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채용 모범규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

2018-05-2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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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자. 500명을 뽑는 데 '필기시험'에서 700등을 한 지원자가 최종 합격했다. 하지만 200등은 탈락했다. 탈락자는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은행은 필기보다 면접 결과가 뛰어나 종합점수가 월등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설명은 현행 시스템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필기는 정량적 평가지만 면접은 주관이 개입되는 정성평가이기 때문이다. 곧바로 채용비리 의혹 대상에 포함된다.

서류전형도 마찬가지다. 통과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최대한 필기까지 유도해야 한다. 인·적성보다 필기점수로만 채용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새로 만들고 있는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규준'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적용하면 이 같은 결과가 나온다.

지방은행의 불만은 더하다. 특성상 지역에서 근무할 인재가 절실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오지(奧地) 근무가 필수다. 하지만 필기 중심으로 선발된 서울의 상위권 대학 졸업자들은 오지 발령과 동시에 퇴사를 선택한다. 문제 해결차원에서 서울과 지방의 정원을 분리시키고 싶지만 불가능하다. 남녀 차등 선발도 위법인 데 지역을 구분 짓는 것은 당연히 고려 대상이 아니다. 기회 손실 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공채 기수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사례도 있다.

금융권 채용비리 이슈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후속 방안을 놓고 갈등이 커지고 있다. 혼란이 커지자 전국은행연합회와 금융당국은 모범규준을 더 빨리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업계는 모범규준 자체가 큰 의미 없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다.

사실 금융당국이 마련 중인 모범규준은 강제가 아니다. 권고 사항이다. 모범적인 규준을 만들었으니 참고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은행들은 냉소를 보내고 있다. 단어 자체가 '모범규준'인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범을 따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모범규준 내용에도 딱히 묘수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서류전형은 외부 아웃소싱, 필기시험 문제는 대학교 용역, 외부 면접관 50% 이상 등으로 불법을 최대한 차단해 보겠다는 게 전부다. 새로울 게 없는 모두 예측 가능한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은행들은 금융당국의 간섭이 지나치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민간기업의 자율성 훼손은 물론 과거 관치금융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회사별로 고유의 인재상이 있는데 채용규정까지 손대는 것은 너무하다는 주장이다.

실효성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모범규준으로 은행을 압박하기보다 은행 내부의 자정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은행마다 채용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규준을 일원화하기는 더더욱 힘들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당국은 모범규준을 앞세워 '필기시험'으로의 획일화를 유도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은행고시'를 시행했던 은행들은 모범생보다는 이자수익 이상을 창출할 '영업 맨'을 골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은행고시로 불린 필기시험도 이때 폐지됐다. 영업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폐지됐던 은행고시가 2018년에 다시 부활하는 것이다. 새로 마련될 모범규준을 통해 2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셈이다.

오락가락 채용방식으로 혼란이 커지자 은행들은 세부 내용만 고칠 게 아니라 채용의 큰 틀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공채가 아닌 수시채용을 더 확산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미국과 독일은 대규모 공채가 아닌 수시채용이 대세다. 절차는 우리나라의 공채와 비슷하다. 지원서 제출→타당성 검증→면접 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리나라의 서류전형과 유사한 '타당성 검증'이다. 스펙을 주로 확인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직무관련 경력, 직무수행 능력을 인사부서가 아닌 '채용부서'에서 직접 검증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이번 기회에 채용과 관련해서 큰 틀에서의 전략적 변화를 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단순히 필기시험, 블라인드 면접 등 책상에서도 만들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공채와 수시채용을 더한 '대규모 수시채용' 등을 연구해보면 어떨까 싶다.

아울러 지난해 채용과 관련해 문제를 일으킨 원죄는 지었지만, 모범규준을 통해 일괄 지침을 내리기보다 자정의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금융은 산업이 아닌 불로소득업'이라고 생각하는 현 정부에 대한 시각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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