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비서실장은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권력 ‘2인자’다. 청와대 비서실을 지휘·통솔하는 컨트롤타워이기도 하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우리나라만큼 대통령 비서실장이 파워가 있는 나라도 드물다. 오죽하면 ‘왕실장’이라는 별칭까지 붙었을까.
역대 대통령비서실장을 보면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 정권이 이루고자 하는 국정방향, 임명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유형이 나뉜다.
대통령 5년 단임제 실시 후 27명의 비서실장이 청와대를 거쳐 갔는데 국회의원(14명) 출신이 가장 많고, 관료(5명) 학자(5명) 언론인 등(3명) 순이다.
비서실장이 차지하는 정치적 상징성도 중요한 인선 기준이 됐다. 아울러 레임덕이 시작되는 정권 중반에 접어들면 어김없이 최측근 인사를 ‘실세형’ 비서실장으로 기용해 국정장악력을 높였다.
호남과 충청 연합으로 국민의정부를 탄생시킨 고(故)김대중 전 대통령은 초대 비서실장에 대구·경북출신인 김중권 비서실장을 발탁, 국민화합·통합을 강조했다. 집권3년차 이후에는 동교동계 최측근인 한광옥, 박지원 비서실장을 기용했다. 한광옥 실장은 박근혜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으로도 기록됐다.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리는 박지원 실장은 당 대변인,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일했던 실무적 경험을 바탕으로 세간 여론을 듣고 전했으며 정무적 판단이 뛰어났다는 평가다. 박 실장은 대통령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비판적 내용도 서면으로 만들어 “읽어 보십시오”하곤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 놓고 나왔다고 한다.
고(故)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정·청 경험이 풍부한 문희상 비서실장을 초대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2기 비서실장으로는 보수 성향 인사인 김우식 당시 연세대 총장을 발탁했다.
하지만 이후 변호사 시절 동업자이자 오랜 동지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초대 민정수석에 이어 임기 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청와대에서 일하면서 치아 10개를 잃었을 정도로 스트레스와 격무에 시달렸다. 노 전 대통령이 비운의 삶을 마감했을 때도 맏상주로 그의 가는 길을 묵묵히 지켜야 했다. 그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된 첫 케이스로 역사에 기록됐다. 아울러 비서실장 출신의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함께 국정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헌정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자수성가형’으로 카리스마 리더십을 갖고 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조용한 ‘학자형’ 비서실장을 선호했다. 류우익 초대 비서실장에 이어 정정길 비서실장도 모두 학자 출신이다.
류우익 실장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수입 파동으로 취임 후 4개월 만에 퇴진해 역대 초대 비서실장으로서는 최단명의 불명예를 안았다. 류우익 실장이 취임 후 국정원에 가서 전 직원들을 소집해 헌법교육, 일명 사상교육을 했다는 국정원 전 직원의 충격적인 증언도 나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친박계‘ 허태열 초대 비서실장을 기용했으나, 5개월 만에 경질하고, ’친박 원로7인회‘ 멤버로 사실상 권력 배후에 있던 김기춘 비서실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친박 원로 7인회‘는 박 전 대통령을 오랫동안 도와온 원로들의 모임으로 김기춘·최병렬·김용갑·김용환·현경대 전 의원 등이 멤버다. 이들은 박근혜정부 출범 직후 총리와 장관, 청와대 수석들의 인선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당시 75세로 최고령 비서실장으로 기록된 김기춘 실장은 때로는 대통령을 대신해 악역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충성심이 대단했다.
기자들 사이에서 ‘기춘대원군’으로 불렸던 김 실장은 박 전 대통령을 ’주군‘이라고 지칭하는 등 권위주의 시대 봉건적 사고에 ’비서는 입은 있되 말이 없어야 한다‘며 철저히 은둔했다. 기자들의 전화도 받지 않았고, 만나는 일도 없었다. 김 실장이 출입 기자들 앞에 나선 것은 임기 동안 단 두 세 차례 정도다.
김 실장은 2014년 1월 2일 춘추관을 찾아 항간에 떠돌고 있는 개각설을 일축하면서 달랑 세 문장만을 읽고 질의응답도 없이 단상을 빠져나갔다. 단 50초도 걸리지 않았다.
2013년 춘추관 로비에서 열린 출입기자단 송년회에 참석해서도 인사말만을 짧게 한 뒤 쏜살같이 자리를 떴다. 2014년 출입기자단 송년회에는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김 실장의 (송년회 발언) 비보도 요구를 기자단이 거절하자, 김 실장은 물론 수석·비서관들까지 모두 참석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김 실장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을 당한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전락했다. 자신 역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방관한 과오에다 문화계 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돼 구속수감됐다.
'촛불'의 염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50대 초반의 新친문인사인 임종석 비서실장을 초대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탄핵 사태 이후 국정 안정과 개혁을 동시에 요구하는 극단의 혼란 속에서 인수위 없이 출범한 문재인정부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0개월 임기 동안 젊고 신선한 감각과 수평적 리더십으로 청와대에 역동적인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정무 감각과 정책 조정 능력을 바탕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제대로 읽고 실현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또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을 진두지휘하고, 남북정상선언공동이행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남북관계 개선을 이끈 공도 적지 않다.
문 대통령은 집권3년차인 올해 초 ‘새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임 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측근인 노영민 주중 대사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 들였다.
노영민 비서실장 체제로 사실상 2기 청와대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돼 간다. 여권에서는 노영민 비서실장 체제가 시작된 후 청와대 분위기가 ‘일사불란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잇따른 공직기강 해이 사건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린 청와대에 ‘질서’와 ‘규율’을 내세워 ‘군기 반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5060세대와 국문학과 인문대 학생들에게 ‘아세안에 가라’고 언급했다 설화에 휘말린 김현철 경제특별보좌관의 경질도 불과 하루 만에 속전속결로 처리됐다. 앞서 김영배·김우영·민형배 등 구청장출신 3인방을 비롯한 청와대 비서관 4명의 인사 전보도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를 두고 문 대통령이 인사전결권을 노 실장에게 넘긴 것이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노 실장이 청와대 참모진에게 대통령 대면보고도 줄이라고 지시함에 따라 그만큼 실장의 전결권한이 커질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노 실장은 2012년 대선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의 비서실장을 했고, 2017년 대선 캠프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했다. 여권에서는 사실상 친문 좌장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만큼 청와대 비서진은 물론 당청관계에서도 무게감 있는 영향력과 추진력을 보여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국정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비서실장의 가장 큰 임무는 다름 아닌 ‘쓴 소리’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의중을 세삼하게 잘 읽되, 잘못된 판단을 한다면 단호히 ‘NO'라고 직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지 말고 다양한 소통 채널을 열어 경청하고, 지금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민심을 가감 없이 대통령에게 잘 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노 실장의 취임 일성도 ‘경청’이었다. 노 실장은 취임하자마자 야당 인사들과 경제계 인사들을 만나며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올해 경제 활력을 기대하는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시그널로 다가온다. ‘진짜 왕실장’이라는 제왕적 타이틀이 아닌 ‘초심을 잃지 않고 일하는 비서실장’으로서 국민이 체감하는 정책 성과에 몰두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