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12-4] 문학에서도 무궁화는 피지 않았습니다.

2019-04-1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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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355수의 옛 시조 중 무궁화를 읊은 시조는 단 한 수도 없는데

1600~1912년 일본, 무궁화를 노래한 유명 하이쿠 575수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나비야 청산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가자
가다가 날 저물면은 꽃 속에서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커든 잎에서라도 자고 가자

<무명씨>

앞서 우리는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고려사』·『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 한국 6대 대표 사서에 무궁화가 단 한 번, 그것도 단명의 의미로 단 한 글자만 나오는데 크게 경악했고 깊이 실망했다.

그리하여 “꽃에서 푸대접커든 잎에서라도 자고 가자” 의 나비가 된 심정으로 우리 역사에서 푸대접 받은 무궁화를 문학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별이 천상의 아름다운 시(詩)라면 꽃은 지상의 아름다운 시다”라는 옛말이 있듯,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지상의 다종다양한 꽃을 소재로 삼아 인간과 자연과 합일을 노래했다. 한국문학에서 자연이 가장 중시되었던 시대는 조선시대 문학이고 그중에서 상하 귀천 구별없이 자연을 노래했던 문학 장르가 시조다.
 
그런데 이런 한민족 고유의 꽃이라는 무궁화를 읊은 한민족 고유의 시조는 단 한 수도 없다. 수상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수상한 건 역사와 문학의 시공에서 무궁화 실종의 핑계를 조선 시대 왕실화(?) 오얏꽃(李花·자두나무 꽃)에 대고 있는 국내 대다수 문헌들이다.

앞에서 톺아보았듯이 성리학을 숭상한 조선에는 애당초 왕실화가 없었고 오얏꽃은 1899년 6월 이후 대한제국의 황실화였다. 설령 오얏꽃이 조선의 왕실화였다손치더라도 무궁화와 오얏꽃은 서로 같은 하늘을 이고 필 수(開花) 없는 ‘불공대천지 꽃’이라도 되는가? 오얏꽃이 무궁화를 유괴라도 했단 말인가?

◆총 3355수의 옛시조 중 무궁화를 읊은 시조는 단 한 수도 없다.

필자는 조선시대 3대 시조집 『청구영언』 580수, 『해동가요』 883수, 『가곡원류』 856수 포함 고려중엽부터 구한말까지 옛시조 3355수를 전수 분석해봤다.

꽃 종류별 출현 빈도 수를 순위별로 나열하면 이렇다. 1위는 단연 복숭아꽃(도화·桃花)으로 71수에 달한다. 복숭아꽃에 이어 2위 매화(38수), 3위 국화(29수), 4위 살구꽃(22수), 5위 배꽃(21수), 6위 오얏꽃(20수), 7위 연꽃(19수), 8위 난화(9수), 9위 해당화(8수), 10위 갈대꽃(7수) 등 모두 37종의 꽃이 등장한다. 하다못해 벼꽃, 콩꽃, 등꽃, 함박꽃도 출현하는데 민족 고유의 꽃이라는 무궁화는 자취도 없다.

국내 문헌들에 의해 무궁화 실종에 대한 혐의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오얏꽃은 고작 6위에 올라있다.

고려시대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고려속요에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무궁화가 또 서민과 양반 할 것 없이 읊어왔던 조선의 시조에도 단 한 수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무궁화가 한반도에 처음 문자로 등장한 것은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때 배재학당 학도들이 부른 ‘무궁화 삼천리’ 후렴의 애국가에서부터 등장하였다. 『배재 팔십년사(培材八十年史)』에 따르면 무궁화 삼천리 가사는 윤치호(이토지코, 대한제국의 정책결정권을 일본에 상납한 제1차한일협약 체결자, 일본제국의회 귀족의원, 부자(父子)가 친일인명사전 등재된 유일한 종일매국노)가 작사했고, 곡조는 벙커(D.H. Bunker)가 편곡한 것이다.

일제와 윤치호 등 종일매국노들의 책동과 위협에 의해 문무관의 복식(復飾)에 처음으로 무궁화가 수식(繡飾)된 것은 1900년 칙령 제14호가 반포된 이후이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1906년(광무 10년) 무궁화꽃을 대부분 오얏꽃으로 환원했다.

오얏꽃의 죄는 대한제국의 황실화라는 것이다. 일제와 종일매국노의 하이에나 떼들에 맞서 끝까지 싸운 지독하게 고독했던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황실화였기 때문이다.

비단 시조뿐만이 아니다. 기원전 2333년 10월 1일(개천절) 단군 왕검 개천 이후 1896년 11월 21일 윤치호의 ‘무궁화 삼천리’ 애국가 등장까지, 4230년간 그 많은 신화, 전설, 설화, 향가, 고려속요, 소설, 가사, 민담, 야설, 속담, 격언에도 무궁화는 단 한 번도 단 한 음절도 나오지 않는다.

◆BC2333년~19세기초 무궁화를 직접 읊은 우리 한시(漢詩)는 단 한 수도 없다

이처럼 역사에서도, 문학에서도 무궁화가 옛 우리나라 시공에서 서민들의 사랑받은 증거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혹시 지배층에서는 무궁화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고려와 조선의 상류층의 전유물 한시(漢詩)를 들여다보자.

고려(936년~1392년) 457년간 무궁화를 읊은 사람은 최충(崔沖, 984~1068),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이규보(李奎報,1168~1241년), 이제현(李齊賢 1328~1396) 모두 네 사람 뿐이다. 세 사람은 각각 한 번씩, 이규보는 두 번 언급했다. 고려시대 통틀어 무궁화를 소재로 한 한시는 총 5수, 그마저 모두 직접 무궁화를 소재로 하여 읊은 게 아니다.

최충의 「시좌객(示座客)」에서 “붉은 무궁화와 석류는 맵시 또한 곱구나”(紅槿丹榴能亦姸)와 이인로의 「과어양(過漁陽)」에서 "무궁화가 나직이 푸른 묏부리를 비추네(槿花低映碧玉峯)", 이규보의 「5월 6일 계림자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五月六日飮鷄林子家)」에서 ‘매화와 무궁화 가지 꺾으니 향기가 나네’ 는 모두 중국의 한시를 차운하여 시를 지은 것이다.

이규보의 「문장로(文長老)와 박환고(朴還古)가 무궁화를 논평하면서 지은 시운(詩韻)에 차(次)하다」라는 긴 제목의 시가 있다.

떨어져 내린 모습 차마 보기 역겨워(不忍見落後)
그 이름 '무궁'이라 억지로 지어본들(反以無窮名)
무궁한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으랴(倘可無窮有).


이 한시가 무궁화를 시제로 하여 읊은 최초의 시문이자 무궁화(無窮花)란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이기도 하다. 이 한시 역시 중국의 옛날 고사를 인용하며 시운을 본따 지은 것이다. 이제현의 「고정산(高亭山)」 “사람 사는 집은 곳곳이 무궁화 울타리로구나(人家處處槿花籬)” 문구 역시 그가 원나라 체류중에 중국 남방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제 조선(1392~1897년)시대 무궁화를 소재로 읊은 한시를 살펴보자.

태조 이성계가 개국한 1392년부터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수립한 606년, 강산이 60회 이상 변하는 장구한 세월 속에 무궁화 소재 한시를 지은 이는 서거정(徐居正1420~1488년), 유몽인(柳夢寅, 1559~1623년), 윤선도(尹善道 1587~1671년) 김려(金鑢, 1766∼1822년)와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송옹((淞翁생몰연대 미상)등 모두 여섯 사람 뿐이다.

더구나 고려시대와 같이 서거정의 「홍근화(紅槿花)」 유몽인의 「상부(霜婦)」, 윤선도와 김려의 「목근(木槿)」 모두 직접 무궁화를 읊은 게 아니라 중국의 시를 차운한 것이다.

◆두 선인은 일본인 혼네(本心)의 꽃- 무궁화의 비밀을 선각(先覺)했을까?

다산 정약용이 소동파(蘇東坡, 1037~ 1101년)의 시 「정혜원 해당(定惠院 海棠)」에서 차운하여 그의 시우(詩友) 송옹(淞翁)에게 보내는 한시와 송옹이 이에 화답한 한시가 직접 무궁화를 소재로 읊은 한시가 조선시대 뿐만 아니라 구한말 이전 반만년 우리 역사상 무궁화를 소재로 한 유이무삼(有二無三)한 시문이다.

이 희귀하디 희귀한 두 시문은 다산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시문집에 실려있다.

온갖 꽃 유월이면 다 범목이 되어 버리는데(百花六月皆凡木)
무궁화 홀로 다르다고 스스로 뽐내고 있네(木槿自言唯我獨)
외롭게 향기 뿜어 꽃 없는 때를 이어 주어서지(爲是孤芳能繼乏)
전혀 곱지도 않고 탈속한 모습은 더욱 아니네(非關絶艶尤超俗)
아름답고 화려함을 도리(桃李)와 겨루게 한다면(令與桃李鬪姸華)
천박한 자질에다 활기도 없어 빈 골짜기에 버려지리(薄質消沈委空谷)
<중략>
꽃잎을 접시꽃에 비하면 참으로 쓸떼가 없고(脣比戎葵眞畵蚷)
밑둥은 동백나무 비슷하나 그만도 못하도다(跋如山茶猶刻鵠)
조물주의 안배가 각각 신묘에 달했으니(造物安排各臻妙)
마음속에 번뇌를 가질 필요 없다오(不須煩惱紆腸曲)
내 시가 완곡하게 경멸한 것 아니지만(吾詩宛轉不輕貶)
행여 꽃의 마음을 거슬렸을까 염려되누나(或恐芳心有相觸)


다산은 무궁화를 ‘천박한 자질에다 활기도 없어 빈 골짜기에 버려지리라’며 저주에 가까운 악평을 내리고 있다.

그러면 평소의 다산답지 않은 매우 이례적인 다산의 한시에 화답한 송옹의 한시 「열수(洌水)의 무궁화를 읊은 시에 화답하다(和洌水詠木槿花)」를 살펴보자.

두릉원 안에 있는 천 그루 나무들은(斗陵園裏千章木)
곧게 서서 그윽함을 자랑하려 하지 않는데(挺挺不肯媚幽獨)
온갖 초록 무성한 그늘 짙은 유월에(萬綠葱篟六月陰)
너무나도 촌스럽고 속된 무궁화만 피었구나(只有槿花花太俗)
비열한 자질로 좁은 땅에 의탁함도 다행이거늘(幸以卑質託迮地)
어찌 아름다운 꽃이 빈 골짝에 피어남과 같으랴(豈如孤艶生空谷)
울타리 가에 둘러선 것이 제격에 알맞지(周遭政好逼仄籬)
그 번잡함이 고명한 집엔 어울리지 않네(繁縟不宜高明屋)
비유컨대 서투른 화가가 미인을 그렸는데(譬如庸工寫美人)
자태는 볼품없고 살만 많은 뚱보와 같네(姿態却少惟多肉)


특히 마지막의 “서투른 화가가 미인을 그렸는데 자태는 볼품없고 살만 많은 뚱보와 같네"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악평이다.  무궁화 꽃만이 아니다. 젊은 시절 시조 짓기를 좋아해 시조 시인 소리를 듣기도 한 필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꽃에 대해 이처럼 악평을 퍼붓는 운문을 본 기억이 전혀 없다. 다산과 송옹, 두 선인은 일본인 혼네(本心)의 신화(神花) 무궁화의 비밀을 선각(先覺)했던 것일까?

◆1600~1912년 일본, 무궁화를 노래한 유명 하이쿠 575수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우리에게 시조가 있다면 일본에는 하이쿠(俳句, 5·7·5의 17음절로 구성되는 일본 고유의 짧은 시)가 있다.

일본 에도(江湖, 1600~1868)시대부터 메이지(明治, 1868~1912)시대를 대표하는 하이쿠의 3대 거장 모두 무궁화를 노래했다.

“길섶의 무궁화 아차 순간에 말이 먹어치우고 말았네” (道のべの木槿(むくげ)は馬に食は(わ)れげり)
<하이쿠의 신(神)이라 불리는 마쓰오 바쇼(松尾芭蕉)(1644~1694), 1684년 작>

이 마쓰오 바쇼의 대표 하이쿠라고 할 수 있는 17자를 새긴 무궁화 시비(句碑)가 마쓰오 바쇼의 고향인 도치키(栃木)현에 세워져 있다. 이 시비 말고도 무궁화를 읊은 유명 하이쿠 시비 수십여 개가 일본 전역에 세워져 있다.

“그래 저래도 그날 일몰이구나 붉은 무궁화(それがしも 其の日暮らしぞ花木槿)
<에도 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하이쿠의 거장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1763~1827) 1799년 작>

“무궁화가 피고 화가의 집을 묻는 미시마신사 앞”(木槿咲て繪師の家問ふ三嶋前)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하이쿠의 개혁 시대를 불러온 마사오카 시키 正岡子規(1867~1902) 1897년 작>

특히 일본 최초의 무궁화 오타쿠(御宅)가 의심될 정도로 무궁화를 소재로 한 마사오카 시키의 유명 하이쿠는 20여수가 넘는다.

메이지유신(1868년), 욱일기의 일본제국 육군기 최초 채택(1870년), 일장기 공식 행사시 최초사용(1872년) 등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무궁화를 소재로 하이쿠는 봇물이 터진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초까지 무궁화 소재 유명 하이쿠 575수가 일본 열도를 흥건히 적셔 ‘일본 무궁화 문학의 감격시대’를 구가했다. (다음편에 계속)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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