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은 빨치산토벌대장을 수행하면서 비교적 적지 않은 상관들을 만났다. 김의택(金義澤) 경무관을 비롯하여 윤명운(尹明運) 경무관, 전삼조(全三祚) 경무관, 최치환(崔致煥) 경무관, 신상묵(辛相默) 경무관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자칭 ‘백두산호랑이’로 알려진 김종원(金宗元) 경무관처럼 좋지 않은 만남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 으뜸은 단연 김의택 전북도경 국장일 것이다. 김의택 국장은 차일혁이 전투경찰지휘관으로 경찰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직속상관이었다.
중공군 개입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으로 후퇴하는 상황에서 전북도경에서는 후방지역의 빨치산토벌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제18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하게 됐다. 그때 제18전투경찰대대 창설의 핵심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김의택 전북도경 국장이었다.
김의택 국장이 새로이 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하면서 믿었던 사람은 오로지 새로 경찰에 투신하여 전투경찰지휘관으로 임명되는 차일혁 경감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김 국장의 걱정은 매우 컸다. 혹여 새로 발족한 제18전투경찰대대가 기대만큼 토벌 성과를 하지 못할 경우 1차적 책임은 도경국장인 자신이 져야한다는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의택 도경국장은 차일혁을 보기 전까지는 마음을 졸이며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 차일혁을 보는 순간 말끔히 사라졌다.
김 국장이 대대장 보직명령서를 수여하는 자리에서 차일혁을 보고 안심했기 때문이다. 김의택 국장은 차일혁을 보고 “차(車) 대장을 초빙하여 오늘 그 용자(勇姿)를 보니 참으로 마음 든든합니다.”라며 첫 소감을 그렇게 밝혔다. 안도감이 든다는 뜻이었다. 그 뒤부터 김 국장은 차일혁이 수행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 됐든 간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그 과정에서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전투력이 뛰어난 빨치산 포로들을 전투경찰에 편입시키는 일부터 시작하여 빨치산에 단순 가담한 포로들에 대해서 석방하는 것도 차일혁에게 맡겼다. 그만큼 믿었다는 증거다. 김 국장은 그만큼 차일혁이 하는 일을 믿고, 아낌없이 밀어줬다. 대신 어려운 임무는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에 맡겼다. 그럴 때마다 차일혁은 깔끔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의택 국장이 갑작스럽게 다른 곳으로 전출되어 갔기 때문이다. 불과 7개월의 짧은 인연이었다. 하지만 그 둘의 인연은 7년만큼이나 길고도 끈끈했다. 차일혁은 김의택 도경국장 재임 중에 풋내기 제18전투경찰대대를 전국 제일의 전투경찰대대로 만들었다. 첫 전투인 구이면 작전부터, 칠보발전소 탈환작전, 고창작전을 통해 커다란 전과를 세웠다.
김의택 도경국장의 후임은 전쟁초기 강원도 도경국장으로 용맹을 떨쳤던 윤명운 국장이었다. 윤명운 국장은 본인이 전투경찰을 지휘했던 경험이 있던 터라 빨치산토벌작전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전투지휘가 뛰어난 차일혁 경감에게 연대장급에 해당하는 철주부대를 만들어 지휘하게 했다. 이때 차일혁이 지휘했던 철주부대에는 제18전투경찰대대, 제17전투경찰대대, 제36전투경찰대대가 포함됐다.
이들 대대장들은 차일혁과 같은 경감들이었다. 그러니까 연대장급 경감이 대대장 경감들을 지휘 통제하는 것이었다. 윤 국장은 오로지 차일혁의 전투지휘능력만 믿고 그런 중임을 맡겼던 것이다. 차일혁은 철주부대장을 맡아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졌던 가마골작전에서 커다란 전과를 세웠다. 이로써 차일혁은 전투경찰지휘관으로서 진면목을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뒤이은 무주 구천동 작전에서 주민의 허위보고를 믿고 들어갔다가 첫 패배를 당하게 된다. 이때 차일혁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낸다.
그때 전투지휘관으로서 차일혁을 높이 평가했던 윤명운 국장도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게 됐다. 4개월 정도의 짧은 인연이었다. 윤명운 국장의 전출에 맞춰 철주부대도 해체되었다. 철주부대가 해체되고 차일혁은 무주경찰서장으로 가게 된다. 이로써 윤명운 국장과 헤어지게 된다. 윤명운 국장은 나중에 내무부차관으로까지 승진하게 된다.
차일혁이 전투경찰지휘관 있을 때 치안국 보안과장으로 있던 최치환 경무관을 알게 됐다. 가마골작전을 앞두고 전남북 경찰의 합동작전을 지휘감독하기 위해 치안국장을 대리하여 최치환 경무관이 내려왔다. 차일혁이 보기에 최치환 경무관이 도량이 커 보였다.
그것은 다음의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차일혁이 작전을 앞두고 간부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회식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최치환 경무관이 서울에서 내려와 그 식당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차일혁은 오랜만에 하는 부하들과의 회식자리인지라 춤과 노래를 부르며 다소 시끌벅적하게 놀았다. 그때 주인이 최 경무관 방으로 불려가고 얼마 안 되어서 최 경무관의 부관이 와서 조용히 해 달라고 했다. 차일혁은 그런 부관을 향해 심하게 대했다. 그러자 대대장들이 차일혁을 말렸다. 그러니 밖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최 경무관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다음날 최 경무관이 차일혁의 철주부대를 점검하러 나왔다. 통상 작전을 앞두고 전투준비태세를 확인하기 위한 지휘검열이었다. 차일혁은 최 경무관에게 전날의 무례에 대해 먼저 용서를 구했다. 차일혁다운 정면 돌파했다. 그러자 최 경무관이 “치안국장 대리로 온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그런 호기라면 가마골작전은 성공하리라 믿는다.”며 오히려 차일혁을 격려했다.
그리고 치안국장을 대리하여 지휘봉을 전달했다. 나아가 최 경무관은 차일혁 부대를 가마골작전의 선봉부대로 내세웠다. 차일혁은 사소한 감정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능력위주로 작전을 지휘 감독하는 최 경무관에게 존경심을 갖게 됐다. 당시 최 경무관은 전북 도경에 소속된 차일혁 부대를 기용하지 않고, 대신 치안국 직속의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작전의 핵심부대로 운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최 경무관은 차일혁 부대를 작전의 핵심부대로 활용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차일혁은 가마골작전을 수행하면서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관으로 있던 신상묵 경무관을 만나게 됐다. 신상묵 경무관은 박정희 장군과 함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 후 일찍 경찰에 투신하여 경찰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 신상묵 사령관이 차일혁 부대에 의해 가마골작전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자 차일혁에게 “자신과 함께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로 가서 함께 빨치산토벌작전을 하지 않겠느냐?”며 물어왔다.
이때 차일혁은 이미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전의 제17전투경찰대대장 김원용이 자신이 그곳으로 가면 어색해질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김원용은 제17전투경찰대대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도경국장에 의해 본의 아니게 차일혁이 제17전투경찰대대까지 통합 지휘하게 되어 김원용과 차일혁의 사이는 서먹했다. 김운용이 그때부터 차일혁을 어렵게 대했고, 만약 차일혁이 그곳으로 가게 되면 두 사람은 또 다시 불편한 관계가 될 것이 분명했다. 차일혁은 그런 관계를 더 이상 맺고 싶지 않았다. 또 연대급의 철주부대장으로 임명한 윤명운 국장이 설령 차일혁이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로 가기를 원한다고 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의 호인 철주(鐵舟)를 따서 오로지 차일혁만 믿고 연대급의 철주부대를 만든 윤명운 국장이 차일혁이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로 가는 것은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윤명운 후임 국장은 전삼조 경무관이었다. 이때 차일혁은 철주부대장에서 물러나 일선 경찰인 무주경찰서장으로 갔다. 전삼조 국장과는 무주경찰서장으로 만났다. 차일혁은 1953년 5월 15일 총경으로 승진하여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의 제2연대장으로 또 다시 빨치산토벌대장 직을 맡을 때까지 일선 경찰서장으로 있으면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차일혁은 무주경찰서장을 거쳐 임실경찰서장으로 가게 됐는데, 그때 전북 도경국장이 김종원이었다.
무주경찰서장으로 있을 때 차일혁이 물고기를 잡다가 수류탄을 던지는 과정에서 손을 다쳤는데, 차일혁의 부하가 나름 상관을 위한다는 마음에서 차일혁이 훈련하다가 손을 다쳤다고 허위보고를 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도경에서는 허위보고를 한 부하를 징계하고, 진상조사를 하게 됐다. 이에 차일혁은 본의 아니게 부하가 허위보고를 하게 됐는데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경국장에게 “그 부하가 별 뜻을 갖고 그런 것이 아니니, 대신 내가 그 책임을 지고 사표를 쓰고 나가겠다. 그러니 내 부하를 살려 달라.”고 했다. 그때 새로 부임해 온 신임 도경국장 김종원 경무관은 차일혁의 사표를 받지 않고, 대신 임실경찰서장으로 발령을 냈다. 그리고 차일혁이 총경으로 승진하여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으로 가게 된 후 김종원이 또 다시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관으로 오면서 차일혁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하지만 1953년 9월 18일 ‘남부군사령관’ 이현상 사살을 놓고 김종원은 그 전공을 독차지하기 위해 차일혁 부하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그 과정에서 차일혁은 사령관인 김종원에게 그 부당함을 따졌다. 결국 김종원은 이현상을 사살했다는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되면서 나중에는 치안국장으로까지 승진하게 된다.
그때 차일혁은 김종원에게 자신은 무공훈장을 받지 않을 터이니 부하들에 대한 부당한 압력을 중지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자칭 백두산호랑이를 자처했던 차일혁의 행동에 김종원도 멈칫했다. 김종원은 차일혁에게 만은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굉장히 어려워했다. 그만큼 김종원도 전투지휘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차일혁의 올곧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김종원은 어쩔 수 없이 차일혁에게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여 무마하고자 했다. 그래서 차일혁이 이현상을 사살하고도 태극무공훈장을 받지 못하고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된 것이다.
차일혁은 좋은 상관들도 많이 만났지만 좋은 부하들도 많이 뒀다. 옹골연유격대에서 부터 차일혁과 함께 했던 우희갑(禹熙甲), 김진구, 김규수(金圭洙)가 그들이다. 우희갑과 김진구는 해방 후인 호국군(護國軍) 때부터 차일혁과 같이 일했던 부하이자 동지들이었다. 차일혁은 그런 두 사람을 제18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할 때 중대장으로 임명하고, 주요 임무를 맡겼다. 그 중에서도 우희갑 경감은 전사했다. 김진구는 차일혁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다가 일선 경찰서로 갔다.
차일혁의 호위병 역할을 오랫동안 했던 김규수는 경찰간부시험에 합격하여 나중에 총경으로까지 승진했다. 그는 차일혁과 함께 토벌작전을 하며 싸웠던 소중한 기억들을 더듬어 2000년에 《옹골연부대 : 마지막 남은 유격대원의 실전담》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당시의 전투상황을 생생히 남겼다. 김규수와 함께 차일혁을 가까이 모셨던 연락병 유병수 순경은 무주 구천동 전투에서 전사했다. 차일혁은 우희갑 경감과 유병수의 죽음에 유독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오열했다. 그들은 차일혁에게 그만큼 정이 들었던 부하들이자 동지들이었다. 차일혁은 부하들의 죽음 앞에서 항상 “그들은 적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였다.”며 자책했다. 그만큼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다.
차일혁에게는 잊지 못할 많은 부하들이 있었다. 제18전투경찰대대 창설시 화랑소대장을 맡아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던 이한섭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칠보작전 때에도 목숨을 건 어려운 특공임무를 수행하여 결국 작전을 성공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현상 사살을 목전에 앞두고 적의 간계에 걸려 전사했던 김동진 1대대장도 잊을 수 없는 부하였다. 우희갑 중대장이 죽은 뒤, 차일혁을 돕기 위해 왔던 이병선 부대대장 겸 작전참모도 차일혁에게 많은 도움을 줬던 인물이다. 이병선은 차일혁이 떠난 뒤 제18전투경찰대대장을 맡아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부하가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이웃 주민들을 사살한 김용운 중대장이다. 그는 주민들을 학살한 죄로 군법회의에 넘겨져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가족들의 복수를 위해 장교로 있다가 군에서 나와 경찰에 투신한 사람이었다. 차일혁은 그런 부하의 죄는 미웠지만 한 때 부하였던 그를 위해 형무소로 여러 번 면회를 가 위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차일혁은 제18전투경찰대대 대대장과 철주부대장 재직 중 빨치산토벌작전을 하면서 89명의 부하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구이작전 3명, 칠보공방전 12명, 고창수복 11명, 내장 덕태산 토벌 13명, 명덕리 탈환 및 고창 문수산·완주군 주변 산악전투 9명, 가마골·금산 남이면 전투 8명, 구천동전투 전사 27명과 실종 6명이었다.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제2연대장으로 있을 때도 부하들은 죽어갔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김동진 1대대장과 그의 부하들이다. 아까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의 부하들은 차일혁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아무리 어려운 임무를 받더라도 차일혁이 명령하면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수행했다. 김규수가 그랬고, 유병수가 그랬고, 우희갑이 그랬고, 최순경이 그랬고, 김동진이 그랬고, 유도주가 그랬고, 이한섭이 그랬고, 김진구가 그랬다. 차일혁은 그런 부하들을 믿고 과감히 전투지휘를 할 수 있었고, 차일혁의 부하들은 믿음직스러운 차일혁을 믿고 적진으로 뛰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제18전투경찰대대의 전투력이 뛰어난 이면에는 차일혁과 부하들과의 그런 끈끈한 전우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차일혁은 그런 부하들과 함께 전북지역의 치안을 회복했고, 지리산에 평화를 가져왔고, 나아가 대한민국 후방지역의 치안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는 차일혁을 비롯한 그의 부하들의 숭고한 피와 땀이 함께 했다. 그들의 생사를 넘나드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세월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고개가 숙여진다.〈끝〉