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노력(努力)

2018-04-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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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수트라 I.13

[사진=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연습
인간은 교육을 통해 진화한다. ‘진화된 인간’이란 주변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탐닉하는 동물에서, 주위의 유혹이나 자극에도 꿈쩍하지 않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깊은 생각으로 제어하고 자신이 원하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그런 인간을 짐승과 같은 인간이 아닌, ‘신적인 인간’ 혹은 ‘신’이라고 추켜 부른다. 그는 과거의 문법에 자신을 얽매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투영하고, 그런 자신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정교하게 다듬는다. 이 전략적인 노력이 바로 연습(演習)이다.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한 자발적이며 지속적인 연습이 그(녀)의 삶을 지배한다. 그는 어제의 자신에 연연해 하지 않고 딛고 일어선다. 그가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만들기 위해 오늘을 수련한다.

연습은 겉보기에는 만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 대척점에 위치한 두 가지를 서서히 하나로 융합하는 마술과 같은 과정이다. 연습을 통해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돼 그 구분이 사라진다. 또는 신이 인간이 되고, 인간이 신이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습’이란 개념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들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이론적이며 고정된 세계관을 설파했다.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경계가 존재한다. 그들은 인간의 오감으로 인식하는 세계는 불완전하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오감은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만을 포착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감각의 세계를 넘어선 어디에선가 ‘개념’으로 존재하는 진리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진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개념인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사람이나 물건들을 존재하게 만든 생각이다. ‘아름다움’이란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경치’나 ‘아름다운 사람’이 존재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데아에서만 존재하는 ‘아름다움’이 가시적인 현실에서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과정을 고대 그리스어로 ‘프락시스(praxis)’, 즉 ‘연습’이라고 말했다. ‘프락시스’는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인들의 지적인 활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들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 ‘테오리아(theoria)’ 즉 ‘깊은 생각’ 둘째 ‘포이에시스(poiesis)’ 즉 ‘창작’, 그리고 셋째 ‘프락시스’ 즉 ‘연습’이다.

이 용어를 음악 연주를 통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첼리스트 요요마(馬友友·Yo Yo Ma)가 이탈리아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를 연주한다고 가정하자. 요요마는 자신의 천재적인 음악적인 감수성을 기반으로 ‘넬라 판타지아’의 의미를 숙고를 통해 파악하고(테오리아), 자신만의 독특한 연주기법으로 연습(프락시스)을 시작한다. 요요마는 ‘넬라 판타지아’의 연습을 통해 원 작곡자도 감동하는 그런 연주(포이에시스)를 한다. 오선지의 음표로만 존재하던 ‘넬라 판타지아’의 아름다움이 요요마의 ‘연습’으로 숭고하고 완벽한 선율로 부활한다. 그리고 그 선율은 관객들에게 오감을 자극하는 감동을 선사한다. 연습은 음표를 감동으로 전환시키는 마술이다. 음표는 선율의 도움 없이는 낙서에 불과하다. 요요마의 연주를 거쳐야만 모리코네의 의도가 온전히 표현된다. 요요마의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정중동이다. 활을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그를 통해 나오는 소리는 한없이 평화롭다.
 

첼리스트 요요마.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프락시스는 깊은 생각을 실제 작품으로 만드는 중간 단계이자 경계다. 이 경계를 통해서만 작품이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도시 안에서 동료인간들과 어울려 사는 동물’로 정의하면서 ‘프락시스’를 도시라는 공동체를 운영하게 만드는 원칙들이고 말한다. 프락시스는 공동체 안에서 ‘윤리’, ‘경제’ 그리고 ‘정치’다. ‘연습’은 개인이 지닌 개성을 극대화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하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은 '인간의 조건'이란 책에서 서양사상이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 즉 ‘묵상하는 삶’을 선호한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비타 악티바(vita activa)’, 즉 ‘행동하는 삶’을 권장한다. 그는 서양의 철학이 일상의 삶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유를 서양사상가들의 ‘묵상하는 삶’에 대한 과도한 선호라고 진단한다. 그녀에게 ‘프락시스’는 ‘실천하는 삶’의 정점이다. 인간의 최고의 가치인 자유는 일상에서 ‘프락시스’ 즉 윤리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활동을 통해 완성된다. 그녀는 현대의 관료적이며 엘리트 중심의 정치형태와는 전혀 다른 ‘참여 민주주의’의 기본개념을 제시했다.

노력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12에서 요가의 핵심원칙을 ‘연습’과 ‘이욕(離欲)’이라고 정의하였다. 요가는 피상적으로는 서로 반대개념인 ‘아브야사(abhyāsa·연습)’와 ‘바이라그야(vairāgya·이욕)’를 통해 진화한다. 요가를 통해 수련자는 자신이 달성하고 싶은 진정한 자신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직시할 수 있다. 힌두교에서 ‘아브야사’란 오랜 시간 동안 일정하게 정기적으로 수련하는 영적인 연습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13에서 ‘연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타트라 스티타우 야트노-브야사(tatra sthitau yatno-'bhyāsaḥ).” 이 문장을 번역하면 이렇다. “그러므로 연습이란 흔들림이 없는 정적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요가 연습의 목적은 외부의 어떤 유혹과 시험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인 정적의 유지다. 요가 운동을 시작하면, 바로 그 첫 시간에 자신의 신체가 얼마나 왜곡돼 있는지 알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편하게 움직여 같은 동작을 오랫동안 반복한다. 그 결과 뼈와 그 뼈를 둘러 싼 크고 작은 근육들이 원래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뒤틀려 있기 마련이다. 이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동작들을 시도하면, 몸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린다. 물구나무서기, 벽보고 서있기, 한발로 서기와 같은 동작이 그것이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장소가 있듯이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들도 그렇다.

‘연습’은 노력의 결과다. 산스크리트어 ‘야트나(yatnah)’는 ‘노력’, ‘불굴의 분발’, 그리고 ‘지속적인 투쟁’을 의미한다. 연습을 수련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완성하려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만일 자신이 목표점에 이미 도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그를 오만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수련한 연습이 수포로 돌아간다. ‘야트나’는 ‘야트(yat)’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그 의미는 ‘특정한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결집하다’이다. 노력이란 하나를 집중하여 달성하려는 노력이다.

1991년 필자는 ‘엘람어’라는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엘람어는 기원전 31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 오늘날 이란지역에서 상용되던 언어다. 당시 필자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완성자인 다리우스 대왕이 남긴 삼중 쐐기문자 비문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 비문은 어군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쐐기문자들, 즉 인도유럽어인 고대 페르시아어, 셈족어인 아카드어 그리고 엘람어로 기록됐다. ‘엘람어’는 동서고금을 통해 어떤 언어와도 어떤 연관도 없는 소위 ‘고립어’다. 엘람어는 가르치는 교수도 없었다. 필자는 엘람어와 관련된 다양한 논문들을 읽고, 문법을 홀로 재구성해야 했다. 나는 3년 동안 매일 일정한 시간을 엘람어와 그 문법숙지에 투자했다. 그런 후 나는 엘람어로 기록된 쐐기문자들을 판독할 수 있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문법구조와 글자모습을 숙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런 후 비시툰 비문을 더 깊이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노력이란 매일 매일 같은 열정과 집중으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불굴의 몰입이다. 요가는 매일 아침이면 내가 맞이하는 ‘오늘’과 같은 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기 위한 분투다.

정적
나는 왜 그런 노력을 하는가? 노력의 목표는 바로 ‘스티티(sthiti)’ 즉 ‘정적(靜寂)’이다. ‘스티티’는 안정, 일정, 침착 등을 의미한다. ‘스티티’는 ‘두발로 서다’라는 동사 ‘스타(stha)’의 명사형이다. 스티티는 자신이 가야 할 곳에 시선을 두고, 그곳을 향해 의연하고 용기가 있게 가는 행위다. 스티티는 안정적이다. 자신들의 두 발을 땅위에 굳건히 두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다. 스티티는 평온하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고 의연하다. 정적은 오랜만에 즐기는 여름휴가와 같은 것이 아니다. 정적은 외부환경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자기주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오랜 수련을 거친 마음가짐이나 삶에 대한 태도다. 정적은 마음속에서 지속적으로 출렁이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잠잠하게 만드는 행위다.

정적은 노력의 결과다. '바가바드기타' 6.34-35에서 요가수련을 해본 적이 없는 영웅 아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마음의 소요를 표현한다. “마음은 매우 들떠 있고, 난폭하며, 강력하고 고집스럽다. 오, 크리슈나여! 나에게 마음은 바람보다 조절하기 힘듭니다.” 마음이 들떠 있는 이유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마음이 난폭한 이유는 그곳에 미움, 분노, 욕심, 부러움, 걱정, 공포, 그리고 애착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강력한 이유는 마음은 이성을 정복하고 분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집스러운 이유는, 한번 결심하면 결코 떠나지 않고 항상 돌아와 이성과 감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대답한다. “오, 쿤티의 무장한 아들이여! 네가 말한 것은 옳다. 마음은 정말 삼가기 힘들다. 그러나 연습과 이욕으로 제어될 수 있다.”

파탄잘리는 인간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만끽하기 위해 요가수트라를 집대성했다. 그는 요가는 연습이며, 연습은 흔들림이 없는 정적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나는 내 삶에서 정적을 수련하는가? 나는 어제보다 나은 삶을 위해 지금 노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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