폼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부터다. 뉴스소비자와 멀어진 것이다. 소비자와의 접점이 이격되면서 보도품질이 낮아지고 경영위기가 따라 오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