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인간은 매 순간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생경한 시간과 공간으로 진입하는 존재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금’과 ‘여기’라는 시공간을 과거에 자신이 반응하던 방식으로 습관적으로 대처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시공간을 마치 인생의 첫날, 첫 순간처럼 여기고 마주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이 궁극적으로 가고 싶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필연적인 단계로 여긴다. 그 하루는 건너뛸 수 없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런 하루가 이어져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과 ‘여기’는 불안, 위험, 그리고 위험을 피해가려는 심리적 피난처인 유혹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나를 이끌어 줄 등대와 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스승이다.
스승은 단순히 나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최선을 자극하는 삶의 모델이자 멘토다. 스승은 인생이란 험준한 산을 등반하기 시작하여, 나름대로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고 정진하는 모범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신에게 모범일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모범이다.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정상을 향해, 매일 매일 조금씩 올라간다. 스승은 나에게 정상에 도착하는 길들은 수없이 많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에게 어울리고 나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등산로를 개척하기를 촉구한다. 그는 자신이 일생을 통해 밟아온 길이 진리(眞理)가 아니라 나침반(羅針盤)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가 사용한 나침판을 통해 방향만 감지할 뿐이다. 나는 나 나름의 길을 매일 개척하고, 그 길에 용기 있게 들어서야 한다.
필자가 공부를 시작한 1988년 나는 스승 한 분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두 가지 화두를 던져주었고, 그 화두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서 생각의 씨가 되어 거룩한 성장을 하고 있다. 첫 화두는 “당신을 매료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걸 하십시오” 스승은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할 때, 잘할 수 있고,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몰입은 나만의 개성을 형성하여 나를 나답게 만드는 첩경이다.
나는 지금도 매일 아침 조깅한다. 아침운동은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총성이다. 나는 스승으로부터 고대언어의 문법과 심오한 사상보다는 삶의 태도, 특히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배웠다. 스승은 지식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삶의 태도와 삶의 운영방식을 전폭적으로 전환하도록 격려하는 촉매제다. 누가 나에게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 묻는다면, 나는 기탄없이 말한다. “조깅은 나의 종교다.” 그 이유는 내가 조깅을 종교적으로 매일 아침 준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종교적으로 준수할 때,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행복하게 만든다.
구루
인도인들은 그런 스승을 ‘구루(guru)'라고 불렀다. ‘구루’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특정한 분야의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先生)' 이상이다. 그는 내 삶의 최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조언하는 상담자이며, 내 정신과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도록 돕는 산파이며, 삶의 모델이자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려주는 별과 같은 존재다. 구루는 우주의 진리를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 이해한 ‘즈나나jñāna(앎)'를 자신의 삶을 통해 전달해주는 자다. 그는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통해 문하생들을 가르친다.
‘구루’는 문법적으로 ‘무거운’이란 의미를 지닌 형용사다. 구루는 삼라만상의 핵심을 자신의 몸을 통해 경험하여, 몸 안에 지닌 자이기 때문에 그는 ‘무겁다’. 자신이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외관으로 구루인 척을 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은 그가 구루인지 안다. 왜냐하면, 그에겐 ‘구루’의 아우라가 있기 때문이다. 구루는 그 사람만의 향기가 있다. 그 향기를 ‘훈습(薰習)'이라 부른다. 훈습은 내가 자주 거하는 장소의 향기가 내 몸에 배어, 내 몸을 통해 외부로 분출되는 독특한 향기다.
훈습
인간은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인상(印象)이 있다. 어릴 때 친구 혹은 대학교 동창을 잠시 떠올려보자. 그 사람에 대한 독특한 기억이 바로 ‘훈습’이다. ‘훈습’은 산스크리트어 ‘바사나(vāsanā)'에 대한 한자번역이다. ‘바사나’는 나의 습관, 그 습관이 행해지는 거주지에서 내 몸에 밴 나의 특정한 행위와 나의 인상이다. 동일 어원에서 나온 바나사는 ‘의상, 장식, 거주자’란 의미다. 즉 나는 ‘내가 입는 옷’이며, ‘내가 몸에 착용하는 장식이며’ 혹은 ‘나는 내가 주로 거주하는 장소’다.
구루는 바로 훈습이다. 자신의 일상을 제어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자신이 수련생들에게 가르치려는 내용과 자신과 유리된다. 그러면 그의 말은 힘을 잃게 된다. 고대 인도인들은 예로부터 ‘구루’를 다음과 같은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로 설명한다. 민간어원설이라는 어떤 단어의 개념을 본래 의미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해낸 기발한 해석으로, 그 어원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요가 우피니샤드’라고 알려진 슈클라 야주를베다(Shukla Yajurveda)에 속해있는 ‘아드바야타라카 우파니샤드(Advayataraka Upanishad)' 16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구루란 단어에서) 음절 ‘구’는 어둠을 의미하고 음절 ‘루’는 어둠을 없애는 자를 의미합니다. ‘구루’라는 이름은 (수련생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구루는 자신의 마음가짐, 몸가짐, 그리고 행동가짐으로 가르치는 자다. 그는 스스로에게 ‘구루’인 자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구루의 엄격한 훈련을 받는 자다. 자신에게 스승인 자가 남에게도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구도자의 삶을 사는 ‘스스야(śiṣya)', 즉 수련자의 인격도야를 도와준다.
'요가수트라' I.37
파탄잘리는 이 구절에서 요가수련자가 삼매경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정결한 마음을 가진 다른 요가수련자인 ‘요기’ 혹은 구루의 삶을 명상하며 수련한다. 인도영성에서 ‘구루’와 ‘스스야’의 관계는 남다르다. '바그다드기타'는 수련생 아르주나와 구루 크리슈나와의 대화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진리를 아는 자는 진리를 너에게 알려 줄 수 있다. 그는 진리를 아는 사람(구루)에게 승복하고 봉사하고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알 수 있다.” ('바가바드기타' IV.34) 요가수련자는 구루의 언행에 승복하고, 봉사하고, 질문을 주고받는 지적인 활동을 통해,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 많은 힌두교 전통은 구루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봉사를 가장 높은 경지의 명상이라고 설교한다. '요가수트라' I.37에 그러한 내용이 실린 것처럼 보인다. 이 구절은 구루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루의 요건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구루는 ‘세속적인 욕망이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구루가 세속적인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수련자들을 가르칠 때, 수련자들은 그 구루에게 승복과 봉사를 기꺼이 행할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남 보기에는 그럴듯한 구루와 종교지도자들이 있다. 존경을 받아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종교를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휘두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한다. 그들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절대적인 헌신과 복종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스스로 깨우친 인간처럼 가면을 쓰고 행동한다.
구루의 첫 번째 요건은 스스로가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정결한 사람이어야 한다. 구루는 단순하게 종교지도자에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니다. 가족이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가장, 한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람, 도시와 국가를 지휘하는 지도자의 첫 번째 요건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구루인가?’ ‘나는 남에게는 구루이지만, 나에게는 창피한 인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