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직후 이승만은 정읍에서 단정 주장 발언을 하게 되며,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파는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 및 토지개혁 등의 이슈를 놓고 사생결단으로 맞붙은 좌우익의 틈바구니에서, 합작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7년 5월 21일, 위원회 활동이 재개되었고, 이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라 한다. 이번에는 한민당과 반탁운동을 주도하던 백범의 한국독립당 일부도 참가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소련이 ‘3상회의 결정’을 고집하고, 미군정이 남한 내 좌익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면서 활동이 중단되어 최종적으로 결렬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