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불편함의 정체는 이것, '극빈충(極貧蟲) 생태 보고서'

2019-06-1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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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영화와 객석 사이에 그어놓은 선(線)을 스멀스멀 기어 넘는 듯한 기분이었달까. 대중의 일감(一感)은 '불편함'이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의 내실(內實)을 증명하듯 개봉 17일 만에 800만을 넘긴 이 영화는 2019년 대한민국 앞에 벌레 2종을 선물했다. 기생충과 바퀴벌레다(이하 영화 스포일러 주의).
제목에만 등장하는 ‘기생충’은 빈자 가족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은유다. 영화가 개봉된 뒤 뜻밖에 ‘기생충박사’ 서민 교수(단국대 의대)가 인터뷰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양극화와 기생충에 대한 질문을 받자, 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1960년대까지는 빈부 관계 없이 기생충이 있었지요. 그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생충을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부자라고 할 수 있죠. 생선회나 육회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많으니까요. 기생충도 양극화된 겁니다.”

이 엉뚱한 대답은 영화의 메타포를 충실하게 설명하는 말이 됐다. 부자의 몸 속에 들어와 살며 음식의 영양분을 몰래 가져가는 매우 작은 생물인 ‘빈자’의 생태계가 생긴 까닭을 대강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생(寄生)은 숙주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생물이다. 거기에 충(蟲)이라는 말이 붙으면 욕설에 가깝다. 자신의 노력없이 다른 존재가 일궈놓은 것을 몰래 훔쳐 먹으며 살아가는 더부살이인 만큼 딱 봐도 부도덕해 보이는 행태다. 하지만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기생충을 읽는다. 사회가 공정한 링이 아니고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에 스스로 먹고살 방도를 잃은 존재라면? 이 기생충은 비난받아야 하는가.

영화의 전반은 기생충의 잠입 보고서라 할 수 있다. 해충 박멸을 위해 날아드는 소독가스에 창을 열고, 제 몸을 소독하는 가족. 기생충의 역설이다. 이웃의 와이파이에 기생하며 휴대폰을 쓸 만큼 적빈(赤貧)의 가족. 그 아들은 부잣집에 과외를 할 행운을 얻는다. 정상적인 기회는 아니고, 위조와 위장을 통해서이다. 비상한 머리와 재빠른 동작으로 1차로 숙주 속에 안착한 그에 이어, 가족 모두가 기민한 동작으로 각기 다른 명찰을 달고 부잣집에 빨대를 꽂는다. 이들의 가난이 ‘능력’ 부족이었나 싶을 만큼 빠른 두뇌회전은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 기생충들에겐 도덕이나 상식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기와 트릭, 누명 씌우기와 약점 잡기 등 악행이 거침없이 저질러진다. 가난한 자를 가엾은 시선으로 보는 대신, 양극화 생태계 속에서 기민하게 최적화한 괴물로 읽는 시선. 이것이 봉준호가 견지하고 있는, 빈자에 대한 가차없는 시선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기생충 2라운드가 펼쳐진다. 이 숙주를 선점하고 있던 기생충 부부다. 가정부는 알고보니 사업 부도를 낸 남편을 지하에 숨겨놓고 생명을 영위해온 원조 기생충이었다. 선점자를 간계로 내쫓으면서 완전히 차지한 줄 알았던 숙주를 놓고 처절한 쟁탈전이 벌어진다. 빈부가 초격차로 벌어지면서, 이른바 없는 자들끼리 치고받는 빈적빈(貧敵貧, 가난의 적은 가난)이 된다. 영화에서, 부(富)는 약간 멍청하고 부주의하고 오만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선(善)에 가깝게 느껴지는 까닭은 저택의 지하에서 벌어진 빈빈(貧貧) 혈투에 카메라가 오래 머물러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 기생전쟁은 양극화가 정점에 이른 사회의 웃지 못할 묵시록이다. 그러니 빈자들의 이런 간증이 가능해진다. “박 사장 부부는 착해. 부자니까 착할 수 있지. 이 집 애들은 구김이 없어. 돈이 다리미니까.”

이제 후반전인 바퀴벌레 섹션을 들여다볼 차례다. 3억5000만년이나 살았다는 벌레. 바퀴 달린 듯 빠르다는 특징을 지닌 이 벌레는 왜 인간에게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는지 불가사의다. 인기척만 나면 꽁지가 빠질 듯 내빼는 이 벌레를 인간은 선험적인 적개심이라도 지닌 듯 달려가 때려죽인다. 바퀴벌레의 원죄는 자신이 차지해선 안 될 공간을 함부로 누빈다는 점이다.

바퀴는 상당한 지능이 있어서 순간적인 판단력이 뛰어나다고 하며, 꼬리쪽에 진동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이 있어서 반사적으로 도주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런 특징을 절묘하게 묘사한 것이 박 사장네 저택에서의 기택네 파티다. 아내 충숙이 남편에게 술김에 ‘뼈때리는 팩폭’을 한다. “박 사장네가 지금 당장 돌아오면 네 아빠는 바퀴벌레처럼 여기서 빠져나갈 거야.” 이 말로 부부는 장난 같은 싸움을 한판 벌이지만, 곧 현실이 되고 만다.

봉테일(봉준호 디테일)이 그려놓은 바퀴벌레 엑소더스는 세계를 놀라게 한 장관일 것이다. '짜파구리'를 끓이는 시간 안에 어질러진 술판 모두를 원상태로 돌려놓고 바퀴벌레처럼 가뭇없이 퇴장해야 하는 이들은, 그러나 완료 직전에 등장한 주인가족들을 피해 테이블 아래로 숨는다. 이 또한 바퀴의 패러디다. 그 환장할 밤에 테이블 아래서 숨을 죽이며, 사장네가 소파에서 벌이는 정사를 귀와 코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관객이 문득 위기의 바퀴벌레로 감정이입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주인이 잠든 틈을 타서 기어나와 탈출하는 바퀴벌레 가족은 ‘기생충’이라는 생계적인 정체성을 넘어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 동작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것은 양극화가 만들어낸 절망의 빈자가 어떻게 자신의 출구를 만들어 왔는지를 냉소적으로 그려내는 대목이다. 가난은 누추함을 넘어, 인간 존엄을 포기하는 저 바퀴벌레 바닥 헤엄질로 줌업된다. 감독이 인간 바퀴를 형상화하기 위해 고민했을 '촬영'을 생각하면 소름이 살짝 돋는다. 영화는 기생충 잠입기로 시작해서 바퀴벌레 탈출기로 끝난다.

지난 3월 국세청이 분석해 내놓은 통합소득(근로소득과 종합소득) 자료(2017년)에서는 상위 0.1% 소득자(2만2482명)의 평균 연소득은 14억7000만원이었다. 중위소득(소득순으로 나열했을 때 중간에 위치하는 사람들)은 2300만원이었다. 대충 따져봐도, 0.1%가 64배 많다. 이런 부자들이 강남빌딩과 초고급 외제차 행렬, 초호화 예식장과 쇼핑가 VVIP룸을 누빈다는 얘기다.

양극화 문제를 다룬 소설 ‘천년의 질문’을 출간한 조정래 작가는 지난 11일 “월남전 특수로 엄청난 돈을 벌었던 기업들이 정부의 입을 빌려 지금껏 참아달라고 했지만, 소득격차는 더 심해가고 부패지수는 심각하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소설에서 정답은 스웨덴 모델에 있다고 말한 것에 마치 화답하듯, 문재인 대통령은 14일 스웨덴 의회에서 안드레아스 노를리엔 의장을 만나 “한국은 미국식 발전모델로 높은 성장을 이뤄냈지만 극심한 양극화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스웨덴식 분배정책을 벤치마킹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빈부 초격차에 대한 정부의 문제의식과, ‘기생충’이 냉소적으로 스캔하는 풍경은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정부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늦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듯하다. 기생충과 바퀴벌레 현상은 이미 정점을 지나버린 양극화의 초상이다. 부자들의 일그러진 삶은 많이 보아왔지만, 빈자들이 괴물로 살아가는 현장을 찍어낸 건 이 영화의 공로다.  정부가 경기 하방 속에서 더욱 악화되고 있는 양극화를 원론적 처방 이상으로 풀어갈 힘이 부족해 보이기에 영화 '기생충'은 더 리얼하게 느껴진다. 봉준호가 수백만 국민에게 동시에 ‘공급’한 극빈충(極貧蟲) 리포트는 양극화의 절망적 고착화를 찍어냈다. 불편함의 정체는 이것이었을까.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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