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붙잡고 울면 뭐해. 요즘은 나이 먹어서 울 힘도 없어요.”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구 남북이산가족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경재 회장(86)은 덤덤히 말했다. 그는 가래 섞인 기침을 해대며 말을 이었다. “몇만 명 중 겨우 100명씩 만나서 울고불고 하는 이벤트식 행사는 하지 말란 말이야.”
손꼽아 기다리던 상봉이지만 이산가족들은 기쁘지만은 않다. 100명이라는 제한된 인원 때문이다. 통일부의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13만2484명의 이산가족 신청자 가운데, 생존자는 5만7059명이다. 최종 후보자로 선정되려면 무려 57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김 회장에게 이번 상봉 행사에 신청했는지를 묻자 “포기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김 회장은 “아예 기대를 안 해요. 요만큼도 기대해 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함경북도 북청군이 고향인 김 회장은 6·25 전쟁 중 남으로 내려왔다. 남쪽 땅에 발을 딛고서야 자신을 포함한 남자 4형제가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려온 지 두 달 만에 4형제는 부산에서 만났지만, 부모님과 누이동생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다.
부모님과 누이의 생사를 알게 된 때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미국 국적을 지닌 실향민에게 북한 방문을 허가했다. 이 중 김 회장의 고향 선배가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김 회장의 누이동생을 만났다. 선배가 준 사진을 보고 그때야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동생 혼자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 회장은 “내 누이동생 사진하고, 어머니 아버지 사진 갖다 줬을 때는 진짜 많이 울었어요. 아마 서너 시간은 운 것 같은 생각이 나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생사는 확인됐지만, 곧 바로 연락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김 회장은 “그 선배가 이 양반(동생) 사진만 달랑 들고 온 거예요. 주소를 안 가지고 왔어. 그걸 찾는 데 5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1991년 일본과 무역 거래를 하던 김 회장은 일본 지인을 통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부장을 알게 됐다. 그는 조총련 부장에게 부탁해 여동생에게 편지를 부쳤다. 20년 넘게 이어진 편지 교환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동생과 연락을 하는 김 회장은 남쪽 이산가족의 북쪽 가족을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이산가족 숫자가 줄다 보니 지금은 1년에 10건 정도밖에 찾아주지 못한다”며 아쉬워 했다.
김 회장은 이산가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봉 행사보다 생사확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금강산에서 면회가 21회, 이번까지 만나면 2100명이 만난다. 13만2000명이 신청해서 2000명이 이제 만났는데, 이런 행사를 해서 무슨 뜻이 있냐는 말이죠. 이산가족들 급선무가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뷰를 마친 기자에게 김 회장은 종이를 쥐여줬다. 그는 “얼마 전 북녘의 조카가 이남의 고모에게 보낸 편지”라며 “꼭 읽어보라”고 당부했다. 세 장에 이르는 편지의 마지막 한 줄에 눈길이 멈췄다. “통일된 강토에서 우리의 상봉이 이루어질 그 날까지 꼭 살아계시길 마음속으로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