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인물의 서사를 그려내던 류준열에게도 '때'가 찾아왔다. 은유나 비유 없이 온전하게 한 인물의 '흥망성쇠'를 그려나가는 이른바 '일대기'를 맡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 '돈'(감독 박누리)은 류준열이 그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투해온 것들을 한데 엮어놓은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순진무구했던 조일현이 겪는 일련의 과정과 변화는 류준열이 지난 작품들에서 얻어온 캐릭터들의 서사였으며 단단하게 구축해왔던 인물의 디테일이기도 했으니까.
"밀도 있게 연기하려고 애썼어요. 단순히 '돈 앞에서 나약해졌다'는 인상보다 그 이유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싶었죠. 바르고 올바른 사람이었던 일현이가 '돈맛'을 보고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래 걸리는 모습을 실제감 있게 보여주려고요."
"마지막 장면에서도 감독님과 호흡이 잘 맞았다고 느꼈던 게 일현이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그려지는 게 아니라 지하철 유리가 비춰져서 보이잖아요. 불분명하게 보여지는 게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씁쓸하다' '아쉽다'도 느껴지게 할 수 있지만 '아쉽다' '다 쓸 걸 그랬나?'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도 할 수 있잖아요. 여러 가지 감정이 들면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죠."
류준열은 언제나 캐릭터를 '백지화' 시키고 차근차근 밑바탕부터 그려나갔다. 보이지 않는 것부터 설정, 인물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디테일을 완성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돈'이라는 것을 보는 제 감정을 깨닫고 싶었어요. 십원짜리부터 백원, 오백원, 천원, 만원, 오만원 등등 화폐 단위를 싹 뽑아서 늘어놓고 차분히 지켜봤죠. '왜 우리는 이것에 목을 매고, 울고, 웃을까?' 그런 걸 고민하는 순간을 가졌던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 같아요. 돈을 늘어놓고 가만히 지켜보는 순간은 또 없으니까. 그런 사소한 행동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거 같아요."
이런 사소한 고민은 차곡차곡 쌓이고 하나의 '결'을 만든다. 류준열의 연기는 이러한 '결'이 있다. 그는 이번 작품, 이번 캐릭터에서 주목한 것은 '관계성'에 있다며 "돈보다 관계가 무너지고 망가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부모님과 나, 친구와 나, 여자친구와 나, 동료와 나 등등. 관계가 망가지고 피폐해지는 것에 주목하고 집중했어요. '돈'에 나를 빼앗기는 계 아니라 '관계'를 빼앗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그게 일현이를 만드는 중요한 키워드기도 했고요."
"일현이를 만드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말이 흥미로웠다. 그는 대화 도중 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바로 '시간'과 '결' '몰입'이 만들어준 일현이라는 인물에 관해서였다.
"영화를 순서대로 찍으면 좋겠지만 가끔 중요하지 않은 장면은 나중에 미뤄두고 나중에 찍기도 하잖아요. 그게 돈을 많이 벌고 성격도 바뀐 일현을 한창 연기할 때였는데, 다시 순진무구한 일현이를 찍어야 하는 순간이었어요. 머리 기장도 똑같고 분장도 똑같이 했는데 아무리 찍어도 그 얼굴이 아닌 거예요. 스태프들이 술렁술렁하더라고요. 그 얼굴도, 눈빛도 아니어서. '뭐야? 살이 빠진 거야?'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어요. 중요한 장면도 아니었고 촬영이 어려울 거 같다고 판단해서 결국 그 장면은 삭제됐어요. '내가 뭘 잘못했나' 걱정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내가 잘 몰입했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기도 하더라고요."
평소 '연기'에 있어서 자신과 캐릭터를 동일시시키곤 한다는 류준열에게 "조일현과 류준열의 공통점"에 관해 물었다. 이번 캐릭터는 류준열의 어떤 '요소'를 녹여낸 걸까?
"전반적으로 저의 모습이지만 아주 작은 것부터 꺼내 쓰도록 해요. '아, 내게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어떤 기분이었지?' 느끼려고 하죠. 일현이가 조금 집요한 구석이 있는데 저도 약간 그렇거든요. 거기에 아날로그적인 부분도 조금 있고. 요즘 이 아날로그적 성향과 디지털적인 시대를 어떻게 밸런스를 맞추느냐를 고민하고 있어요."
"맡은 바를 충실히 해내면 되던 때"가 있었다. 조연배우에서 주연으로 그리고 원톱배우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성실히 지금의 자리에 올라오게 된 류준열이지만 '부담감'이라는 게 없을 수는 없을 터.
"고민도 많고 걱정도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요. 이런 상황을 즐기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살다 보면 다음 영화가 찾아오겠죠. 찾다가, 안 찾다가, 분석하고…. 그러다 보면 추억도 쌓이니까. 그게 재밌어요.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는 건 제 앞을 걸어가는 선배님들. 선배님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 한 선배님께서 '난 영화를 찍고 소주 한 잔 하는게 그렇게 좋아. 그 맛에 영화를 찍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 저렇게 부담없이 영화를 찍어야하는구나. 그러면 되는구나 싶었어요. 무게감도 느껴지지만 깨닫는 것도 많아서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