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오의 죽음
“김영주선생을 여읠 당시 상황을 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
대화가 진행되다 보니 인터뷰처럼 되어가는 걸 느꼈다. 남자현은 나의 물음에 말을 멈추고는 가만히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닦았다. 곁에 있던 채찬이 가만히 내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제서야 나는 남자현이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중(喪中)이라는 의미일까.
“김도현 의진(義陣)과 영양 불매비밀단(不賣秘密團)이 청송 일대를 지나가는 왜적을 협공하기로 한 것은 공서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리고 불매 쪽의 타격선봉장을 맡은 사람도 공서였고요. 그런데 거사를 앞두고 공서가 뱀에 물리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급히 국오를 내세워 영양의군을 지휘하게 했습니다. 서른 명의 비밀단이 진보의 골짜기에서 왜적 10여명을 만났습니다. 이 정도면 우리 병력으로도 해결할 수 있겠다. 김도현 의진과 협진을 차리러 청송으로 가던 비밀단은, 굳이 그럴 필요까지도 없겠다는 판단을 했던 모양입니다. 국오가 신호를 하자 총성이 울렸고 왜적 수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큰 바위 뒤에서 벌떼같이 많은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우리 의병들을 쓰러뜨렸습니다. 겨우 두 명이 살아남아 강으로 도망쳤습니다. 그 전투의 참담을 이루 말하지 못합니다. 스승은 이 충격으로 큰 병을 얻었습니다. 한꺼번에 제자 스물 여덟명을 잃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거기에 사위이자 애제자인 국오까지 끼어있었으니... 그날 김도현 의진은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뭔가 작전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공서는 다행히 사고 때문에 목숨을 잃지 않았지만, 국오를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며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못먹는 술을 마시고 대취해, 우리 집앞 국화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제가 간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전투 이후에 영양의 의병활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당국에서 비밀단을 색출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마을사람들 속에도 간첩을 심어 동태를 파악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긴 뭐, 수회재 남정한선생이 자리에 누우셨기에 실질적인 전력 복원도 어려웠습니다.”
갑자기 죄책감이 몰려왔다. 결국 나의 부재 때문에 그가 전사했다니...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그녀는 다시 손수건으로 뺨 주위를 닦아냈다.
“하지만, 국오가 돌아간 건 운명이었습니다. 나라가 사라지는 판이니, 선비된 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였던 것이니까요. 그 전날밤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산꽃이 만발한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바위 쪽에서 공서가 나타나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니 공서 뒤에는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달려들고 있더군요. 남편은 칼을 뽑아 구렁이에게로 달려가 그 목을 깊이 찔렀는데 그만 칼이 부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세 사람은 혼비백산하듯 달음질을 쳤는데 문득 모두 벼랑에 서게 되었지요. 그런데 달려오던 구렁이가 우리 바로 앞에서 고개를 푹 꺾고 죽어버리더군요. 그제서야 살펴보니 남편의 가슴께에 큰 상처가 생겨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꿈을 저는 국오에게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전투를 치러야할 사람에게 어찌 괴이한 흉몽을 꺼내겠습니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꿈이야기를 했던들, 왜적을 만난 순간에 좀더 신중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은 통한이 앞섭니다.”
“당시 유복자(遺腹子)가 있었는데...”
“예. 일곱 달 쯤 되었을 겁니다. 겨울 무렵이었는데 통 들르시지 않던 국오가 화차(花茶)를 마시고 싶다면서 들렀습니다. 그날 밤 그는 내게 이런 시를 읊어주었습니다.
겨울은 겨움이니
지겨움 역겨움 힘겨움의 시절이로다
지겹지 않고 역겹지 않고 힘겹지 않다면
어찌 희망을 품으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겨움과 역겨움과 힘겨움이 없다면
어찌 죽음의 선을 넘으리 넘어서 다시 살아오리
추운 날 국화차 마시며 생각하네
지난 가을을 마시며 생각하네
지금이 춥지 않다면
추워서 얼어죽지 않는다면
어떤 꽃이 다시 보이리
봄은 보는 일이니
오롯이 보기 위하여 이 겨울 이토록 겨움이니
유란(幽蘭)아
겨운 네 속에서 이미 봄을 본다
노래를 불러준 것은, 유복자의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일까요? 겨울과 봄을 이렇게 가슴 떨리게 말해준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유복자의 아잇적 이름을 동춘(冬春)이라고 지은 것은, 저 시 때문이었습니다.”
# 유란
“남자현을 남편은 유란이라 불렀군요. 국오와 유란. 참 잘 맞는 별호(別號)입니다. 그후 공서 이00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 자신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남자현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까지 밖에 모릅니다. 스물 네 살이고, 막 국오를 잃은 슬픔에 찬 미망인이니까요. 임신한 몸으로 통곡하며 남편상을 치르는 때이니까요.”
그때 채찬이 나서서 말했다.
“오늘 두 분의 대화는 이쯤이 좋겠습니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일어서서 나올 때 남자현은 내게 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남편이 그날 대장이 되어 전투를 치르러 갔을 때 스승이 끼워주었던 반지입니다. 이 반지는 원래 의병장이던 공서가 끼고 있던 것이었죠. 불매단의 전통으로, 의병장의 무사를 빌며 서원에서 이 반지를 전달했지요. 국오가 돌아간 뒤 뒤 반지를 제가 따로 보관하였는데, 원래 이것을 끼고 있던 당신에게 돌려주라는 스승의 말씀이 있었기에 지금 드리는 것입니다.”
# 홍대입구 239
그녀는 내 손가락에 그것을 끼워주었다. 신기하게도 딱 맞았다. 채찬은 홍대입구 전철역까지 나를 배웅해주었다. 전철을 타려고 지하로 내려왔을 때 깜짝 놀랐다. ‘홍대입구’라고 씌어진 역 명칭 옆에 ‘239’라는 숫자가 씌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239? 채찬의 전화번호 0239가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채찬을 만난 날짜를 따져보았다. 8월11일은 음력으로 7월11일. 바로 김영주가 진보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그날이었다.(일제는 1896년 1월1일 을미개혁으로 음력 대신 양력 날짜를 강제로 쓰게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당국의 시책에 저항해, 여전히 음력을 썼다. 하지만 곧 양력 날짜가 대중화된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가만히 만지작거린다. 이상국 아주T&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