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이 즉시연금 미지급금 일괄지급 방안을 사실상 거부했다. 대신 법리다툼을 선택했다. 금융감독원에 반기를 든 셈이다.
금융권에서는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자살보험금 미지급금을 주지 않았다가 금융당국의 중징계 협박에 결국 백기 투항했던 지난해 자살보험금 사태가 되풀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 한화·교보생명 등 삼성생명과 같은 배 탈까?
29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생보사들은 즉시연금 미지급금 일괄지급 방안을 놓고 고민 중이다. 교보생명은 지난 27일 정기 이사회를 개최했으나 해당 안건을 상정하지 않았다. 한화생명도 내달 10일 이내에 방안을 결정하겠다며 선뜻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지난 26일 삼성생명이 이사회를 열고 금감원의 일괄지급 방안을 사실상 거부했지만, 이 같은 선례를 선뜻 따르기 쉽지 않다는 분위기다. 이달 초 금융감독혁신 과제를 발표하면서 '금융사와 전쟁'을 치르겠다고 선포한 금감원과 대치 국면에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탓이다.
이는 작년 초 자살보험금 사태를 경험한 탓이 크다. 당시 삼성·한화·교보생명 등은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 미지급금을 주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금감원이 소비자보호를 명분으로 각 보험사와 대표이사를 중징계 예고하자 자살보험금을 전부 지급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즉 이번에도 즉시연금 미지급금을 주지 않고 버티다가 자살보험금 사태처럼 징계 대상으로 지목되기보다는 선제적으로 지급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동시에 과거 자살보험금 사태만큼 지급액 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도 위안거리다.
총 4300억원인 삼성생명을 제외하면 한화생명과 교보생명의 즉시연금 미지급금 규모는 850억원과 700억원 수준이다. 지난해 양사의 자살보험금 미지급금 규모는 각각 1050억원과 1134억원으로 20~62% 가량 많다.
◆ 보험사 사업비 수취 무시한 일괄구제 타당한가?
다만 보험업계에서는 서슬이 퍼런 금감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삼성생명의 결정이 합리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보험 산업의 기초가 되는 사업비가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서 즉시연금 미지급금 전액지급을 거부한 삼성생명은 고객에게서 받은 보험료 납입 원금에서 사업비나 준비금 등을 공제한 금액만큼을 최저보증이율을 적용해 지급해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보험사가 고객이 낸 보험료에서 사업비 등을 수수료 격으로 받고 있는 만큼 납입 원금를 보장해줄 수 없다는 판단이다.
실제 현재 대부분 보험 상품은 고객이 낸 보험료를 전부 고객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보험사가 계약을 유지관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업비 등을 보험료에서 차감하는 탓이다. 사업비에는 설계사 수당, 판매촉진비, 점포운영비 등이 포함돼 있다.
만약 금감원이 제시한 일괄지급 방안에 따를 경우 보험사의 사업비 수취 자체가 흔들리게 될 수 있다. 민원이 있을 때마다 고객에게 사업비를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빈번해져 보험 산업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탓이다. 삼성생명이 받은 외부 법률자문도 금감원이 권고한 일괄지급이 법적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험사 관계자는 "자살보험금 사태를 감안하면 금감원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다만 금감원의 권고는 극단적으로 민원이 발생하면 보험사가 사업비를 받지 말라는 의미라 설득력이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