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에 잡지사의 대표를 맡고있던 선배가 지리산 자락에서 문득 전화를 했다. “여기, 칠불사 절 부근의 산장인데, 올 수 있겠어?” 백수 시절인지라 경주 고향에 내려가 있던 나는, 말 한 마디에 부산, 마산, 진주를 거쳐 하동으로 달려갔다.
눈발이 부슬거리는 계곡에서 문사철(文史哲)을 넘나들며 밤 깊도록 얘기를 나눴다. 내 블로그를 드나드는 오랜 팬이었다는 그가 나를 부른 건, 단순히 글에 대한 관심 뿐만은 아니었다. 역사와 관련한 기획 취재를 맡아달라는 당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조선여인 스토리인 ‘미인별곡’의 연재도 주문했다. 일을 맡고 보니 작년에 겪었던 기이한 스토리가 생각났다.
1933년에 돌아간 사람이 젊은 여인으로 환생해있는 이 사실을 생생하게 다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대입구의 그 집으로 찾아가보기로 했다. 서울로 올라온 뒤, 저녁 나절 나는 익숙한 길을 지나 그때 내가 꺾었음직한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그곳은 주택가가 아니었다. 주택들이 늘어서있던 자리에는 유리문으로 된 상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 가게로 들어가 상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여긴 수십년 전부터 상가 거리였다고 대답한다. 무엇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때 내가 들어가서 중국 복건의 ‘타’를 마셨던 것은 그럼 뭐란 말인가. 손가락에 여전히 끼워져 있는 이 반지는 뭐란 말인가. 그때 남자현의 집이 있었던 것 같은 길 앞에서, 채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 부암동, 꿈과 쉼
그해 2월 나는 3.1절 90주년을 기념해 유관순 취재를 맡았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생가와 매봉교회를 둘러보고 부모(유중권, 이소제)가 처참하게 살해되는 4월 1일 아우내장터의 시위현장을 가만히 재구성하고 있었다. 숙부인 유중부와 유관순은 시신을 떠메고 헌병 주재소로 달려가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마침내 투옥된다. 17세 소녀가 가슴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화가 난 헌병이 칼을 뽑아 뺨을 찔러 피가 흐르는 그 상황에서도, 그들을 꾸짖고 있는 무서운 소녀. 들끓는 격정을 식히려 자하문 터널 위쪽의 부암동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채찬의 목소리였다.
“혹시 지금 부암동 쪽이라면 삼청감리교회로 오실 수 있겠습니까? ‘꿈과 쉼’이라는 어린이도서관이 있는데 거기로 오시면 됩니다.”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번 그들을 만날 때도 그랬듯이 상황이 상식적인 것은 아니기에 그걸 화낼 형편도 아니었다. 혹여, 좋은 스토리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교회로 가보기로 했다. 고졸(古拙)한 서양식 건물이 인상적인 교회였다. 도서관 문은 열려 있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에 채찬이 들어왔다. 그 뒤에 한 여인이 따라왔는데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남자현이었는데, 몇 개월 전과는 달리 중년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가. 채찬이 처음 봤을 때 꺼냈던 ‘초인간’에 대한 얘기가 떠올랐다. 여러 시간에 걸쳐서 인간이 뿌리깊게 진행되고있는 보다 큰 양상을 보여주는 차원에서라면,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이 시간을 압축했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잠깐 있으니 한 여인이 차를 들고 왔는데, 일전에 홍대입구에서 보았던 개량한복 여인이다. 반가운 눈짓을 했더니 살풋 웃으며 답례를 한다. 채찬과 한복 여인은 나와 같이 몇 개월 전과 별 다름이 없다. 오직 남자현만 바뀌어 있었다.
# 친정 남씨 집안
“그간 잘 계셨습니까?”
나의 인사에 남자현은 입을 깊이 다물면서 웃었다.
“그 말씀이 맞네요. 23년 동안 저는 잘 지낸 듯 합니다. 집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난 뒤, 반가(班家)의 여자로서 품격과 살이를 함께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 것 같습니다.”
“수회 남정한선생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아들을 잃고나신 이태 뒤(1897년)였습니다. 동춘(김성삼의 아명)을 얻고나서 병석에서도 뛸 듯이 기뻐하셨는데... 영양 의병전투가 있고 난 뒤 일제의 압박을 받은 당국에서 기동도 못하는 아버지를 잡아가 고문을 하였습니다. 스승의 제자가 대대적으로 참여한 전투였기에, 일제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요. 저 또한 위태로운 지경이었기에 한동안 시어머니를 모시고 영양을 떠나 잠적하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수회선생의 생몰(生沒) 시기에 대한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던데요?”
“일제가 아버지의 시신조차 가져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헌병대 주위에 가묘로 묻혀있던 것을, 몇 달 뒤 남은 제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파내서 수비면 계동의 아주 깊은 산자락에 묻었습니다. 아버지처럼 동네에서 존경받던 오빠 남극창은 부친이 돌아간 뒤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어느날 술을 먹고 돌아오다가 누군가의 칼에 찔렸습니다. 오빠에게는 두 살 난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남훈오라고 하였지요. 훈오는 자라나서 수비면에서 대서방(代書房)을 하였습니다. 내가 결혼도 시켜주고 살이도 보아주고 했는데...”
영양 남씨 집안이 피폐해진 것은 남극창의 손자인 남재각씨(88세)의 증언으로 들은 바 있다. 훈오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재각이다. 재각이 돌을 지날 무렵,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갔다. 남자현이 만주로 떠난 뒤 이 집안에 대한 일제의 핍박은 더욱 심해졌다. 견디다 못한 훈오는 세 살바기 재각을 버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 또한 만주로 갔는데, 그곳의 척식회사(拓植會社)에서 글씨 쓰는 일을 했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어린 남재각은 동네 젖동냥으로 간신히 살아났다.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