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처리를 목적으로 1919년 1월 18일 열렸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27개 전승국 대표들은 2차 총회(1월 25일)에서, 윌슨이 제안한 국제연맹 창설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세계평화와 식민지해방의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신한청년단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기 직전 상해에서 조직되었다. 윌슨의 특사로 상해에 온 클레인의 ‘파리강화회의는 약소민족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연설에 고무되어, 국제정세 변화를 독립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철두철미 이긴 자들의 잔치였다. 영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인도를 내놓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프랑스는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물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런 정세에서 전승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에게 조선을 독립시키라는 청원이 성사될 리 만무했다. 파리강화회의는 베르사유조약(6월 28일)으로 끝을 맺었고, 독일에 부과된 가혹한 배상금은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부르는 씨앗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