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폐하께서 그 먼 곳(블라디보스토크)에 어찌 가신단 말씀인지요."
"러시아에서 전시(戰時)에 나의 안위를 걱정하여 그곳에 외유처를 준비하고 있느니라."
고종이 파천(播遷)을 하는구나! 배정자는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한 뒤 궁궐을 나온 배정자는 급히 일본으로 전갈을 보냈다. 최고급 정보를 빼낸 셈이었다. 일본은 조선 황실에 긴급히 항의했고,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1904년 배정자는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인 현영운(玄瑛運·1868~?)과 결혼한다. 이 남자와 결혼하면서 배정자는 첫사랑 전재식을 떠올렸을까? 현영운 또한 전재식처럼 게이오의숙을 졸업한 사람이었다. 현씨가 전재식의 5년쯤 선배였다. 현영운은 육군참령, 육군총장을 거쳐 궁내부 대신서리까지 올랐다. 이런 초고속 승진에는 배정자를 총애한 고종의 배려와 엄비와의 친분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짐작들이 있다. 동대문 밖에 큰 별장을 가지고 있었고, 또 221만4876㎡(67만여 평)의 금광을 소유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재산가였다. 배정자는 이 남자와 오래 가지는 못했다. 1년만에 이혼했다. 이후 박영철(일본 육사 15기, 함북도지사, 중추원참)과 결혼했으나 5년만에 다시 헤어졌다.
현영운과 헤어진 데에는 그녀의 직업 탓도 있었을까? 34세 신부 배정자는 러일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일본의 스파이 활동을 위해 만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인 장교들은 빼어난 미색과 탁월한 속임수로 무장한 ‘조선의 마타하리’를 칭찬했겠지만 군부에서 관료로 성장하고 있는 현영운에게는 불안하고 수상한 신부였을 것이다.
# 병원에 입원한 배정자를 암살하라
만주에 간 배정자는 다시 지령을 수신했다. 서울로 돌아와서 전쟁을 틈 타 득세하고 있는 친러파를 이간하고 퇴출시키라는 미션이었다. 1905년은 배정자에게 너무나도 숨가쁜 한 해였다. 러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이었다. 일제의 지령을 수행하고 있던 배정자는, 고종이 이토에게 보내는 친서를 받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친서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고종은 배정자를 통해 외교적 끈이 다소 부실한 일본과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전쟁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기에 러시아와 일본 모두에 ‘보험’을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아아, 내 딸. 잘 있었느냐? 너의 수고에 대해선 많은 얘기를 듣고 있다.”
이토는 오랜만에 배정자를 만나자 반색했다.
“파파, 반가워요. 여전히 젊고 활기차세요.”
“나야 뭐 편안히 지내지만 네 심신이 걱정이구나.”
이토는 그녀를 스루가타이(駿河臺) 하마다(濱田)병원에 입원시켜 건강을 체크하게 했다. 이 무렵 배정자에 대한 암살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이봉래·강석호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접근했으나 일본군의 경계가 삼엄해 실패했다.
고종의 친서를 읽은 이토는 답신에 해당하는 편지를 써서 다시 배정자를 통해 보냈다. 무슨 내용이었을까? 조선이 러시아에 기울어져 있는 것에 항의하고, 그런 행동을 계속할 경우 어떤 불이익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와 협박을 담은 내용이었다. 밀서를 전달받은 고종은 그 내용과 이토의 말투가 너무나 방자하고 위압적이어서 충격을 받았다. 당시 친러파 내각은 이 밀서에 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배정자의 행각을 문제 삼았다. 이 같은 밀서를 들고 오는 행위는 조선 황제에 대한 능멸이라고 비판했다.
‘배정자 밀서사건’은 친러와 친일의 갈등 정국 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1905년 2월, 그녀는 3년 유배형을 받고 부산 앞바다에 있는 절영도(絶影島·요즘의 영도)로 귀양갔다. 배정자가 유배되자 일본공사관에서는 서기관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와 간카와 이치타로(監川一太郞)을 파견해 위로했다.
이런 가운데 러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토는 이 해 11월 14일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비서관을 경성으로 보내 배정자의 사면을 종용했다. 그는 일본특파대사 자격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1905년 11월 17일)을 맺기 위해 오는 길이었다. 배정자는 석방됐다.
# 덕수궁 정문 현판 때문에 '흑치마'가 설친다?
을사조약 이후 1906년 3월 이토가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고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배정자 세상이 펼쳐진 듯했다. 세간에서는 그녀를 ‘흑치마’라고 불렀다. 덕수궁 별채였던 중명전은 1901년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이 집무실(편전) 겸 외국 사절 알현실로 썼다. 이곳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기도 하다.
흑치마 배정자가 이곳을 ‘접수’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밤마다 화려한 파티를 열며 정국의 동향을 살피고 여론을 만들어냈다. 덕수궁의 정문 현판이 대안문(大安門)에서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뀐 것이 배정자 때문이라는 설(說)이 생겨난 것도 그 무렵이다. ‘안(安)’자가 ‘갓 쓴 여인’의 형상이며 이는 배정자가 덕수궁 안을 들락거리는 것과 맞아떨어져 불길하다는 주장이 나와 사나이를 뜻하는 ‘한(漢)’으로 바꿨다는 웃지 못할 얘기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네덜란드에서 열린 군축회의에 고종이 밀사를 파견해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했으나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녀는 일본의 힘을 업고 고종 퇴위를 압박할 만큼 광기 어린 권력의 끄나풀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영화가 어찌 오래가겠는가.
# 안중근의 이토 저격 소식 듣고 실신
1909년 6월 이토는 통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즈음 도쿄의 관저에서 이토는 배정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청나라의 움직임은 조선과 일본은 물로 동양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부인이 조선인이라 하니, 네가 접근하여 일본과 청의 화목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어라.”
배정자가 이토의 이런 지령을 실천하기도 전인 10월 26일, 이토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쓰러졌다. 그녀에게는 청천벽력이었기에 소식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실신했다.
하지만 삶은 계속됐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이뤄지고 조선주둔군 헌병사령관인 아카시(明石元二郞)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배정자는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됐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배정자는 시베리아로 가는 일본군을 따라 참전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중국 마적단에 납치됐는데, 그 두목을 유혹해 상당한 기간 동안 동거생활을 했다. 이때에도 정보를 빼내 일본군에게 넘겨주는 ‘충성’을 과시했다.
이후 일본 외무부 촉탁으로 봉천(奉天)영사관에 근무하면서 남만주 조선인의 동태를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1920년 일제는 일진회 잔당을 모아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파괴하기 위한 무장첩보단체인 보민회를 만들었다. 배정자는 보민회 구성에 큰 역할을 했고 총독부에서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데 실력을 발휘했다. 1922년 그녀는 국내로 들어와 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항일독립투사를 잡는 일을 전문으로 했다.
1924년 배정자는 일선에서 물러났다. 배정자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씻지 못할 일은 1940년 70세 때의 행위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그녀는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징발해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다.
“전선에서 우리의 조국 일본 장병들이 고생하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퍼머 머리로 곱게 단장한 할머니는 그렇게 호소하며 어린 여인들을 매춘의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 해방 이후 성북동에 숨어살다가 친일1호로 검거
해방 뒤 이 여인을 어떻게 되었을까. 1948년 9월 국회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통과됐다. 반민특위에 가장 먼저 검거된 사람은 성북동에 숨어 살던 배정자였다. 1949년 2월 초였다. 마포형무소를 찾은 기자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따뜻한 장국밥 한 그릇 먹고 싶습니다. 이제 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하겠습니까.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종로구청에 있는 호적에는 1952년 2월 27일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반민특위가 해산하면서 풀려났다가 한국전쟁 와중에 82세로 파란 많은 이승을 등진 것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가면 안양암이란 암자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있는 ‘나무아미타불’ 비석에는 배정자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41년 4월 초파일에 각자(刻字)한 것이다. 종군위안부를 선동하고 난 다음해이다. 제 나라를 팔고 뜯어먹으며 잔혹한 스파이의 삶을 살아온 그녀지만, 다음 생에선 극락에 가고 싶었던가.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